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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설득 (76/203)


76화 설득
2021.12.16.


“진짜 너냐……?”

스카이가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묻자 스테치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턱 끝을 매만졌다.

렉페이스나 다른 녀석들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어…… 그러니까 그게…….”

“…….”

두 사람 다 서로 마주치게 되었을 때 무슨 말을 할지에 대해선 조금도 생각해 둔 것이 없었기에, 어느 쪽도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스테치에게 두들겨 맞아 끙끙대던 사내들 중 한 명이 스카이에게 소리쳤다.

“보스! 가만히 있지만 말고 어떻게 좀 해 보슈!”

“하라니, 뭘?”

스카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다른 사내가 맞장구치며 외쳤다.

“저 배신자 스테치 놈이 제 발로 찾아왔는데, 그냥 놔 줄 거요?”

“흐음…….”

사내의 외침에 스카이는 잠시 눈을 감고는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꼬기 시작했다.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건만, 특유의 버릇만큼은 여전히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하지만 그것을 본 스테치는 반가움보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스카이와 친구로 알고 지낸 시간이 짧지는 않았지만, 그의 종잡을 수 없는 생각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보는 스테치조차도 예측 불가능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눈을 뜬 스카이가 결정을 내린 듯 손바닥을 탁 하고 치며 말했다.

“좋아, 결정했다.”

뭘? 모두의 머릿속에 똑같은 질문이 떠오른 순간. 허리춤으로 향했다가 쭉 뻗은 스카이의 손에는, 거대한 화기가 들려 있었다.

쾅!

소리가 새어나갈 틈 없는 막힌 공간, 어마어마한 총성과 함께 총구에서 불꽃과 수많은 산탄이 뿜어져 나왔다.

『《크로스 윈드》!』

“큭!”

스테치는 스카이가 무언가를 겨누기 전부터 본능적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크로스 윈드》의 맞바람조차 미처 걸러내지 못한 산탄들은, 방탄효과가 탁월한 만티코어의 갑옷에 이르러서야 힘을 잃고 떨어졌다. 어지간한 주문으로 막아 낼 수 있는 위력이 아니다.

“뭐야? 분명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못 본 사이에 재미난 기술을 익혀 왔네, 스테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스카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총열을 꺾어 탄피를 뽑아냈다.

하지만 스테치도 지금 상황이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저 무기는 뭐지? 하지만 그는 스카이가 든 물건이 페네트레이터처럼 화약무기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오랜만에 봤는데,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이러기야?”

스테치가 묻자 스카이는 느긋하게 새 탄을 장전해 넣으며 답했다.

“뭐어,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기도 하고. 옛 추억이 생각나기도 하고…… 그랬는데, 한편으로는 좀 짜증도 나서 말이야. 그래서 일단 먼저 한 방 갈기고 이야기를 나누자고 생각했지.”

철컥!

스카이가 장전을 마친 총을 다시 겨눴다.

“자, 그러니까 이번엔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총알구멍 하나만 뚫어 준 다음엔 환영회든 뭐든 열어 줄 테니까.”

저딴 걸 제대로 맞으면 구멍은커녕 걸레짝이 되고 말 것이다. 스테치는 스카이가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또다시 몸을 날렸다.

쾅!

《크로스 윈드》에 궤도가 꺾인 산탄들이 벽에 부딪히며 불똥을 튀겼다.

“미친 XX야!”

스테치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달려들자, 스카이는 반대쪽 손으로 다른 화기를 꺼내 쏴댔다. 방 안이 아수라장이 되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스테치는 아주 잠깐이나마 어빌리티 시져를 사용하고픈 충동에 휩싸였지만, 곧 그만두었다. 재사용까지 3일이란 재충전 시간이 필요한 데다, 이런 곳에 써먹기엔 너무나도 귀중한 능력이었다.

“보스를 지켜!”

싸움이 본격적으로 커지자, 다른 이들이 헐레벌떡 일어나 가세하려 들었다. 그러나 사내들이 뭔가 해 보기도 전에, 엘레나가 먼저 비살상용의 촉으로 무른 화살을 쏴 그들 중 하나를 기절시켰다.

“가만히 있어!”

엘레나의 위협에 엉거주춤 일어난 사내들은 도로 주저앉았다. 스카이는 새로 꺼낸 총을 스테치에게로 겨누고 발사하며 놀라워했다.

“야, 저 여자는 또 누구야? 하는 짓이 화끈한데!”

“신경 꺼! 넌 이 와중에도 눈깔이 돌아가냐?”

함부로 고위력의 마법을 썼다간 아지트가 통째로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 스테치는 합장한 손바닥을 앞으로 펼쳐 지면으로 냉기를 흩뿌렸고, 부채꼴 형태로 퍼져 나간 얼음이 스카이의 발을 묶었다.

스카이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 천장으로 헛발을 쏘았고, 스테치는 공중으로 날아올라 그의 복부를 향해 드롭킥을 먹였다.

퍼억!

정통으로 맞은 스카이가 콜록거리며 뒤로 주저앉자, 스테치는 그가 양손에 들고 있던 화기들을 검과 발로 쳐 날려 버렸다.

강제로 무장마저 해제된 스카이의 턱 아래로 페네트레이터의 번뜩이는 날이 들이밀어 졌다.

“포기해라, 스카이! 주먹다짐이나 칼부림에서 네가 날 이긴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스테치의 위협에 스카이는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14년 전에 이미 반쯤 죽여 놓은 거로는 부족해서 오늘 끝장을 내러 온 게 아니었나? 기다리는 것도 지겨워 죽겠는데 빨리 끝장내지 그래?”

진심인지 아닌지 모를 소리에 스테치는 대꾸했다.

“그 반대야. 내가 널 만나러 온 이유는 14년 전에 못 다한 네 꿈과 목표를 완성시켜 줄 끝내주는 제의를 하러 온 거였지, 검에 쓸데없는 피를 묻히려는 게 아니었어. 그러니까 일단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 봐.”

그러자 스카이가 비아냥거렸다.

“왜, 폭탄 테러라도 다시 하시려고?”

“아니. 왕자를 죽인다.”

그 순간, 스테치는 방 안에 있던 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똘끼 충만한 스카이조차도 입을 다물었고, 스카이의 부하들은 모두가 미친놈이라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잠시 후, 스카이가 비로소 침묵을 깨고 중얼거렸다.

“둘 중 하나군. 내가 정신이 나가서 환청을 들었거나, 아니면 네가 드디어 미쳐 버렸거나. 진심이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한테서 미쳤다 소리를 듣는 것은 좀…….”

스테치는 검을 치우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스카이는 그것을 붙잡아 훌쩍 일어나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원스레 말했다.

“어디 이야기를 좀 들어 볼까.”

* * *

스카이 걸킨.

120만 크라운의 현상금이 걸린 사내의 과거는 제법 기구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남부 대도시 그리드록의 뒷골목에 위치한 빈민가로, 어머니인 라샤 걸킨은 빈민가 출신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인이었다.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쓰레기장에서도 꽃이 핀다’는 말이 그녀를 위한 말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하지만 가난 속에서도 늘 미소 짓던 그녀의 일상은 한 젊은 귀족에 의해 틀어지고야 말았다.

부족한 게 하나도 없는 삶, 그 안에서 권태감을 느끼며 일탈을 꿈꾸던 그 귀족은 유희를 즐길 생각으로 빈민가에 들렀고, 그곳에서 라샤를 발견했다.

그녀와 마주친 순간 그녀의 아름다움에 빠지게 됐지만, 문제는 평생을 고위 귀족으로만 살아온 그에게는 빈민가의 여인은 그저 놀이대상밖에는 못 된다는 것이었다.

라샤는 곧바로 그에게 겁탈당했고, 스카이는 그렇게 저주스러운 운명과 함께 태어나게 됐다.

하지만 라샤는 강인한 여인이었다.

비록 원치 않는, 강제적인 행위로 인해 태어난 스카이였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어머니로서 책임감을 다해 스카이를 양육했다.

덕분에 어린 시절의 스카이는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이 전혀 슬프지 않았다.

그에게는 너무나도 사랑하고, 또 자신을 사랑해 주는 어머니가 있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스카이는 10살이 됐다.

시작은 여느 때와 똑같았지만, 그날 오후, 밖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집에 돌아온 스카이가 발견한 것은 검은 복면을 한 사나이들과 그들 앞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어머니였다.

도망쳐.

어머니가 눈을 감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

그 말을 따라 스카이는 무작정 도망치기 시작했다.

괴한들이 스카이의 뒤를 쫓았지만, 빈민가의 지리에 능숙한 스카이는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기며 그들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충격과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잔뜩 겁에 질린 스카이는 도시를 벗어나 계속해서 도망쳤다.

자신이 빈민가를 빠져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당 구역의 사람들 전체가 몰살당했다는 이야기는, 그로부터 수 년 뒤에나 들을 수 있었다.

겁에 질려 도망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한 스카이였지만, 이후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이들에게 복수하겠다는 것은 스카이의 삶의 목적이 됐다. 그렇게 버든 베어의 빈민가에 자리를 잡은 스카이는, 뒷세계를 전전하는 과정에서 스테치를 만나게 됐다.

부모가 없는 고아 신세라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낀 스테치와 스카이는 곧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이후 두 사람은 오랜 시간 동안 함께 뒷세계에서 활동하며 자기들만의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독자적인 세력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던 그는, 어머니와 자신을 찾아왔던 자객들의 배후에 누가 있었는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마르커스 크로스포드 공작.

어머니를 겁탈한 개자식의 아버지이자, 스카이의 친할아버지였다.

자신의 피를 물려받은 사생아가 빈민가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그가, 아들의 치부를 지우기 위해 직접 움직인 것이다.

귀족의 알량한 자존심이 빈민가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불평등함. 그것을 깨달은 순간 스카이의 적은 자신의 아버지의 가문을 넘어서서 이 나라를 구성하는 부조리한 시스템 전체로 확산됐다.

그때부터 시작된 과격 행보는 멈출 줄을 몰랐고, 그러한 급진적인 변화가 지금까지 생각을 공유해 온 스카이와 스테치 사이의 거리를 벌려 놓았다.

이후, 크로스포드 공작의 버든베어 방문 일정을 입수한 스카이는 공작을 암살하기 위해 리스크가 큰 계획을 짰고, 이는 결국 스테치와 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공작 암살 사건이 실패했고, 그로 인해 스카이의 세력이 탄압을 받아 크게 위축됐다는 사실은 뒤늦게서야 스테치의 귀에도 전달됐다.

“셋째 왕자 제라드 메서…… 그 새끼가 모든 일의 발단이었어. 던전에 안내역으로 끌려갔다가 이용은 이용대로 당하고, 죽을 뻔 했다가 간신히 살아 나왔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1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스테치와 재회하게 된 스카이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넌 너무 굼뜨다니까. 장장 10년이 넘도록 허송세월을 보내고서야 비로소 내 입장을 이해하다니.”

스테치는 스카이와 엘레나를 제외한 다른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바깥으로 내보낸 뒤,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하지만 뭐든지 조심해서 나쁜 일은 없는 법.

그는 자신이 죽었다 살아난 이야기라던가, 메멘토 모템의 능력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쏙 빼놓았다.

당연히 엘레나가 엘프라는 사실은 입 밖에 꺼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때문에 이해관계가 일치해서 함께 활동하게 된 동료라고 대강 얼버무렸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도와줄 거냐?”

“음…….”

스카이는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고민하더니 물었다.

“뭐가 필요한데?”

“네 능력과 부하들 전부 다.”

스테치가 말하자 스카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스카이가 스테치에 비해 신체 능력이 뒤떨어지긴 했지만, 여러 분야에서 상당한 재능을 보였다.

도구나 소재에 마법적인 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인챈트먼트 능력, 타고난 손재주와 연금술 지식. 심지어 버든베어에서 그를 따르는 부하의 수도 상당했다.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라도 스카이의 조력은 거의 필수불가결했다.

“염치가 없는 건지 배짱이 두둑한 건지 모르겠군, 스테치. 백보 양보해서 내가 널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 치자. 대체 뭘 할 생각이지? 왕자에게 복수한다고는 했지만, 그런 기회는 하늘에서 그냥 뚝 하고 떨어지지 않아.”

엘레나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스카이에게는 충실한 부하와 동료가 많고, 개인의 능력까지 출중하다. 복수를 위한 동업자로서 이보다 적합한 인물은 가렛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

하지만 스테치가 스카이의 조력을 얻어 무엇을 할 생각인지는 엘레나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자 스테치는 스카이의 눈을 마주 보며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

“너와 나. 우리 둘이 힘을 합쳐 감비니 요새를 빼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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