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허기
(80/203)
80화 허기
(80/203)
80화 허기
2021.12.20.
퍼억!
검을 든 스테치의 몸이 달리는 말에 정면으로 충돌한 것처럼 붕 날아가 벽에 꽂혔다. 흙먼지가 잔뜩 일어나고 벽의 파편이 떨어져 내리자, 앙겔라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짜증 난다는 듯 중얼거렸다.
“별 같잖은 녀석이 나대기는…… 그리고 거기 여자!”
그가 말하는 여자란 엘레나를 말하는 것이었다.
“뭐 하는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베네지아의 병사를 상대로 검까지 들이대는 걸 보면 안 봐도 뻔하지. 너는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설명해 줘야겠다.”
그러나 정작 앙겔라의 말을 들은 엘레나의 표정은 겁에 질렸다기 보단 비웃음에 가까웠다.
그 차이를 앙겔라가 눈치챈 것은 먼지구름을 뚫고 튀어나온 스테치의 《에어 불렛》에 직격당할 때였다.
“크하악!”
콰앙!
망치에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 앙겔라는 본인이 상대를 날려 보냈을 때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날아가 반대쪽 벽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병사들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공격이 날아온 방향을 쳐다보자, 그곳에는 태연하게 몸에 묻은 흙을 털어 내는 젊은 남성의 모습이 있었다.
“젠장, 예비동작이 거의 없는 데다 공격도 보이질 않으니 원.”
스테치는 부러진 뼈나 찢어진 상처를 치유하며 걸어 나와 병사들 앞에 섰다.
자신의 지휘관이 어떤 능력을 가졌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던 그들은 스테치가 일격으로 죽지 않은 것도 모자라 반격까지 했다는 것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태였다.
『녀석이 다루는 힘은 바람이 아니라 염동력이군. 상대하기 까다롭겠는데.』
쿠르르륵-.
“으으윽…….”
돌 더미 속에서 기어 나온 앙겔라는 콜록거리다 못해 피를 토했다.
주문에 얻어맞기 직전 본능적으로 등 뒤에 염동력의 쿠션을 펼쳐 완충 작용을 노렸으나, 상대의 공격은 어설프게 받아넘길 수 없는 수준의 위력이었다.
‘방금 것은 무슨 주문이지?’
입안에 고인 피를 뱉어 내며 혼란스러워하는 앙겔라. 게다가 단 한 방으로 만신창이가 된 자신에 비해, 상대는 아무런 데미지도 없어 보인다.
‘아니, 그런 건 지금 신경 쓸 필요 없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상대도 내 공격을 간단히 피할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앙겔라는 다짜고짜 스테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무리 단단한 적이라도 수십 회에 달하는 연격을 쳐 먹고도 멀쩡할 리는 없을 터. 그렇게 판단한 앙겔라는 스테치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겠노라 마음먹었다.
“우옷?!”
스테치의 몸이 무형의 힘에 붙잡혀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순간 엘레나가 쏜 화살이 앙겔라의 머리로 날아왔고, 그는 다급히 몸을 틀어 그것을 피했다.
덕분에 스테치는 염동력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나이스샷!”
“이년이!”
엘레나가 성난 표정으로 달려오는 병사들에게 손을 뻗자, 손바닥 가운데에 마력을 중심으로 주변의 공기가 끌려왔다.
“《거스트 윈드》!”
병사들이 풍압에 밀려 비틀거리는 사이, 스피라투스의 주둥이로 주변에 널린 대량의 모래를 흡수한 엘레나는 새로운 화살을 형성해 발사했다.
슈와아악-.
병사들이 딛고 있는 지면으로 화살이 닿자마자,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자욱한 모래 안개가 퍼졌다.
오랜 시간 엘레나와 함께 해 온 스테치는 그녀가 하는 행동의 의미를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역시, 머리가 잘 돌아간다니까.’
이렇게 시야가 가려진 상태에서 앙겔라가 염동력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단순히 상대가 어디 있는지 모를 뿐만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그의 힘에 아군이 휘말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들과는 달리 엘레나와 스테치는 안개 너머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감각의 소유자들이었다.
스테치는 엘레나에게 엄지를 치켜세워 보인 뒤, 망설임 없이 자욱한 모래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애니멀 인스팅트》.’
흙냄새를 뚫고 병사들의 땀과 피에 절은 냄새가 코를 찌른다.
정확한 적의 위치를 파악한 스테치는 자기도 모르게 씨익 웃으며 병사들의 무리 한가운데로 몸을 밀어 넣었다.
“으윽…… 콜록.”
“빌어먹을 모래 같으…….”
퍼억!
먼지 구름 속에서 투덜대는 병사들의 목과 복부로 스테치의 검이 이빨을 들이밀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는 병사들. 스테치는 한 손으론 병사들을 베어 넘기며, 다른 한 손으로는 병사들에게 뒤로 빠지라고 외치는 앙겔라에게 아이스 웨이브를 날렸다.
이걸로 녀석은 제자리에서 움직이거나 피할 수 없다.
스테치는 어리숙해 보이는 병사 하나를 골라잡아 냅다 팔을 뒤로 꺾었다.
“아악!”
그는 저항하는 병사를 방패 삼아 전면에 내세우고선 앙겔라가 있는 쪽으로 밀어붙였다.
병사의 뒤에서 반지를 낀 왼손만 빼꼼 내밀은 스테치는 주문을 발동시켰다.
『커스드 클록 전개!』
‘《에어 버스트》!’
얼음을 깨고 탈출하려던 앙겔라는, 《에어 버스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기류가 공중에 그득한 모래 먼지를 좌우로 걷어내며 접근해 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처음 것에 비하면 속도는 느리지만, 위력은 더 강력한 무언가. 저걸 정통으로 맞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젠장……!’
피하기엔 너무 늦었다. 아랫입술을 깨물은 그는 하는 수 없이 온 힘을 쥐어짜 염동력의 방패를 수십 개 겹쳐 형성했다.
콰과과곽!
《에어 버스트》는 커스드 클록의 영향으로 아티팩트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었던 앙겔라의 빈약한 방어막을 모조리 파괴했고, 더 나아가 기어이 그를 풍압으로 날려 버렸다.
“이 새끼가아아!”
앙겔라는 날아가던 자신의 몸을 염동력으로 붙잡았다. 그러나 바닥으로 착지하고 자세를 다잡은 그가 본 것은, 병사의 뒤에 바짝 붙은 채로 달려오는 스테치의 모습이었다.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상대를 염동력으로 붙잡을 수는 없는 데다, 공격하려 들었다간 병사까지 휘말리고 만다.
“으아악!”
지휘관으로서 필요하다면 병사들의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앙겔라였으나, 병사의 애처로운 목소리를 듣자 자기도 모르게 일순 주저하고 말았다.
그가 돌진을 피해 옆으로 몸을 날리자, 미리 손에 검을 뽑아 쥐고 있던 스테치는 그의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다.
“이거 놔! 놓으라고!”
버둥거리다 결국 스테치로부터 풀려난 병사. 기회를 놓치지 않은 앙겔라의 염동력 펀치가 기어이 스테치를 강타했다.
“직접 전투는 무조건 피해라! 붙잡히면 이용당할 뿐이다!”
쉽게 말해 괜히 거치적거리지 않게 비키라는 뜻.
한창 엘레나의 화살에 고전을 면치 못하던 병사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두꺼운 타워 실드 뒤로 몸을 바짝 낮추고선 뒤로 물러섰다.
“하아아아!”
엘레나가 방패를 꿰뚫기 위해 화살의 재질과 줄의 장력을 재조정하는 사이, 멀찍이에서 엘레나를 염동력으로 붙잡은 앙겔라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바닥으로 내리찍었다.
지면이 움푹 파일 정도의 충격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 낸 그녀는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의 고통과 함께 피를 토했다.
“크허억……!”
“이 새끼!”
멀쩡한 몸으로 되돌아온 스테치가 검을 휘두르자, 앙겔라는 희번덕거리는 눈을 그에게 향했다.
염동력을 사용해 옴짝달싹 못하도록 스테치를 붙잡아 올린 앙겔라는 엘레나에게 했듯이 스테치를 찍어 누르려 들었다. 그러나 지면에 닿기 직전, 메멘토 모템이 외쳤다.
『커스 디바우러!』
착용하고 있던 팔찌 하나가 빛으로 변해 스테치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신체 능력에 상당한 부스트가 걸린 그는 상체를 크게 비틀어 앙겔라의 구속을 너무나도 간단히 풀어헤친 다음,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의 스피드로 달려들었다.
“흐읍!”
스테치가 뻗은 주먹과 앙겔라가 발사한 염동력의 벽이 충돌하자, 거대한 충격파가 일어나 방안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앙겔라와 스테치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서로를 노려보며 재차 주먹과 염동력을 맞부딪쳤다.
“죽어라아아!”
“뒈져어어엇!”
이윽고 벌어진 난타전.
정면에서 쏟아지는 공격이 너무나도 위협적이라, 그것을 맞받아치던 앙겔라의 공격 궤도는 자연히 한 방향으로 고정되었다.
괜히 스테치의 뒤나 옆을 노리거나 붙잡아보겠다고 한눈을 팔았다간 도리어 그가 당할 판이었다.
『힘으로는 이쪽이 더 강하다! 멈추지 말고 계속 밀어붙여!』
얼마 지나지 않아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던 두 사람의 밸런스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스테치가 앙겔라 쪽으로 거리를 좁혀가며 우세함을 과시하고 있는 반면, 앙겔라는 상체까지 뒤로 젖히면서 밀리고 있었다.
“이, 괴물 같은 자식!”
싸움을 지켜보던 병사 하나가 등에 둘러맨 석궁을 풀더니 볼트를 장전해 스테치를 겨눴고, 때마침 비틀거리며 일어난 엘레나가 그 모습에 두 눈을 부릅떴다.
“그렇다면 이쪽도…….”
병사의 조준에 맞춰 활시위를 당기는 엘레나.
잠시간 서로를 향해 시선을 교환하며 주저하던 그들은, 동시에 자신이 겨눈 목표물을 향하여 각자의 무기를 쏴 날렸다.
퓩!
흠잡을 것 없는 완벽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과 볼트가 허공에서 교차했다.
『《크로스 윈드》!』
그러나 스테치에게 날아간 볼트는 강력한 역풍을 맞고 방향이 꺾인 반면, 엘레나가 쏜 화살은 그대로 앙겔라의 어깨로 빨려들어가듯 꽂히고 말았다.
난데없는 격통에 앙겔라는 몸을 움츠렸다.
“!”
뻐어억!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주먹을 꽂아 넣기엔 충분한 빈틈이었다.
스테치의 주먹에 직격당한 앙겔라는 대포처럼 날아갔다. 바닥이나 모퉁이에 부딪힐 때마다, 그의 사지는 줄 끊어진 인형 마냥 이상한 각도로 꺾여 덜렁거렸다.
콰광!
벽에 부딪히고 나서야 멈춘 앙겔라.
무너져 내린 돌무더기에 깔린 그의 몸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만한 일격을 맞고도 살아남을 사람이 몇이나 있겠냐마는.
“앗…… 아아…….”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처참한 꼴이 되어 패배한 상관의 모습에 병사들은 경악했다.
감비니 요새의 지휘관이 별안간 들이닥친 괴한에게 이토록 끔찍하게 살해당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스테치는 주먹을 뻗은 자세 그대로 한참을 서 있다가, 깊고 무거운 한숨을 내뱉고선 넋을 잃은 병사들에게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그렇지 않으면…….”
“흐아아아악!”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병사들 사이에서 들려왔고, 모두의 시선이 한자리에 집중되었다.
바닥의 갈라진 틈새에서 튀어나온 뼈의 손. 벽과 천장을 뚫고 ‘흘러나온’ 살점과 피가, 병사의 발목을 붙들은 그 앙상한 뼈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이게 뭐야!”
기괴한 현상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병사가 울상을 지으며 소리 질렀다.
스테치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조차 어쩔 줄 몰라 하던 바로 그때, 살점과 피가 엉겨 붙은 그 손이 지면을 뚫고 솟아올랐다.
콰과광!
사방으로 튀는 바위 파편과 모래 알갱이들. 한 쪽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스테치가 슬며시 눈을 뜨자, 쓰러진 병사들의 한가운데에는 꿈틀대는 살점들과 피로 얽힌 거인이 밑바닥으로부터 기어오르고 있었다.
시체 썩는 악취, 그리고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절로 나오는 끔찍한 외관.
“……산 넘어 또 산이네.”
식은땀을 훔쳐낸 스테치는 자기도 모르게 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