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동방에서 온 사나이
(84/203)
84화 동방에서 온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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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동방에서 온 사나이
2021.12.24.
“으헉!”
혼란을 틈타 성벽 등반을 감행하던 병사 하나가 화살을 맞고 땅에 떨어졌다.
병사들의 공세는 대단했다. 마법사들은 교대로 《파이어볼》과 《쇼크 볼트》 등의 마법을 난사해대며 쉴 틈 없이 마법을 퍼부었고, 병사들도 화살을 쏘며 그에 가세했다.
하지만 철옹성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감비니 요새의 성벽은 어지간한 마법엔 끄떡도 하지 않았고, 덕분에 스카이 일행과 엘레나는 눈에 띄는 피해 하나 없이 성공적으로 적의 침입을 막아 내고 있었다.
‘뭐, 어차피 우리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동안은 절대 요새에 못 들어오겠지만.’
스카이가 병사한테 화살을 명중시킨 부하에게 +10 점을 선언해 주며 씨익 웃었다. 그러는 사이 스테치는 본인이 공언한 대로 제라드를 아주 작살을 내고 있었다.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장면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적으로 봤을 땐 선전하고 있는 편이었다. 특히 제라드가 스테치에게 얻어맞아 저 위로 날아올랐을 땐 모두가 감탄했다.
‘정말이지, 아무 트러블 없이 이토록 계획이 술술 풀리는 것도 오래간만이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도주 경로 확보도 진작 끝마쳤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그는 원래 완벽한 계획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일이 너무 스무스하게 진행되면 오히려 좀이 쑤셨다.
스카이가 검지 손가락으로 성벽을 탁탁 두들기며 내려다보자, 마력이 바닥나 헥헥거리는 마법사 한 명의 미간 한가운데에 화살이 꽂히는 장면이 보였다. 무심코 시선을 다시 위로 올린 그는 그리 멀지 않은 계곡 능선 쪽에 전에 없던 무언가가 나타난 것을 포착할 수 있었다.
“……뭐여, X발?”
스카이는 부하에게 손을 까딱까딱 흔들어 스파이 글래스를 건네받은 뒤 렌즈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깃발을 들지 않아 정확한 소속이나 부대 명칭은 특정 불가능이었지만, 갑옷만큼은 틀림없는 베네지아의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부대를 선두에서 이끌고 있는 것은…….
스카이의 심장이 빠른 페이스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설렁설렁 활시위를 당기며 적병들에게 겁을 주던 부하에게 소리쳤다.
“전투 준비! 증원이 몰려온다!”
“엥?”
“그게 무슨 말이에요?”
부하들이 당황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애초에 감비니 요새의 무단 점거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자리에 있는 병사들이나 그들 외에는 없었다. 그런데 대체 누가 이런 기가 막힌 타이밍에 증원을 보내온단 말인가.
엘레나도 어리둥절하여 스카이에게 물었다.
“증원이라니, 상대가 누구죠?”
“동방 장군…….”
스카이가 중얼거리자, 근처에 귀를 기울이던 부하들의 얼굴이 충격과 공포로 물들었다.
센티그마의 군주, 마르크 맥도웰.
첫째 왕자 랍토레스 메서의 오른팔이자, 자칫 베네지아 왕국에 치명타를 안겨 줄 수도 있었던 쿠데타 계획을 저지한 철벽의 사나이. 그 외에 관련된 소문들도 어느 것 하나 평범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센티그마로부터 사실상 정반대편에 위치한 것과 다름없는 감비니 요새에, 왜 뜬금없이 그가 나타났단 말인가?
“젠장, 젠장, 젠장.”
스카이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손톱을 깨물었다.
혹자는 물을 것이다. 요새의 성벽 뒤에 있으면서 왜 고작 바깥의 인간 한 명을 상대로 이렇게 긴장하느냐고. 그러나 그건 맥도웰의 진수를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는 지금껏 왕국 내외부의 온갖 자잘한 전투에 참여하면서 단 한 번도 후퇴나 패배를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이길 싸움만 골라서 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었다.
그는 항상 모든 상황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목표가 정해지면 꾸준히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었다.
사실상 불패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갑자기 감비니 요새로 접근 중이라는 사실은 절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어떡하죠, 보스?”
부하들이 묻자, 스카이는 이를 갈더니 성벽 위에 덩그러니 설치된 발리스타와 트레뷰셋을 가리켰다.
“무기를 준비시켜. 그리고 거기 너랑 너! 저쪽에 지펴둔 불을 써서 모래를 달궈! 모래부대는 아래쪽에 있다!”
“예, 예!”
일단 명령이 하달되고 나니 그의 부하들은 겁먹은 표정을 싹 지우고선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스카이는 여전히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영원 같은 순간이 흘렀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거리를 좁혀 오던 마르크의 부대는 요새 근처에서 멈춰 섰다. 부대를 앞에서 이끌던 마르크는 말없이 요새를 둘러보았다.
무너져내린 입구. 요새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죽어 나간 베네지아의 병사들. 이미 감비니 요새는 다른 집단의 손에 넘어간 것이 확실해 보였다.
“맥도웰 각하!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제라드 휘하의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원군의 등장에 기뻐하면서도, 조금은 당혹스러운 얼굴이 되어 물었다. 마르크는 거구의 몸집에 어울리는 큼직한 손을 살짝 내저으며 짤막하게 물었다.
“제라드 왕자님은 안에 계신 건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건가? 병사들은 그의 질문에 우물쭈물 말을 아끼다가, 지긋이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지레 겁을 집어먹고는 대답했다.
“예에…… 몇몇 병사들과 안에 들어가셨는데, 보다시피 퇴로가 막혀 요새 안에 갇혀 계십니다. 어쩌면 지금쯤은…….”
병사가 말끝을 흐렸다. 다른 기사들이라면 이 대목에서 그들을 질책했겠지만, 마르크는 그저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그는 “그런가.” 하고 짧게 중얼거리더니, 혼자서 요새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성벽 위에 설치된 무기가 발사될지도 모르는데, 그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발을 옮기고 있었다.
“오, 온다!”
잔뜩 긴장한 스카이의 부하들이 숨죽이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등에 대문짝만 한 타워 실드를 짊어진 마르크는 요새로부터 불과 100m 남짓한 거리까지 접근했고, 조급해진 부하들은 스카이에게 물었다.
“어쩌죠, 공격합니까?!”
그 질문에 스카이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놈에게서 신경을 끈다.”
그 말을 들은 엘레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건 무슨 헛소리지? 그러나 스카이의 말투는 진지했다.
“내 신호가 떨어지는 즉시 병사들에게 일제 사격. 하지만 마르크는 건드리지 마라.”
부하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엘레나는 전혀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적장이 바로 앞에 있건만, 어째서 모든 공격을 집중시키라고 명령하지 않는 거지?
“녀석이 등에 멘 물건이 보이냐? 저건 아티팩트야.”
스카이는 그녀의 의문에 답해 주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약점이 될지도 모르는 정보를 제 입으로 떠벌리고 다니진 않는다. 하지만 마르크 맥도웰 같은 경우는 워낙 유명한 탓에 아티팩트의 능력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의 아티팩트는 방패였는데, 능력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방패 위로 가해진 물리적 충격을 충전하여 배로 되돌려주는 것.
조건만 갖춰진다면 제라드의 골드메라 정도는 우습게 뛰어넘는 힘을 발휘하는 아티팩트였다.
“저건 공격해 보라고 일부러 우릴 도발하고 있는 거야. 우리는 녀석한테 응하지 않고 병사들만 철저하게 공격한다.”
한편 요새의 앞에 우뚝 선 마르크는 턱수염을 긁적이며 요새를 올려다보았다.
제법 가까운 곳까지 왔는데도 불구하고 투석구는커녕 화살 하나조차 날아오지 않는 걸 보아하니, 누군지는 몰라도 지휘관이 눈치가 빠른 모양이었다.
“흠…….”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병사들은 끌고 온 마차 위에 덮인 시트를 걷어냈다.
안에서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마법포였다. 재래식 화포에 비해 크기는 작았지만, 그 화력은 비할 바가 못 됐다. 성벽로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스카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뭘 하려는 거지? 고작 법포 한 대 정도로 이 요새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가까운 짓을 대체 왜…….
“……이런.”
이윽고 무언가를 눈치챈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부하들에게 외쳤다.
“저 포를 공격해! 절대로 발사하게 놔두지 마라!”
스카이의 부하들은 그제야 다급하게 트레뷰셋과 발리스타를 조준한 뒤, 포탄과 대형 다트를 발사했다. 그러나 주변에 진을 치고 있던 마법사 부대가 전개한 방어막에 의해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액티브 스킬 : 포스 실드(lv 5).
가해지는 물리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패를 형성합니다. 숙련도에 따라 전개되는 방패의 크기, 보호 가능한 영역의 넓이 등이 달라집니다.》
“아, X발!”
스카이가 욕설을 퍼부으며 요새 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엔 비등비등하던 스테치와 제라드의 싸움도, 지금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 스테치에 의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음.”
마르크는 등에 메고 있던 거대한 타워실드를 한 손에 끼웠다.
아티팩트 ‘레오니다스’. 전면부에는 알 수 없는 재질로 만들어진 포효하는 사자 머리가 달려 있었는데, 아티팩트 치고는 그 생김새가 마치 고급 미술품처럼 아름다웠다.
마르크가 방패 전면부를 뒤쪽의 병사들 쪽으로 내세우자, 방패 아래에 부착돼 있던 앵커가 내려와 지면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병사들도 스카이 일행이 퍼부어 대는 공세를 방어하면서 마법포의 포구를 마르크에게로 향했다.
퍼어엉!
마력충전이 완료된 마법포가 푸른 불꽃을 피워 내며 탄을 발사했다.
유성처럼 긴 마력 꼬리를 그리고 날아간 마력 포탄이 마르크의 방패를 강타하자, 사자의 쩍 벌려진 주둥이 안으로 모든 에너지가 빨려 들어갔다.
스카이 일행의 끈질긴 방해에 기어이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그리고 뒤이어 세 번째 탄을 쏘아대는 마법포.
자그마치 세 발 분량의 마력탄이 가하는 충격 에너지를 모조리 흡수한 마르크는, 레오니다스의 전면부를 무너져 내린 요새 입구 쪽으로 돌렸다.
여기까지 왔다면 더는 어떻게 막아 볼 수가 없었다.
스카이는 막 제라드의 마무리를 지으려던 스테치에게 소리쳤다.
“스테치, 입구에서 떨어져!”
레오니다스에 장식된 사자의 입에서, 천지를 울리는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콰아아앙!
바윗덩이와 목책 구조물 더미로 봉인되어 있던 요새의 입구가 한순간에 박살 났다.
대기 중이던 병사들은 와아- 하는 함성과 동시에 일제히 요새로 돌격을 개시했고, 스카이의 부하들은 내려놓았던 무기를 다시 들어 올렸다.
“놈들이 온다!”
“막아!”
그러거나 말거나 떨어지는 돌멩이를 손으로 튕겨 내는 마르크. 마침내 요새 안으로 터덜터덜 발을 들여놓은 그가 가장 먼저 보게 된 것은, 막 검으로 제라드를 끝장내려던 스테치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