72화 카일덴트 (4)2021.12.12.
첨탑의 꼭대기에서 펼쳐져 나온 거미줄들은 꽃밭 전체에 천막처럼 늘어져 있었는데, 각양각색의 꽃들로 화려했을 화원은 본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키이이익-! 마테라크네가 주둥이를 오므려 기이한 음색을 자아내자, 그것에 응하듯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수의 그로자크네들이 화원 외곽으로부터 중심을 향해 기어오기 시작했다. 미리아드와 시드는 상상 이상의 규모로 몰려오는 몬스터 떼거리에 아연실색했다. 생각하던 것을 실제로 보게 되니 그 위압감이 상당했던 탓이었다. “미리아드!” 스테치의 다그침에 미리아드가 그제야 스테치를 되돌아보았다. 그는 압도적인 몬스터들의 물량 공세에도 위축되기는커녕 검을 뽑아든 채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당황하지 말고 저기를 봐.” 스테치가 가리키는 방향은 다름 아닌 마테라크네와 녀석의 둥지인 뿔기둥 아래쪽.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그것은 먼 거리에서도 육안으로 확인 가능할 정도였다. “던라이트?! 젠장, 하필이면 저런 곳에…….” “[누나, 역시 지금이라도 그만두는 편이……]” 약한 소리를 하는 동생을 미리아드가 다그쳤다. “[시드. 한 번만 더 헛소리하면 너부터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스테치가 미리아드와 시드의 대화를 끊었다. “그로자크네 놈들의 발을 묶어 놓겠어. 그 틈을 타서 너랑 네 동생은 던라이트를 뽑아.” 메멘토 모템이 끼워진 손을 불끈 움켜쥐자, 스테치의 전신에서 어두운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흔들흔들 피어올랐다. 안개처럼 주변으로 얕게 퍼진 검은 입자가 목둘레를 휘감더니, 등 뒤로 길게 늘어지는 망토가 되어 펄럭였다. 《어빌리티 : 커스 아우라(lv 1) -> 커스드 클록(lv 2). 넘쳐나는 사기의 아우라를 몸에 둘러, 인접한 주변의 적을 상시 약화시킵니다. (효과의 범위를 ‘기본’ 이상으로 넓힐수록, 사용자에게 걸리는 부담도 증가합니다.)》 『레지아 계곡 이후로는 한 번도 시험해 본 적 없지?』 메멘토 모템이 말하는 것은 검은 아티팩트에 대한 이야기였다. 막대한 양의 사기를 흡수하는 데에 성공한 메멘토 모템은, 그것을 기반으로 스테치의 신체에 최적화된 새로운 형태로 어빌리티를 진화시킨 것이었다. 부담은 적고, 사용하기엔 더욱 간편하게. 스테치는 마음에 들었는지 씨익 웃으며 제자리에서 훌쩍 뛰어 보였다. ‘사기가……!’ 칠흑 같은 에너지와 동시에 반지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맹렬한 빛에 미리아드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주춤거렸다.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통상의 아티팩트는 사기를 원동력으로 하여 어떠한 현상을 일으키는 아이템인 데에 반해, 스테치의 메멘토 모템은 ‘사기의 운용’ 자체를 능력으로서 사용하는 아티팩트인만큼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던 것이다. “간다!” 바람에 흩날리는 메멘토 모템으로부터 구 형태로 전개된 커스드 클록의 거대한 영역이, 몰려오던 그로자크네 떼를 뒤덮었다. 쿵! 달려오던 몬스터 무리가 그대로 고꾸라지더니 화원의 꽃을 흩날리며 바닥을 쭉 미끄러졌다. 백 마리에 달하는 몬스터들이 순식간에 무력화 되자, 시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 순간, 스테치가 외쳤다. “지금이다!” 미리아드는 그제야 그로자크네들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언가 이상이 생겼는지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리는 발과 입이 풀려 흘러내리는 침. 스테치가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정말 해낸 것이다. “[가자, 시드!]” “[우리가 죽게 되면 다 누나 책임이야!]” 마테라크네와 첨탑을 향해 뛰어가는 누나를 보며, 동생은 억지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마테라크네는 그 커다란 몸을 바짝 낮추며 알을 품은 첨탑을 지키려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강력한 몬스터라 그런지 몰라도 스테치의 커스 아우라를 뒤집어쓰고도 멀쩡해 보이는 건 녀석뿐이었다. 《액티브 스킬 : 쇼크 볼트. 전기 에너지를 품은 발사체를 날립니다.》 시드의 손에서 날아간 전격이 마테라크네의 눈가를 두들기자, 녀석은 집게가 달린 발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마테라크네의 뒤로 돌아간 미리아드가 첨탑 꼭대기로 주문을 시전했다. 《액티브 스킬 : 일렉트릭 휩. 전기로 구성된 채찍을 만들어 상대를 포박합니다. 구속 시 상대에게 지속 데미지 및 낮은 확률로 상태 이상 ‘마비’가 들어갑니다.》 촤악-! 채찍으로 첨탑의 끝을 휘감은 미리아드의 몸이 빠르게 끌려 올라갔다. 마테라크네가 집게 손을 내렸을 때 그녀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었고, 대신 시드가 녀석의 앞에 나타나 시선을 끌었다. “[위에 보지 마라, 위에 보지 마라……]” 시드는 끙끙거리며 화살과 주문을 발사했다. 치명적이진 않지만, 그냥 놔두기에는 신경이 거슬리는 공격들. 마테라크네는 꽁무니에 빽빽이 자라나 있던 체모들을 뻣뻣하게 일으켜 바늘처럼 쏘아 보냈다. “우왁!” 갑작스런 전방위 공격. 시드에겐 바늘만 한 크기의 투사체를 막거나 피할 만한 능력은 없었다. 무방비 상태의 그가 몸을 움츠리자,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온 스테치가 시드의 앞을 막아섰다. 《크로스 윈드》의 기류에 쓸려나간 체모들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고, 그 순간 첨탑 꼭대기에 있던 미리아드가 뛰어내렸다. 묶어둔 채찍으로 속도와 완급을 조절하며 탑을 내려가던 미리아드. 탑 아래쪽에서 다리를 휘감고 단단히 붙어 있던 마테라크네에게 가까워지자, 그녀는 주먹 쥔 손을 크게 휘두르며 외쳤다. “《록 스파이크》!” 첨탑 외벽에서 튀어나온 바위 스파이크가 붙어 있던 마테라크네의 배면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녀석이 강제로 떨어져나가 공중으로 붕 뜬 순간, 그녀는 녀석이 있던 자리에서 흔들거리던 꽃을 비틀어 꺾었다. “네 차례다!” 퍼엉! 스테치의 손바닥에서 발사된 화염구가 마테라크네에 적중하자 녀석은 불길에 휩싸인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커스 아우라를 거둬들인 그가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주변에서는 막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로자크네들이 다시 달려오고 있었다. “너희는 이제 돌아가! 가까이에 있으면 너희들까지 휘말려!” 미리아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드에게 손짓했다. 시드는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누나와 함께 동굴 쪽으로 달려가 몸을 숨겼고, 두 사람이 안전한 위치까지 멀어진 것을 확인한 스테치의 전신에서는 《크로스 윈드》의 난기류가 한층 더 거세게 뿜어져 나왔다. 두두두- 그로자크네 떼가 지척까지 도달한 순간, 스테치는 위쪽으로 손을 향했다. 『《에어 버스트!》』 “파이어 볼!” 합성 주문 《블레이징 스톰》. 먼저 발사된 《에어 버스트》에 《파이어 볼》이 격돌하자, 난기류에 뒤섞인 화염구가 거대한 폭발음과 동시에 소용돌이쳤다. 바람을 머금어 격렬해진 불길이 그로자크네들을 쓸고 지나가자, 화원 전체가 눈 깜짝할 사이에 불바다로 돌변해 버렸다. 그 기세는 너무나도 압도적인 탓에, 동굴에서 다른 그로자크네들과 싸우고 있던 시드와 미리아드에게까지 그 여파가 밀려올 지경이었다.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른 불기둥이 사그라들 무렵, 그로자크네들의 둥지로 가득 차 있던 화원은 깡그리 불에 타 새까만 재로 뒤덮여 있었다. 그 자리에, 마테라크네를 제외하면 살아남은 생명체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간신히 살아남은 몇몇 개체마저도 몸에 붙은 불꽃으로 인해 숨통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거나, 탄화된 신체가 먼지처럼 바스러져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갔다. “타죽는 줄 알았네.” 스테치는 셔츠에 붙은 불똥을 후다닥 털어 내며 중얼거렸다. 최대한도까지 《크로스 윈드》를 전개시켜도 온전히 막아 낼 수 없는 위력이었다. 피아 식별도 안 되고 파괴력이 필요 이상인지라 자주 쓰기 힘든 주문이었지만, 그만큼 효과는 발군이었다. “그럼 이제…… 너만 남았군.” 손을 휘저어 화원에 겹겹이 쌓인 모든 마력을 흡수하는 스테치의 눈앞에는, 모든 것을 잃고 홀로 남은 마테라크네가 우뚝 서 있었다. 메멘토 모템은 조금 어리둥절하여 입을 열었다. 『어떻게 몸에 탄 자국 하나도 없지?』 그 말대로 마테라크네는 그만한 화염을 끼얹었는데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스테치는 그런 상대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머뭇거리는 일 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이제 와서 그런 걸 생각해 봤자 의미 없어. 저놈은 내 손에 죽을 테니까.” 어차피 집단생활을 하는 그로자크네는 무리의 알파가 남아 있는 한은 절대 싸움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보나 마나 시드나 미리아드는 남은 그로자크네에 막혀 아직 동굴을 빠져나가지 못했을 터. 그렇다면 어미를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잖은가. 마법으로 안 된다면 남은 수단은 물리력뿐. 스테치는 탄띠에 꽂혀 있던 탄을 꺼내 페네트레이터의 핸들에 집어넣었다. 다만 이번엔 상대가 상대인 만큼,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센티그마에서 재정비 할 당시, 스테치는 연금술사인 캐스퍼로부터 특수탄들을 제공 받았다. 단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데다, 메멘토 모템이 정신 나갔다고 묘사했던 그 탄. 탓! 스테치가 지면을 힘차게 딛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마테라크네가 뒤늦게나마 산성액 뭉치들을 뱉어 냈지만 바람의 방벽에 밀려 번번이 빗나갈 뿐이었다. “으아아아!” 산성액 다음으로 날아드는 것은 마테라크네가 뻗은 두 개의 집게발. 검을 비스듬히 세워 집게를 튕겨 낸 스테치는 남은 하나에 손바닥을 겨눴다. “《에어 불렛》!” 텅! 앞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이 사라졌다. 스테치가 마테라크네의 머리통에 일격을 먹이기 위해 검을 찔러넣자, 날 부분을 이빨로 붙잡아 멈춰 세웠다. 크게 한 방 먹이려던 스테치는 황급히 손가락을 방아쇠로부터 뗐다. “이익……?!” 이 상태에서 방아쇠를 당겨 봤자 효과는 반감될 뿐. 스테치는 검을 비틀어 뽑은 다음 백스텝을 밟아 좌우로 교차하여 들어오는 집게발들을 피했다.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집게가 코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머릿속으로 새로운 주문 조합이 흘러들어오자, 스테치는 빠르게 합장한 다음 손바닥을 마테라크네에게로 뻗었다. “《아이스 웨이브》!” 『《에어 불렛》!』 지면을 따라 펼쳐지던 얼음의 파도가 마테라크네의 코앞에 거대한 얼음 결정을 피워 올리고, 그 위를 《에어 불렛》의 탄환이 강타했다. 《콤비네이션 스킬 : 아이시클 불렛. 크고 작은 다수의 예리한 얼음 파편을 쏘아 보냅니다. 보통의 확률로 상태이상 ‘출혈’을 유발합니다.》 산산조각 난 얼음 결정 파편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마테라크네를 덮쳤다. 화염 폭풍에도 멀쩡하던 외골격은 수십 개의 면도날 같은 파편에 꿰뚫렸고, 그 결과 마테라크네의 몸은 불과 몇 초 만에 너덜거리는 걸레짝처럼 변해 버렸다. ‘지금이다!’ 스테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마테라크네가 채 움직이기도 전에 녀석의 머리통으로 검극을 겨눈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살라만더 더스트. 화염의 정수 그 자체인 불의 정령, 살라만더를 연금술의 힘으로 소재화한 물건. 말 그대로 화염의 정수라고도 부를 수 있는 귀중한 소재다. 연소 시 발생되는 순간 화력은 스테치가 시전한 《블레이징 스톰》조차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였다. 콰과광! 천둥 같은 폭발음과 동시에, 탄이 장전되어 있던 페네트레이터의 힐트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전방으로 뚫린 가스 배출구에서는 연기가 아닌 푸른 불꽃이 방사되었다. 어찌나 뜨거운지 마테라크네의 두부를 감싸고 있던 단단한 껍질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익어 버릴 지경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의 충격으로 밀려나간 타격부는 하얗게 변한 마테라크네의 껍질을 깨부수고, 부드러운 살마저 파고들었다.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녹색의 체액이 스테치의 안면으로 끼얹어졌다. 쿠웅-! 미친 듯이 덜덜 떨리던 다리를 푹 꺾으며 바닥에 주저앉는 마테라크네의 머리 없는 사체. 스테치는 반동을 채 제어하지 못해 저릿거리는 팔을 간신히 움직여 검을 뽑아냈다. ‘……그 연금술사는 대체 무슨 물건을 나한테 준 거지?’ 스테치가 코를 풀며 폼멜을 잡아당기자, 손으로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새빨갛게 달궈진 체임버 내부가 드러났다. 어마어마한 위력을 고스란히 받아 낸 컴버스쳔 체임버에는 정작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다. 『스테치, 저길 봐라!』 메멘토 모템의 말에 스테치가 고개를 들자, 마테라크네의 몸통의 피하에서 강렬한 빛이 발산되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섀터드 아이스》로 갈라진 틈에 손을 넣어 휘적이자, 안에서는 번쩍이는 보석과 누군가의 것인지 모를 방어구들이 굴러 나왔다. “이건…….” 『어쩐지 일반 마테라크네 치고는 너무 강하다 싶었지. 몬스터의 사기에 가려져 포착할 수가 없었군.』 보석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아티팩트. 아무래도 이 마테라크네는 우연찮게 아티팩트를 지닌 모험가를 통째로 잡아먹는 바람에 지금처럼 강력해진 모양이었다. 메멘토 모템의 말을 들은 스테치는 보석을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