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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플레쉬 골렘 (81/203)


81화 플레쉬 골렘
2021.12.21.


“주, 죽는다!”

“으아아악!”

구멍으로부터 기어 올라온 괴물이 손으로 바닥을 짚자, 팔과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 살덩이들이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병사들을 그대로 뒤덮었다.

저항 한 번 못하고 괴물의 신체로 녹아 들어가는 병사들의 잇따른 비명소리에, 스테치는 기겁하여 뒤로 주춤거렸다.

“……이건 또 뭐 하는 놈이야?”

가느다란 체조직들로 간신히 연결된 신체 덩어리들.

파편과 파편이 맞닿은 균열에서 질질 새어나오는 피고름.

본 골렘보다도 더 거대한 크기의 몬스터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스테치. 아무래도 저 녀석이 이 던전의 키퍼인 모양이다. 생긴 건 저래 봬도 골렘이야.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플레시(Flesh) 골렘 정도겠지.』

‘키퍼가 지금 대공동에서 여기까지 제 발로 왔단 말야?’

일반적인 키퍼는 던전의 대공동에서 대기하며 희생자를 기다린다. 깜짝 놀란 스테치에게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말했잖아? 이 던전은 너무 오랫동안 굶주렸어. 요새의 인간들이 감질 맛나게 던전의 입구 근처에서만 노닥거리니까, 키퍼가 직접 먹이를 붙잡으러 행차하신 거지.』

“그워어어억-.”

입인지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는 구멍에서 이상한 소리를 흘려대던 플레시 골렘은, 철퍽거리며 스테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엘레나조차 그것을 보고 평정을 유지하긴 힘들었는지,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놈이 오고 있습니다!”

스테치는 다가오는 플레시 골렘을 저지하기 위해 손을 뻗어 주문을 사용했다.

“《파이어볼》!”

퍼엉!

날아간 불덩이가 플레시 골렘의 턱을 강타했다. 화염이 골렘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지방과 기름에 옮겨 붙으며 더욱 거세게 타올랐으나, 놈의 덩치를 고려해 보면 새 발의 피나 다름없었다.

스테치와 엘레나가 양옆으로 몸을 날리자마자, 플레시 골렘의 손바닥이 그들이 있던 자리를 후려쳤다. 골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한 스테치에게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저걸 봐.』

천장과 벽면에 난 미세한 틈새로부터 흘러나온 썩은 피와 육편이, 살아 있는 생물마냥 바닥을 기어 플레시 골렘의 몸뚱이로 달라붙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들은 스테치가 태워 버린 부위를 덮거나 떼어 내서 재생시키고 있었다.

‘뭐야, 저건?’

『오랜 시간 동안 던전에 축적된 희생자들의 피와 살들을 끌어모으고 있는 거야. 보다시피 녀석에게 어중간한 데미지는 의미가 없어. 가능하면 일격에 골렘의 핵을 파괴해야 해.』

“엘레나, 녀석의 몸 안에 있는 핵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겠어?”

골렘의 핵은 마력 덩어리 그 자체. 마력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엘레나라면 핵의 위치도 알아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돌아온 대답은 ‘아니오’였다.

“몸에 두른 사기가 너무 짙어요. 그리고 보다시피 제 화살도…….”

엘레나가 다가오는 플레시 골렘으로부터 천천히 물러서며 화살을 쏴 날려 보았지만, 놈의 진흙 같은 피부를 상대로는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잘 먹혀드는 것 같아 보이진 않네요.”

스테치는 엘레나를 따라 플레시 골렘과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다른 주문을 시험해 보았다.

“《에어 불렛》!”

퍼석!

압축된 공기탄이 끈적한 골렘의 살덩이에 닿는 순간, 착탄 부위로부터 터져 나간 피와 육편이 온 사방으로 튀었다.

《에어 불렛》의 탄환이 멋들어지게 뚫고 지나가며 남긴 구멍에서는 진한 독성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흡입하기에 좋아 보이는 가스는 아니군.』

“《테슬라》!”

스테치가 배치한 에너지 응집체는 사정거리에 들어온 플레시 골렘에게 수차례의 전격을 퍼부어댔다.

경련을 일으키며 멈춰선 플레시 골렘을 향해 스테치는 다시 한번 더 《파이어볼》을 날렸다.

퍼엉!

상처에서 나온 유독 가스에 불이 붙더니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갑작스런 충격에 골렘이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자, 스테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에어 불렛》과 《파이어볼》을 번갈아 발사했다. 그러나 가스로 인한 폭발에 의해 제대로 된 데미지를 입었던 것은 처음 한 번뿐, 플레시 골렘의 재생력은 스테치가 공격하는 속도보다도 더 빨라지고 있었다.

아니, 사실 너무 빨랐다.

‘어이, 뭔가 이상하지 않아? 어째-.’

스테치는 점액질의 무언가가 만티코어 가죽 갑옷 위로 떨어지자 무심코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천장과 벽은 피와 고름에 얼룩진 육벽에 뒤덮여 있었고, 그들이 딛고 있는 바닥으로도 퍼지고 있었다.

“윽!”

병사들이 플레시 골렘에게 흡수되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했던 스테치는 식은땀을 흘렸다.

저것에 닿으면 결코 좋은 꼴을 보진 못하리라.

“《아이스 웨이브》!”

스테치가 바닥으로 냉기를 흩뿌리자, 빠른 속도로 확산되던 썩은 생체조직들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연기처럼 지면을 미끄러져 나아간 냉기는 단순히 바닥을 얼리는 데에 그치지 않고, 플레시 골렘의 다리를 휘감아 거대한 얼음 결정을 피워 올렸다.

스테치와 엘레나에게로 걸어오던 도중, 갑작스럽게 걸린 제동에 중심을 잃은 플레시 골렘의 몸은 뒤로 기우뚱 하고 넘어갔다.

꽁꽁 언 다리로 바닥을 딛자 녀석의 발뒤꿈치에 해당하는 부분이 박살 나자, 스테치의 뇌리를 스치고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스테치는 검에 특제탄을 장전해 넣으며 엘레나에게 외쳤다.

“엘레나, 이쪽으로 강하게 한 방 쏴 버려!”

스테치의 말뜻을 이해한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뒤 활시위를 당겼다.

장력과 위력을 최대로 세팅한 뒤 얼어붙은 골렘의 하체를 조준한 엘레나는 한계까지 당겨두었던 시위를 놓았다.

피윳!

공기를 찢어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아간 엘레나의 화살은, 플레시 골렘의 하체를 너무나도 간단히 깨부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리 한 짝을 잃은 플레시 골렘이 마침내 쓰러졌고, 스테치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좋았어!’

아쉽게도 파괴된 골렘의 파편 어디에도 핵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스테치가 다시 한번 《아이스 웨이브》로 남은 신체를 얼려 버리려는 순간, 플레시 골렘은 처음으로 귀가 떨어질 정도의 괴성을 내질렀다.

“우워어어어억!”

방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고도 모자라, 지축을 뒤흔들 정도의 소리. 그러더니 녀석은 상반신만 남은 몸을 비틀어 주먹으로 지면을 연신 내리쳤다.

쾅! 쾅!

플레시 골렘의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동에 당황한 스테치와 엘레나는 막 하려던 공격을 멈추고 말았다.

최후의 발악인가?

쩌적!

지면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균열.

그제야 무언가를 떠올린 스테치는 골렘이 기어오르는 과정에서 뚫어 놓았던 구멍으로 시선을 돌렸다.

플레시 골렘이 피운 난동에 의해, 그들이 있던 방은 구멍을 중심으로 바닥 전체가 무너져 내리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설마?’

구멍 밑으로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만 있을 뿐.

스테치와 엘레나가 본능적으로 지면을 박차고 뛰어오르자마자, 그들이 딛고 있던 마지막 바닥마저 완전히 꺼져 버렸다.

엘레나는 스피라투스의 용 주둥이로 벽의 모난 부분을 붙잡아 매달렸고, 스테치는 페네트레이터를 역수로 쥐어 벽에 박아 넣었다.

땅이 꺼지는 과정에서 떨어졌는지, 플레시 골렘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지하로 떨어진 건가? 엘레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바늘땀을 훔쳐 냈다.

“하,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

휘리릭!

엘레나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썩은 근섬유와 살코기로 연결된 기다란 촉수가 스테치의 다리를 붙들었다.

촉수로부터 흘러나온 독은 스테치의 옷과 피부를 뚫고 침투하여 몸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

“끄아아아악!”

“아텔리어 씨?!”

아래를 내려다본 엘레나의 눈에, 깊숙한 곳에서부터 팔을 길게 늘린 플레시 골렘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스테치는 독으로 잠식되어 가는 다리를 흔들어 보았지만, 그가 저항하는 만큼 상대도 더 세게 당겨댈 뿐이었다.

“우오오–“

스테치는 검을 손에서 놓고 말았다.

페네트레이터와 함께 깊숙한 곳으로 떨어지는 스테치. 엘레나가 남는 손을 그에게 뻗어 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빠르게 멀어지는 엘레나를 쳐다보던 스테치는, 몸을 돌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플레시 골렘을 노려보았다. 필시 저 아래는 키퍼가 원래 있던 장소인 대공동일 터.

스테치는 함께 떨어지던 검을 가까스로 잡은 뒤, 자신의 다리를 아직도 붙들고 있는 촉수를 베어 냈다.

“《에어 불렛》!”

지면을 향해 《에어 불렛》을 발사하기 시작한 스테치. 한 발 한 발이 플레시 골렘의 머리나 몸에 꽂힐 때마다, 스테치는 발사 반동으로 낙하 속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멍청한 새끼!’

스테치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플레시 골렘이 대공동으로 그를 끌어들인 것은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테치는 그 특성상 혼자일 때 더 자유롭게 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엘레나도 저 위에 있겠다, 더 이상 봐줄 필요는 없겠지!”

잇따라 날아온 공기탄에 두들겨 맞은 플레시 골렘의 몸은 곤죽이 되어 있었고, 주변에는 체내에서 나온 독성가스가 가득 깔려 있었다.

스테치의 왼손 손아귀로 거대한 화구가 생성되었다.

“《파이어볼》!”

『《크로스 윈드》!』

콰아아앙!

가스 대폭발의 여파가 지하의 플레시 골렘을 집어삼키고 위에서 내려오던 스테치까지 휩쓸었다.

빠져나갈 곳을 찾지 못한 폭염은 엘레나가 매달려 있던 상층부 바로 밑까지 올라올 정도로 치솟아 올랐다.

불길이 사라지고 연기가 옅어질 때 즈음, 폭발의 충격을 감쇄시키고 착지한 스테치가 양팔을 휘휘 저으며 플레시 골렘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가 찾은 것은 뼈들로 단단히 뭉쳐진 덩어리 하나.

그것이 골렘의 핵을 보호하던 마지막 껍질임을 눈치챈 스테치는,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촤악!

불꽃이 사그라들자 다시 던전의 이곳저곳에서 쏟아지는 피와 살덩이들. 스테치는 사방에서 채찍처럼 휘두르는 촉수를 피하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작작 좀 해, 빌어먹을 새끼야!”

스테치는 왼손에 《아이스 웨이브》의 냉기를, 오른손에 《에어 버스트》의 공기구체를 띄우고선 하나로 합쳤다.

《콤비네이션 스킬 : 블리자드.
설원의 냉기를 품은 바람을 풀어놓습니다. 광역으로 상태이상 ‘동결’효과를 가합니다.》

앞선 폭발로 뜨겁게 달궈진 공기가 눈 깜짝할 사이에 차가운 냉기로 역전되었다.

휘몰아치는 삭풍과 눈보라를 그대로 뒤집어 쓴 촉수들은 스테치에게 닿기도 전에 얼어 버렸고, 스테치는 그대로 달려 나가 플레시 골렘의 핵을 감싼 껍질 위에 검극을 겨누고선 방아쇠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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