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카일덴트 (5)
(73/203)
73화 카일덴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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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카일덴트 (5)
2021.12.13.
알파가 사라지자 휘하의 그로자크네들은 마치 세뇌에서 풀린 것 마냥, 혼비백산하여 어딘가로 흩어져 버렸다.
도망친 놈들은 모두 수컷이었으니 어딘가에서 짝을 찾지 않는 한은 다시 무리를 형성하기 힘들 것이라는 게 스테치와 메멘토 모템의 생각이었다.
아티팩트를 획득한 스테치는 미리아드와 시드에게서 던라이트를 건네받은 뒤, 서둘러 마을로 향했다. 카일덴트로 향하는 스테치의 머릿속은 온갖 불안감으로 꽉 찬 상태였다.
혹시 재료가 부족하진 않을까? 이미 늦은 건 아닐까? 그러나 다행히도 엘레나는 그가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도 무사히 살아 있었다.
스테치가 이미 죽었을 거란 생각에 아무런 기대조차 하지 않고 있었던 마을 주민들은, 사지 멀쩡하게 돌아와 던라이트를 건네주는 스테치를 보곤 기함하여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뭐해요, 빨리 일 시작 안 하고!”
스테치가 빽 소리 지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던라이트를 집어 들었다.
하릴없이 마을에서 시간을 보내던 몇몇 주민들이 모여 함께 작업에 착수하자, 모든 것이 일사분란하게 진행되었다. 던라이트의 꽃자루를 따로 떼어 낸 마을 약사는 비몽사몽한 엘레나의 입에 밀어 넣었다.
“꼭꼭 씹어 먹게. 기력 보전에 도움이 될 테니.”
뿌리에서 흙을 털어 낸 약사는 보관함에서 다른 몇몇 약초들을 꺼내더니 전부 망에 집어넣었다.
대부분은 스테치가 들어본 적도 없는 재료였다.
‘플레멘스, 녹용, 인삼…… 세상에, 딱 봐도 몸에 좋은 것들은 죄다 때려 넣고 만드는군.’
본 적도 없는 온갖 재료들이 제조 과정 중에 투입되었다.
옆에서 유심히 바라보던 스테치가 영 신경 쓰였는지, 약사는 팔팔 끓는 회복 물약에 약재가 담긴 망을 담그며 한 마디 툭 던졌다.
“어쩌다가 저 지경이 되었는가? 저렇게 쓰러질 정도로 마력을 쥐어짠 사람은 살면서 본 적이 없는데…….”
“…….”
스테치가 입을 꾹 다물자, 약사는 무거운 한숨을 토해 내며 말했다.
“약값은 비쌀 걸세. 회복이 절실한 만큼 넣을 수 있는 모든 재료를 쏟아부었으니.”
“그건 걱정하지도 마시죠.”
스테치가 이전의 탐험에서 얻어두었던 금화와 보석들을 꺼내 보이자, 두 사람의 대담을 엿보고 있던 마을 주민들의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물약이 완성되기까지 소요된 시간은 짧았지만, 스테치에겐 피가 마르는 듯한 순간이었다.
몇 시간이 지나 완성된 물약을 들고 마차로 가자, 짐칸 한켠에 앓아누운 엘레나가 보였다.
그녀를 간병하던 가렛의 부하는 스테치가 돌아온 것을 보곤 다행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자, 마셔.”
엘레나의 상반신을 안아 일으킨 스테치가 조심스레 물약을 그녀의 입으로 흘려 넣었고, 마른 입술을 달싹이던 엘레나는 천천히 그것을 삼켰다.
“아…….”
엘레나가 병 하나를 깔끔하게 비워 내자, 스테치는 늘어지는 신음과 동시에 마차 짐칸에 드러누웠다.
약사가 그 효능을 보증한 만큼 그녀는 이제 안전할 것이다.
땀으로 푹 젖은 상의를 펄럭이며 열을 식히던 가렛의 부하가 스테치에게 물었다.
“제때 오셔서 다행입니다. 큰일 나는 줄 알았거든요.”
“정말…… 응?”
스테치는 갑자기 떠들썩해진 마을 사람들 목소리에 몸을 일으키고 마차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마을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차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던 한 여성이었다.
바다처럼 푸른 그녀의 머리카락은 마을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아이고, 두야…….”
스테치는 여성의 얼굴에 그려진 페이스 페인팅을 보고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미리아드는 그를 보더니 반갑게 손을 들었고, 마침 그것을 본 가렛의 부하는 의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저 여자는 누굴까요? 적인가?”
“아니…… 내 손님이야. 미안한데 잠깐 자리 좀 비워줄 수 있을까?”
“? ……네.”
스테치의 부탁을 들은 사내는 선선히 마차에서 내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를 지나쳐 마차로 접근해 온 미리아드는 스테치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그녀는 곤히 잠든 엘레나의 모습에 스테치를 돌아보며 말했다.
“정말이지 너는 한 치의 거짓말도 하지 않는 성실한 인간이로군, 스테치.”
“설마 지금까지도 날 안 믿었던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뭐든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엔 모르는 법인지라.”
미리아드가 말끝을 흐렸다.
하긴 엘프인 그녀에게 누군지도 모르는 인간의 말을 갑자기 믿으라고 한다면, 거부감이 드는 게 당연했다. 미리아드는 엘레나의 옆에 앉아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스테치는 미리아드에게 물었다.
“……엘레나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데?”
“친한 언니 동생 관계지. 피가 이어진 가족은 아니지만.”
미리아드가 말했다.
그녀가 이끄는 카일덴트의 엘프들과 어둠의 숲 엘프들은, 예로부터 자원이나 정보 교류가 활발했다.
미리아드는 어둠의 숲을 방문하면서 여러 부족의 족장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러다가 엘레나를 만나게 되었다.
“착한 아이였어.”
오랜 기억을 털어놓는 그녀의 눈은 추억을 되새기고 있었다.
당시의 부족장 케인의 딸이었던 엘레나는, 친형제가 없어서인지 나이 차가 적은 미리아드를 유독 잘 따랐다.
덕분에 그녀와 그녀의 부족원들이 엘레나를 막둥이처럼 귀여워하기까지는 그닥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엘레나가 던전 때문에 아버지를 잃게 되고, 덩달아 시시각각 악화되어가는 어둠의 숲속 던전들 때문에 결국엔 교류가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미리아드의 엘프들이 엘레나의 이름을 듣고 유독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케인 씨라면 내가 구해낸 지 오래인데? 이쪽은 엘레나가 직접 설명하게 놔둘까…….’
스테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으음…….”
한창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스테치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끙끙거린 엘레나가 이윽고 조용히 눈을 뜨자, 무릎베개를 해 주고 있던 미리아드와 눈이 마주쳤다.
현재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지 양미간을 좁히고 찡그리던 그녀는, 이내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미리 언니?”
“하, 하하……!”
엘레나를 내려다보는 미리아드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져내렸다.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엘레나가 무사히 정신을 차리자 전신의 긴장감이 풀린 탓이었다.
스테치는 눈치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 근처에 마을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언니가 이미 숲을 떠났을 줄 알았어.”
엘레나가 힘없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미리아드의 소식이 끊긴 이후로는 행방을 알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엘레나의 말에 미리아드는 고개를 저었다.
“함부로 이주했다간 인간들의 이목을 끌게 될 뿐이니까.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던 이 숲에 귀한 약초들이 자생하게 된 건 누구 덕택이라고 생각하니?”
약초가 자랄 환경을 가꾸어 주고, 그것을 미끼로 하여금 인간들의 자연 파괴를 방지하며 이동경로를 통제하는 것.
그게 미리아드가 인간들과의 접촉을 최소화 하면서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나저나 내가 있는 마차는 어떻게 알고 온 거야?”
그제야 미리아드는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쭉 설명해 주었다.
스테치가 그녀와 처음 만나게 된 부분부터, 서로 협력하여 던라이트를 구해 오기까지의 일들.
엘레나는 자신이 잠든 사이에 그렇게 많은 일이 벌어졌다는 점에 놀랐는지, 이야기가 끝날 무렵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미리아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사람답네.”
엘레나가 말하는 그 사람이란 물론, 스테치를 의미했다.
미리아드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나저나, 내 얘기만 듣지 말고 너도 말 좀 해 봐! 인간하고는 어쩌다 엮이게 된 건데?”
미리아드는 안 그래도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엘프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짙은 불신감을 품고 있었다. 미리아드도 엘레나의 이름을 듣지 않았더라면 스테치와 함께 싸운다는 건 꿈도 못 꿨을 것이다.
“그게…….”
엘레나의 이야기는 길었다. 하지만 처음 스테치와 그녀가 노예상 문제로 얽힌 것부터, 유물을 빌미로 함께 던전을 탐험하다 마지막엔 그녀의 아버지를 구해 낸 것까지 하나하나가 전부 흥미진진했다.
특히 스테치가 왕국 순례를 돌게 된 이유를 듣게 되었을 때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미리아드를 경악케 만든 것은 바로 케인의 귀환이었다.
인간이 어둠의 숲에 홀몸으로 들어온 것도 모자라, 엘프들의 골칫거리였던 던전을 싸그리 정리하고 엘레나의 아버지까지 구해 내다니?
“이거 생각 이상으로 굉장한 놈이었네…… 그래서 따라다니는 거야? 빚을 갚으려고?”
미리아드는 문신으로 가득 찬 엘레나의 팔을 흘끔 쳐다보았다.
아티팩트가 엘프에게 얼마나 꺼림칙한 물건으로 여겨지는지 잘 아는 그녀였기에, 아므리타를 사용하는 엘레나가 어느 정도로 큰 결심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으, 으응.”
엘레나는 멋쩍은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본 미리아드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물었다.
“……너, 설마?”
“…….”
가을의 단풍잎처럼 새빨개진 얼굴을 양손으로 가린 엘레나. 미리아드는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이것 봐라…… 진짜로? 네가 인간한테?”
“언니!”
마차 바깥까지 들리고도 남을 크기의 웃음소리.
엘레나는 씩씩거리며 미리아드의 괘씸한 입을 가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한손으로 엘레나의 방해를 물리치며 계속 웃어 재꼈다.
“뭐, 그거야 네 마음이니까. 나도 저 인간이라면 안심이고…… 그나저나 이 소식을 들으면 시드가 뒤집어지겠는데?”
미리아드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오래간만에 대화하니까 너무 좋다. 여기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겠지?”
“아마 그럴 것 같아. 다음 목적지가 어디일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그래그래, 기회가 있거든 다음에 또 보자. 언제든지 숲으로 놀러오렴.”
미리아드는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려 스테치에게로 걸어갔다.
나무 밑동에 기대고 앉아 되도 않는 풀피리를 불어대던 그는, 미리아드가 다가오자 벌떡 일어섰다.
“다 끝났나? 엘레나는 어때?”
“상태가 아주 좋더군. 대화가 끝날 때쯤엔 거의 말짱해졌어.”
미리아드가 말했다.
“스테치. 네가 인간 치고는 그 누구보다도 믿음직스럽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겠다. 그러니 약속해다오. 엘레나가 너에게 진 빚을 갚다가…… 잘못되는 일이 생기게 놔두지 않겠다고.”
“처음부터 엘레나는 나에게 빚진 거 없었어. 그러니 본인이 떠나고 싶어 한다면 난 붙잡지 않을 거야.”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원, 둘 사이에 끝을 보긴 요원하겠구만. 아니면 혹시 일부러 저러는 건가?’
미리아드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녀는 잠시 침묵을 고수하는가 싶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음 목적지는 어디지?”
“글쎄…… 아직 정하진 않았어. 여기까지 오느라 정신이 없었거든.”
스테치가 말했다.
그만큼 카인델트에 오기 전까지의 그는 엘레나의 치료 이외엔 별도의 계획을 짤 여유가 없었다. 그러자 미리아드가 말했다.
“혹시 북쪽으로 올라가려거든 말릴 생각이었다. 요즘 동향이 심상찮거든.”
“무슨 말이야?”
“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