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스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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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스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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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스카이
2021.12.15.
조각배는 어둠이 짙게 깔린 바다를 천천히 나아가며 버든베어의 외곽을 돌았다.
쇠창살로 굳게 막힌 진입로를 몇 개인가 지나친 렉페이스의 배는 불빛 하나 없는 도시의 운하를 쑥쑥 나아갔다.
경비병이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수작을 부려 놓은 모양이었다.
“오래간만인데 너무 야박한 거 아냐?”
렉페이스는 침묵을 고수하는 스테치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단순히 오랜 친구를 만났다기엔 그 말투가 상대의 속을 박박 긁고 싶어 안달 난 것 같았다.
“얼마만이지? 13, 14년? 당당하게 버든베어를 떠날 때는 언제고 왜 지금 다시 찾아오셨나?”
스테치는 뱃사공 노릇을 하는 그로부터 정 반대편에 앉은 채 시선을 바닷물 속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자 렉 페이스는 엘레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전신을 핥는 듯한 시선에 소름이 돋은 엘레나가 몸서리를 치자, 그는 물었다.
“말해 봐. 저 남이랑 어울리기 싫어하는 자식을 대관절 무슨 언변으로 구워삶았길래 붙어 다닐 수 있는 거지?”
화르륵—.
펼쳐 보인 스테치의 손아귀 위로 주먹만 한 화염구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최소한 렉페이스의 비아냥거리는 태도를 잠재우는 데에는 충분했다.
“……잔재주가 늘었군, 아텔리어.”
“원한다면 이대로 네 주둥이에 처넣어 줄 수도 있어.”
조각배가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렉페이스는 스테치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자신을 노려보자, 정신 나간 놈 마냥 웃어 대며 그를 마주 보았다.
“……대체 뭘 기대한 건데? 넌 모두가 가장 힘들어하던 때에 떠나 버린 천하의 매정한 새끼야. 그런 주제에…… 따뜻한 환영 인사라도 해 주길 기대한 거냐?”
엘레나로선 무슨 뜻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말들이 렉페이스의 입에서 튀어나왔고, 스테치는 손안의 화염구를 꺼트린 뒤 콧방귀를 뀌었다.
잠시 후, 조각배는 하수구 터널에 들어섰다.
터널 안쪽 선착장에 배를 댄 렉페이스는, 스테치와 엘레나가 내리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배를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잘 해 봐…… 이 도시에 있는 놈들은 죄다 네 모가지가 땅에 떨어질 날만 기대하느라 안달이 나 있을 테니까.”
“야!”
스테치가 외쳤다.
“그래서 스카이는 어디 있어?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는 건데?”
누구? 엘레나가 스테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렉페이스는 질문에 대답하기는커녕 기분 나쁜 웃음소리와 함께 조각배를 몰고 가 버렸다. 그것을 황당하다는 듯 지켜보던 스테치는 엘레나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버든베어에 오게 된 이상 앞으로도 이런 일은 많이 겪게 될 거야.”
“이제 와서 그 정도는 문제 될 것도 없어요.”
태연하게 대꾸하는 엘레나였으나, 속마음은 물어보고 싶은 내용들로 한가득이었다.
스테치는 당장 그녀의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설명해 주지 못하는 것에 미안해하며 운하를 따라 걸어갔다.
스테치가 지상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맨홀 뚜껑을 살짝 들어 올리자, 인적이 드문 골목길이 나왔다. 그는 엘레나와 함께 주변을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건 좋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도통 감이 안 잡히는데.”
버든베어를 떠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새로운 건물들로 꽉 들어차 예전에 봤던 길조차도 낯설어 보이는 상황. 스테치가 한창 기억을 쥐어짜느라 벽에 기대어 서 있는 그때, 엘레나가 스테치에게 물었다.
“아텔리어 씨, 잠깐 이것 좀 보세요.”
“어?”
골목 벽에 붙어 있던 무언가를 떼어 낸 엘레나는 그것을 스테치에게 건네주었다. 너덜너덜하게 해지고 빛바랜 종이에는 큼지막한 지명수배 문구와 누군가의 얼굴, 그리고 이름이 적혀 있었다.
‘수배 중 – 스카이 걸킨 - 120만 크라운’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잊혀지지 않는 그 얼굴. 수배지의 이름과 그림을 확인한 스테치는 일순 넋을 잃었고, 엘레나는 그것을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찾고 계신 사람의 이름이…… 이거 아니었나요?”
“……맞아. 이 스카이(Skye)야.”
스테치의 어린애 낙서 같았던 것과는 달리, 스카이의 수배지 몽타주는 꽤 세밀했다.
끄트머리가 노랗게 물든 갈색 머리카락, 사내새끼 치고는 곱상한 얼굴. 유일하게 스테치의 기억과 다른 점이라면 오른쪽 눈부터 입술 끝까지 이어지는 흉측한 상처였다.
그동안 뭔 짓을 하고 다녔길래 이렇게 된 거지?
스테치는 종이를 한참동안 들여다보았다.
어쨌든 일이 매우 곤란하게 되었다. 120만 크라운이라는 현상금은 개인에게 걸리기엔 너무나도 막대한 금액. 그 정도 수준의 범법자가 된 스카이를 대체 어디서, 무슨 수로 찾으란 말인가.
심지어 지금은 블랙 마켓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다.
“말해주세요. 이 사람하고 아텔리어 씨는 서로 무슨 관계인가요?”
엘레나로서는 분명 오늘 벌어진 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되지 않는 것 투성이었으리라.
스테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대놓고 입 밖으로 꺼내기엔 영 껄끄러운 이야기라서…….”
스테치가 말했다.
“고아원을 막 나왔을 때, 어린아이였던 나는 닥치는 대로 돈 될 만한 일을 찾아 돌아다녔어. 머물 집은커녕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지. 그러다가 만난 게 이놈이야.”
스카이 걸킨.
그것이 녀석의 이름이었다.
스테치와 마찬가지로 어디서 흘러들어왔는지도 모를 고아.
의지할 곳 없던 두 사람은 금세 친해졌고, 숙식을 포함한 모든 것을 함께 했다.
“우린 도시에서 가장 은밀한 곳에 은신처를 꾸리고, 또래 아이들을 규합했어. 근본 없는 우리가 얕보이지 않으려면 패거리를 만들고 똘똘 뭉치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직 어렸던 그들이 세운 목표는 딱 한 가지였다. 다시는 그 누구도 자신들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다만 그러기 위해 두 사람이 선택한 방식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스테치는 자신을 무시하던 사람들보다 더 크게, 보란 듯이 성공하는 것으로 목표를 이루고 싶었다. 때문에 그는 돈을 모아 무기를 구하고 던전으로 가는 탐험단에 합류했다.
보수도 짜고 항상 짐만 들어주는 역할이었지만, 덕분에 베테랑들의 어깨너머로 수많은 테크닉들을 배울 수 있었다.
스카이는 어느 누구도 건드리지 못 할 만큼 강력한 존재가 되어, 다른 무시받는 존재들의 보호자가 되고 싶었다.
타고난 손재주와 때마침 각성한 마법 능력이 이러한 생각을 부추겼고, 결국 스카이는 극단적인 반정부주의자로 돌변해 버렸다.
“그리고 결국 일이 터졌지. 하루는 스카이가 나한테 항구에 있는 창고 하나를 열어 안을 보여줬는데, 수백 킬로그램의 폭약으로 가득 차 있더라고.”
스테치가 도시를 빠져나가기 위한 밑천을 모으고 있을 때, 스카이는 대량의 사제 폭탄을 만들어 항구의 창고들을 일제히 폭파시킬 계획을 세웠다.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할 것은 당연지사였고, 스테치는 스카이와 대판 싸운 뒤 혼자서 도시를 떠나 버렸다.
이후 버든베어를 떠난 스테치는 스카이에 대한 그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기분 나쁘긴 해도 렉페이스의 말이 맞아. 스카이의 사상이 옳았건 틀렸건 간에, 난 녀석이 가장 필요로 하던 때에 함께 있어 주지 않았어. 다른 놈들이 날 띠껍게 여기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
스테치의 말을 들은 엘레나는 왜 그가 스카이에 대한 이야기를 망설였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친구를 배신했다는 죄책감으로 마음이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젠장.’
스테치는 이를 악물곤 수배지를 품에 넣으며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 있다면, 스카이 같은 거물급 수배범이 버든베어 어딘가에 주둔하고 있는 한 스테치의 수배지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일단 가자. 여기에서 머뭇거려봤자 죽도 밥도 안 돼.”
스테치와 엘레나는 골목을 나서서 시장과 번화가로 향했다.
깔끔하게 포장된 길목을 거닐 때마다 곳곳에서 풍겨오는 생선 비린내와 정체 모를 악취. 도시 안으로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니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은행과 서점 건물도 보였다.
『의외로 경비병들은 도시 사람들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군.』
메멘토 모템이 중얼거렸다.
가는 길마다 배치된 경비병들은 도시 입구 쪽에 비하면 경계가 굉장히 허술했는데, 이는 항구 도시의 특성상 수많은 사람들의 후드를 전부 들춰보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바보가 아닌 이상 스카이처럼 개성 넘치는 얼굴의 소유자가 대놓고 거리를 활보할 리도 없었다.
“어디로 가시게요?”
“일단은…… 스카이와 내가 예전에 지냈던 아지트로 가 볼 거야. 어지간한 사람들은 찾아내기 힘든 장소니까, 운이 좋다면 거기서 뭔가를 발견할 수도 있겠지.”
어린아이들이 어른의 눈을 피해 자기들만의 공간을 만든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만든 아지트는 하수도 시스템에서도 가장 깊숙하고 은밀한 장소에 숨겨져 있었다.
“거기까지 가는 길은 기억하시나요?”
스테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온갖 대형 상점과 주점이 늘어선 거리에서 벗어나 골목길로 다시 접어들자, 또 다른 맨홀 뚜껑이 보였다.
“아마 이쪽일 거야.”
스테치는 뚜껑을 열고 아래로 내려갔다.
하수구 특유의 습하고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스테치는 메멘토 모템의 빛을 이리저리 돌리며 길을 비춰보더니, 길을 따라 어디론가 이동했다.
“내가 했던 말 기억나? 스카이의 손재주가 상당했다는 거.”
스테치는 터널 내벽을 한 손으로 더듬으며 엘레나에게 말했다.
“우리 둘은 어린아이도 안전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헤맸지만, 도시 어느 곳을 뒤져봐도 그곳엔 이미 어른들이 있었어. 하수로? 폐건물? 인간 말종 쓰레기들로 가득했지. 그래서…….”
한참 동안 벽을 쓸어가며 움직이던 스테치는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반지의 빛으로 내벽의 어느 부분을 밝히자, 그곳엔 자그맣게 새겨 넣은 글자가 있었다.
S&S
“스카이가 하나 만들어 버렸지.”
쿠르르르-.
멀쩡해 보이던 벽이 회전문처럼 돌아가는 모습에 엘레나는 놀라워했다.
두껍게 쌓인 먼지가 안개처럼 피어오르자 스테치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뒤 안으로 들어갔다.
더 깊숙한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한참 내려가니, 그곳에는 두터운 철문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스테치가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붙잡자 엘레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요.”
“그렇다면 우리가 제대로 찾아온 건가?”
스테치는 검을 뽑아 들었다. 여차할 경우엔 당장에 주문을 날려 공격할 준비를 단단히 한 뒤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철컹.
문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시선에, 스테치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어두울 줄 알았던 방의 내부는 생각보다 매우 밝았다.
한쪽 벽면은 상당한 규모의 화학 실험용 장비들로 꽉 들어차 있었고, 반대쪽에는 책장과 조명용 램프, 그리고 가운데에는 보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전용 테이블이 두세 개 정도 놓여 있었다.
방 안에는 15~20명 정도 되는 숫자의 성인 남성들이 각자 서로 다른 일을 하고 있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중 테이블에 앉아 수군거리던 세 남자는 문을 연 스테치 쪽을 바라보더니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런, X발! 렉페이스 새끼가 했던 말이 진짜였어?! 배신자 아텔리어잖아?”
“어…… 안녕?”
시간이 그렇게 오래 흘렀지만, 스테치는 사내들의 얼굴을 죄다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자, 방 안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도 벌떡 일어섰다.
“야! 저 새끼 조져!”
제대로 말을 걸어 볼 틈도 없이 문을 향해 우르르 몰려오는 사내들. 그러나 스테치는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방 안으로 먼저 몸을 날렸다.
빠악!
선두에서 달려오던 남자의 안면에 스테치의 무릎이 꽂히자, 그는 코피를 뿜으며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스테치가 손가락을 우드득거리자, 바라크를 찬 그의 오른손 주먹이 전기막으로 뒤덮였다.
“그래, X발! 이렇게 된 거 다 좆까고 덤벼!”
슬슬 몸이 풀린 스테치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자 사내들이 사방에서 일제히 덮쳤다. 그러나 스테치는 몸을 낮추고 황소처럼 돌진하여 포위망을 빠져나간 다음, 테이블을 하나를 집어 그들에게 던졌다.
“우왁!”
의자, 책, 플라스크 등등. 손에 잡히는 건 닥치는 대로 던져가며, 상대의 빈틈이 보일 때마다 주먹으로 턱을 쳐 기절시키는 스테치.
15명이나 되는 남정네들이 단 한 사람에게 쪽도 못 쓰고 차례대로 쓰러졌다.
“야, X신들아!!”
목청 좋은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지자, 패싸움을 벌이던 스테치는 주먹질을 멈췄다.
옆방에서 터덜터덜 걸어 나온 백금발의 남자가 장갑과 작업복을 벗어 던지며 짜증을 부렸다.
“일하고 있을 땐 소란 좀 피우지 말라고 내가 누차 강조했…….”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손에 들고 있던 망치를 툭 떨어뜨렸다. 스테치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그는 쓰고 있던 고글을 위로 재끼더니 잔뜩 쉰 목소리로 물었다.
“……스테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