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양자대면
(82/203)
82화 양자대면
(82/203)
82화 양자대면
2021.12.22.
“끝났구만.”
지하의 던전에서 들려오는 진동과 폭발음, 그리고 이어지는 지진.
부하들에게 한창 이것저것 작업을 지시하고 있던 스카이가 요새의 땅이 울리자마자 툭 내뱉은 말에, 그의 부하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탈출 스크롤의 환한 빛 무리와 함께 스테치와 엘레나가 차례대로 요새 한가운데에 나타났다.
엘레나는 그나마 비교적 멀쩡했지만, 스테치는 도무지 그냥 봐주고 넘길 수 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시체 썩는 냄새와 피비린내에 주변에 서 있던 스카이의 부하들은 코를 비틀어 쥐고 야유를 내뱉었다.
“솔직히 반신반의하긴 했는데, 정말 강해지긴 했구나? 던전 키퍼를 혼자만의 힘으로 쓰러뜨리다니, 그런 건 용병들의 허풍 속에서나 가능한 일인 줄 알았는데.”
스테치는 성벽 위의 스카이가 던져 준 수통을 받아들었다.
“이 정도도 해낼 수 없다면 애초에 왕자를 조진다는 미친 짓거리는 시작도 안 했어. 그나저나 넌 지금까지 여기서 뭐 했냐?”
스카이는 요새의 입구를 가리켰다. 입구 위쪽의 아치형 구조물 아래, 얼핏 봐선 눈치챌 수 없는 교묘한 공간 틈새로 나무 배럴이 매달려 있었다.
시원하게 물을 들이켠 스테치가 물었다.
“……화약?”
“귀하신 왕족의 격식에 걸맞은 최고급 환영인사용 폭탄이지. 말은 똑바로 하라고.”
“그거 이외에는?”
“네가 만나고 싶어 하는 ‘그 새끼’한테는 편지를 보내 놨어.”
스카이는 요새 지휘관의 개인방에서 발견한 인장 반지를 스테치에게 흔들어 보였다.
요새의 지휘관 신분을 증명하는 인장 반지, 그리고 요새전용 통신 수단인 전서구.
제라드를 유인하는 데에는 안성맞춤일 것이다.
“그리고 또 뭘 했더라…… 심문한 병사들은 전부 뒤처리까지 끝내 두었고, 갑옷이랑 무기는 전부 회수해서 부하들한테 나눠줬지. 요 앞에는 폭약도 좀 묻었고…… 이 정도인가?”
스카이는 성벽 위에서 내려오며 물었다.
“내 얘기는 이만하면 됐어. 그래서 언제까지 숨기고 있을 생각인데?”
“뭘?”
“아티팩트 말야, 아티팩트. 설마 그냥 구경 한 번 안 시켜주고 그냥 넘어가려고 했던 건 아니겠지?”
그 말에 스테치는 한숨을 내쉬며 품 안에 넣어두고 있던 것을 슬쩍 꺼냈다.
가죽인지 금속인지 알 수 없는 여러 복합적인 재질로 결합 되어 만들어진, 흑묵빛의 완갑 한 페어.
디자인만 보고 판단하자면 그럭저럭 괜찮게 생긴 팔 보호대에 불과했겠지만, 아티팩트라는 사실 하나가 그 완갑을 특별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멋지네.”
스카이는 짤막한 감상평을 남겼다. 무슨 기능인지는 딱히 궁금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들어가서 좀 쉬지 그래?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게.”
스테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엘레나와 함께 요새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스카이의 부하들이 요새 안의 쓸모없는 물건들을 꺼내 놓고 엄폐물처럼 쌓아 둔 것이 눈에 띄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방 두 개를 비워 뒀습니다.”
부하가 엘레나와 스테치를 방으로 안내했다.
스카이의 배려였는지는 몰라도, 평소 병사들의 땀과 냄새에 찌들었을 침대 시트나 기타 생활 용품들은 전부 새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아직 잠들기엔 이른 시각이었지만, 한바탕 일전을 벌인 직후라 그런지 두 사람 모두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스테치는 방 안으로 들어가려던 엘레나를 붙잡으려다, 곧 생각을 고쳐먹었는지 그냥 손만 흔들어주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 끝에 걸터앉은 스테치는 고통스런 신음을 흘렸다.
“쓰읍.”
스테치가 흠칫거리는 손으로 검게 물든 왼쪽 바짓부리를 접어 올리자, 정강이에서 허벅지까지 보랏빛으로 변색 된 피부가 드러났다.
스테치는 아려오는 다리를 살살 주물럭거리며 말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 봐.”
『단순해. 《리커버리》 마법은 상처를 회복시켜 줄 뿐이지 해독 작용은 없거든. 안타깝지만 지금의 나로선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
진작에 해독 물약을 사용해 보았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아마도 던전 키퍼의 독은 침투력이나 지속성이 일반독에 비해 뛰어난 모양이었다.
이제 곧 중요한 싸움이 있는데 하필 몸 상태가 이래서야…… 스테치는 이를 악물었다.
“언제쯤 낫게 될까?”
『이건 그냥 독이 아니야. 가벼운 저주와 시독이 섞인 복합물에 가깝지. 다행히 저주의 주체가 되는 키퍼는 이미 죽었으니까, 가만히 놔두면 독은 알아서 사라질 거야.』
잠시 뜸을 들이던 메멘토 모템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가장 큰 문제는 제라드와 네가 맞붙게 되는 그때, 네가 얼마만큼 회복된 상태로 싸움에 임하게 될지 모른다는 거지.』
“후우……”
스테치는 침대 위에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복수만을 노리고 달려온 지 고작 몇 개월.
준비가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혹여 자신이 제라드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 못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작 결행일이 코앞까지 다가오니 스테치의 가슴은 긴장감으로 두근거렸다.
『내가 있는 한 너는 절대 죽지 않아. 그걸 명심해.』
* * *
모래알 섞인 바람이 제라드의 얼굴을 한 차례 훑고 지나갔다. 햇빛은 뜨겁고, 길에는 아지랑이가 한 가득이다.
절대 행군하기에 좋은 일기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제라드와 병사들은 보기만 해도 숨 막히는 무거운 갑주를 걸친 채 어디론가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부관, 말해 보게.”
앞만 보고 말을 몰던 제라드가 갑자기 입을 열자, 그의 뒤를 따라오던 부관은 바짝 굳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발스톡의 대리로 붙게 된 이 젊은이는 일국의 왕자이자 북부 전선의 영웅과 말을 섞는 게 내심 부담되었는지, 그를 볼 때마다 긴장하는 버릇이 있었다.
“예, 예?”
제라드는 안장에 걸쳐진 배낭 안에 손을 쑥 집어넣더니, 곧 종이 하나를 꺼내 부관의 면전에서 팔랑거렸다.
“이 서신에는 감비니 요새가 큰 문제가 봉착해 있다고 적혀 있더군. 그래서 문득 든 생각인데…… 만약 우리가 뒷수습에 한발 늦었다고 가정한다면, 그로 인해 파생되는 피해 규모는 얼마나 될 거라고 예상되나?”
사흘 전, 감비니 요새로부터 전서구를 통해 보내져 온 의문의 편지 한 장.
보급 문제를 포함한 온갖 불만 사항이 빼곡하게 적힌 서신이었는데, 그 말미에는 제라드의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었다.
던전에 발을 들인 토벌대가 전부 몰살당했다는 충격적인 내용. 병력의 40% 이상을 잃자, 전례 없는 위기상황을 맞이했다고 판단한 요새가 제라드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한 것이었다.
사실상 모든 북부 전선의 방위 라인을 안전하게 유지시키는 것이 제라드의 임무였기 때문에, 그는 편지를 받자마자 다수의 병력과 함께 감비니 요새로 향하고 있었다.
제라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부관은 암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감비니 요새는 북부 전선의 일부로서 외침을 방어하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부의 던전까지 억제해야 되는 특이한 지리적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때문에 요새가 뚫린다면, 아마도 북부 전선에 생길 수 있는 가장 큰 구멍이 될 것입니다.”
제라드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부관은 자기도 모르게 술술 말을 이어 나갔다.
“……때문에 요새가 단 며칠만 무력화되더라도 수많은 몬스터들이 베네지아의 영토 안으로 유입될 겁니다. 감비니 요새는 베네지아의 수도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으니, 최악의 경우엔 몬스터가 수도까지 당도하는 일도 벌어질 수 있겠죠. 물론 수도에 주둔 중인 병사들이라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겠지만요.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북부 전선이 돌파당했다는 사실이 다른 남부 연합국들의 시빗거리가 될 거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왕가는 연합국이 보내온 전쟁 지원금을…….”
거기까지 말한 부관은 스스로의 발언에 당황하여 입을 손으로 덮었다. 내용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베네지아의 왕자 앞에서 왕가를 욕보이는 발언을 하다니.
중죄로 몰려도 할 말이 없었다.
“과연, 자네 생각도 그런가.”
“죄, 죄송합니다!”
제라드는 짜증 섞인 기색을 내비쳤다.
자국 병사들조차 뻔히 눈치챌 만한 부정을 왕가에서 버젓이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이 영 거슬리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부관의 생각대로 요새가 몬스터들에 의해 돌파당한다면 국제적인 문제가 불거질 것이고, 그 책임은 고스란히 자신이 짊어지게 될 게 뻔했다. 왕위 계승의 목표로부터 크게 멀어지는 것이다.
“괜찮아. 이런 걸 가지고 누굴 질책하려는 생각은 없었으니.”
“…….”
부관은 더 이상 어떤 말도 함부로 내뱉고 싶지 않아 보였기에, 제라드도 입을 다물었다.
한참 동안 말을 몰던 그들은, 아지랑이 사이로 자그맣게 보이는 요새를 발견했다.
제라드는 안장주머니에서 스파이 글래스를 꺼내 요새 근방을 살폈지만, 편지에서 묘사한 것과는 달리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우리가 제 때에 온 건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요새로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제라드와 그의 부대.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성벽로 위에 서 있던 병사 하나가 먼저 그들을 발견하곤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오셨습니까, 왕자님!”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양호한 반응이었기에 제라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큰 소리로 물었다.
“편지를 받고 지원하러 왔다. 요새 지휘관은 지금 어디 있지?”
“던전에서 몬스터들을 막고 계십니다! 하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쿠르르릉-.
병사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요새의 입구를 막고 있던 강철문이 위로 올라갔다.
제라드는 병사들을 독려하며 요새를 향해 손짓했다.
“어서 들어가자!”
제라드가 감비니 요새에 발을 들여 놓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안뜰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지하 던전의 입구였다.
입구 위에는 토벌대 이외의 출입을 방지하기 위해 쇠창살로 된 바닥문이 덧대어져 있었다.
“세상에, 정말 아슬아슬했습니다! 하루만 더 늦었어도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멀찍이에서 다가오던 병사는 그렇게 외치며 손을 내밀었다.
뭐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동작에 제라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병사는 기분 나쁜 미소와 함께 손가락을 튕겼다.
《액티브 스킬 : 이그니션.
일정 범위 내의 타겟에게 자그마한 불꽃을 점화시킵니다.》
파지직-.
검지와 엄지로부터 튄 붉은 스파크가 성문의 위쪽으로 날아갔다.
무심코 그것의 궤적을 쫓던 제라드의 시선이 닿은 것은, 내용물을 짐작할 수 없는 배럴이었다.
“?”
그리고 섬광.
* * *
눈이 멀어 버릴 정도의 폭염과 후폭풍이 일며, 말을 탄 제라드와 병사들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어?’
세상이 돌고 있다.
무중력을 체감한 제라드가 제정신을 차릴 무렵, 이미 지면과 충돌한 그의 몸뚱이는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윽……!”
손가락 끝부터 팔다리 하나하나의 상태를 전부 확인해 보는 제라드. 다행히도 부러진 곳은 없다.
앞에 무엇이 있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낀 먼지구름에 잠시 콜록거린 그는, 손으로 주변을 더듬으며 요새의 입구로 걸어갔다.
폭발의 여파에 휘말려 신음하는 병사들과 이미 죽어서 꿈쩍도 안 하는 시체들.
그 너머에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요새의 문이 있었다.
끌고 온 병사들의 대부분이 아직 바깥에 있는데, 이래서야 요새를 출입하는 건 불가능하다.
“걸작이구만!”
넋 나간 표정으로 요새의 문을 응시하던 제라드의 어깨너머에서, 누군가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병사가 투구를 벗자 먼지 속에서도 반짝이는 백금발이 보였다.
“폭발도 폭발이지만, 그 표정이야말로 내가 여기에 온 보람이 있네.”
“……넌 누구냐?”
누가 봐도 베네지아의 병사는 아니다. 제라드가 골드메라의 폼멜을 만지작거리자, 병사는 우아한 폼으로 인사하며 뒤로 물러섰다.
“미안하지만, 당신한테 용건이 있는 사람은 저기에 있거든.”
저벅-. 저벅-.
조용한 발걸음 소리가 폭발음으로 찡 울리는 귀에 들어왔다.
또 하나의 남자가 제라드와 병사에게로 다가오더니, 거친 손놀림으로 얼굴을 덮고 있던 후드를 벗어 재꼈다.
“오랜만이다.”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게 다가왔다.
밀려오는 온갖 감정의 격류를 넘어 분노에 치달은 제라드. 목 위에 시뻘건 핏줄이 두드러질 정도로 흥분한 그는 눈앞에 선 상대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스테에에에에에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