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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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패색
2021.12.25.
“넌 또 뭐야?”
스테치는 피곤한 표정으로 마르크에게 물었다. 그러나 마르크는 무릎을 꿇은 제라드와 스테치를 말없이 번갈아 보더니, 방패를 자신의 등 뒤의 걸이에 걸어두었다.
퍼엉!
레오니다스에 남은 에너지를 방출하여 그 반동으로 돌진한 마르크. 스테치가 예상치도 못한 스피드로 접근해 온 그는 복부에 펀치를 날렸다.
“크악!”
뼈가 박살 나고 내장이 터질 정도의 위력.
스테치는 달리는 마차에 차인 것 마냥 붕 떠오르더니 바닥을 굴렀다. 깔끔한 일격에 만족했는지 스테치에겐 눈길하나 주지 않고 주먹 쥐었던 손을 탈탈 털어대는 마르크.
그의 귓가에 모기만 해진 제라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맥도웰……? 네가 어떻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그가 이런 타이밍에 나타났단 말인가. 그러자 맥도웰은 제라드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품 안에서 피처럼 진한 액체로 가득 찬 유리병을 꺼내 내밀었다.
“드십시오.”
달싹이는 입술을 넘어 목구멍 안으로 끈적한 물약이 들이부어 지자, 박살 난 뼛조각들이 하나로 붙고 찢어진 상처가 봉합되었다.
효과가 끝내주는 만큼 고통도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라드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마르크는 텅 빈 병을 내려놓은 다음 말했다.
“쉬십시오. 상처가 회복되었을 뿐, 기력까지 돌아온 건 아닙니다.”
“……나한테 ……명령하지 마라…….”
제라드가 부들부들 떨며 마르크를 노려보았지만, 곰처럼 맑은 눈을 가진 그의 속내가 무엇인지는 도무지 읽어 낼 수가 없었다.
제라드를 내려다보던 마르크는 얼굴을 가까이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형님으로부터의 전언입니다.”
“……!”
“‘이 빚값은 나중에 받아 내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염병!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주제에 이제 와서 빚이라고?
제라드는 마르크를 노려보며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나 절묘한 때에 원군이 온 것은 분명 첫째인 랍토레스의 수작질 때문이 틀림없었다.
“왕자님의 잘못입니다.”
마르크는 직설적으로 말했다.
“골드메라의 힘을 사용했다면 요새를 탈출하는 것쯤은 간단했겠지만, 실제로 왕자님은 그러지 않으셨죠. 적과의 싸움에 집착하시니까 이런 결과가 나온 겁니다.”
“망발을……!”
“저자의 상대는 제가 맡겠습니다. 왕자님은 뒤로 물러서십시오.”
한바탕 독설을 쏟아 낸 마르크는 스테치가 날아간 방향을 돌아보았다.
스테치는 피로에 젖어 보이긴 했지만, 일격을 맞고 날아간 것 치고는 상태가 꽤 멀쩡했다.
‘왜 원군이 온 거지? 정보가 샜나?’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스테치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하여 검을 쥔 손으로 힘이 들어갔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이국적인 외모. 특유의 거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르크는 단순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위압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어이, 함부로 싸움 걸 생각하지 말고 일단 물러서!”
모래를 튀기며 미끄러져 온 스카이가 스테치의 옆에 섰다.
항상 능글맞고 여유 있는 태도를 유지하던 그는 스테치만큼이나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야, 대체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저 인간은 또 누군데?”
“동방불패의 마르크 맥도웰 장군이다. 이제 좀 기억이 나냐?”
그의 화려한 전적과 명성에 대해서는 들어 본 바가 있었다. 그런데 맥도웰은 지금쯤 분명 동쪽의 센티그마에 있어야 하지 않나? 천천히 걸어오는 마르크의 모습에 스테치가 혀를 차자 스카이가 소곤거렸다.
“무슨 말 하려는지는 알겠는데, 우리도 저 새끼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거든! 어쨌든 물리공격은 피하고…….”
“마법을 쓰라 이 말이잖아. 나도 알아, 임마.”
스테치는 검을 집어넣었다.
마르크의 아티팩트는 그 유명세만큼이나 약점도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오직 충격 에너지만 충전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마법을 상대할 때의 마르크는 그저 방패를 든 덩치에 불과했다. 하지만…….
‘저놈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해 줄 위인인가?’
스테치와 스카이, 두 사람 모두 속으로는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르크가 허풍으로 불패의 상징이 된 것은 아닐 터. 비장의 수라도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잡담은 끝났나.”
마르크의 말에 스테치는 눈을 부라렸다.
“시간이 없으니까 바로 가도록 하지.”
그는 양손의 건틀렛에 스파이크가 달린 부품을 장착하더니, 등 뒤에 맨 레오니다스로부터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좀 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스테치에게 대쉬하는 마르크. 막 움직이려던 스테치와 스카이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다리가……!’
막 움직이려던 스테치는 다리가 쿡쿡 쑤시는 것을 느끼곤 그 자리에 멈춰 버렸다.
레오니다스의 포효에는 면역이 없는 자로 하여금 듣는 이의 사지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힘이 있었다. 특히 스테치의 경우엔 플레시 골렘에게 중독당한 다리가 사자후까지 겹친 탓에 말을 듣지 않는 것이었다.
퍼억-!
“우욱!”
“크아악!”
날아온 마르크는 양팔을 벌리더니, 동시에 두 사람에게 래리어트를 걸었다.
스카이는 손에 쥔 화기를 들어 올려 충격을 감쇄시키려 들었지만, 의미가 없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단 일격에 실신 직전의 상태가 된 두 사람 모두 바닥을 굴렀다.
“으…… 아…….”
고통에는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눈앞이 핑핑 도는 것만큼은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
스테치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다잡고 간신히 일어났지만, 스카이는 여전히 쓰러진 채 신음하고 있었다.
스테치가 말없이 헐떡이며 저편에 누운 제라드를 흘끔 쳐다보았고, 그 시선을 눈치챈 마르크가 입을 열었다.
“싸울 때는 오롯이 이쪽에 집중하는 편이 좋을 거다. 한 눈 파는 순간 내 손에 죽을 테니.”
“크윽……!”
스테치는 이를 갈았다.
제라드, 거기에 연달아 마르크 같은 거물까지 상대하기에 지금의 그는 최적의 컨디션이 아니었다.
마법으로 신체를 회복한 스테치는 잠시 고민하더니 반지 낀 손을 뻗었다.
“《파이어볼》!”
펑!
큼직한 화염구가 날아가 마르크를 뒤덮었다. 그러나 불꽃이 사그라들었을 때, 그는 이미 방패를 들어 주문을 막아 낸 상대였다. 하지만 스카이가 말했듯 레오니다스로는 마력 에너지를 흡수하지 못한다.
마법으로 찔러 보면 언젠가는 틈이 나올 것이다.
“《아크》!”
손끝에서 발사된 전격이 레오니다스의 표면을 타고 빗겨 나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스테치가 다른 주문을 준비하는 사이, 방패 뒤쪽에 선 마르크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마법사인가.”
단순한 중얼거림이었겠지만, 저 말이 왜 이토록 신경 쓰인단 말인가.
마르크는 스테치가 다시 손을 뻗으려는 순간 방패를 옆으로 치웠다. 방패를 쥔 쪽의 반대편 손에는, 새하얀 천 같은 것으로 둘둘 말린 동그란 물체가 들려 있었다.
『……저건?!』
그러나 메멘토 모템의 말을 듣고 스테치가 반응하기도 전에, 마르크는 물건 끝에 달린 심지를 건틀렛 낀 손가락으로 비벼 불을 붙이더니, 스테치의 앞으로 슬쩍 던졌다.
폭탄?
물체의 심지는 눈 깜짝할 사이에 타들어 갔고, 마르크가 던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폭발했다. 하지만 스테치가 각오한 것과는 달리 폭발 자체는 너무나도 미미했고, 잔뜩 긴장하여 방어 자세를 취한 그는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요새 안뜰에 넓게 깔린 희끄무레한 안개. 그리고 그 속에 섞여 반짝이는 자그마한 입자. 손가락 끝으로 공중에 뜬 입자를 긁어 낸 스테치는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야?’
『……디스펠륨……!』
그 순간, 다시 스테치에게 대쉬한 마르크가 펀치를 날렸고, 스테치는 바닥에 엎드려 간신히 공격을 피했다. 디스펠륨이라고? 이게? 머릿속이 멍해졌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디스펠륨 입자가 자욱이 펼쳐진 주위를 둘러보며 스테치는 헛숨을 들이켰다.
“웁!”
본능적으로 입을 틀어막은 스테치. 그러자 마르크는 그런 그를 보며 말했다.
“눈치가 아주 좋군. 하지만 소용없다. 이미 입자는 폐 안까지 들어갔을 테니까.”
『약삭빠른 놈 같으니.』
메멘토 모템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떤 방식으로든 체내로 흡수된 디스펠륨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 분해된다. 하지만 일단 몸 안에 입자가 들어온 이상, 스테치가 안개로부터 벗어나더라도 메멘토 모템의 마법은 위력이 반감될 것이다. 아니, 최악의 경우엔 한동안 마법을 아예 못 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흠!”
레오니다스의 에너지를 전부 소모한 그는 한 손에 방패를 든 채 스테치와 육박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분명 커스드 클록의 영역 안에 있으니 힘이 빠질 법도 하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는 1m가 넘는 묵직한 타워 실드를 가볍게 휘두르고 있었다.
“그윽!”
스테치는 죽기 살기로 마르크의 펀치를 회피했다.
더 이상 주문에 의한 회복도, 공격도 불가능하다. 게다가 페네트레이터는 폰두스의 무리한 증량을 감당하느라 전에 없이 너덜너덜해진 상태. 지금 같은 때에 마법이 봉인된 건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
『스테치, 역시 혼자서는 무리다! 잠깐 뒤로 빠져 봐!』
‘뭘 하려고?!’
스테치가 백스텝으로 크게 거리를 벌리자, 메멘토 모템은 시져를 발동시켰다.
반지를 빠져나간 메멘토 모템의 정신은 사용하기에 적당한 몸을 찾아 돌아다녔다.
어빌리티 시져로 아티팩트 소유자의 몸을 강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나마 주위에서 써먹을 만한 몸은…….
“『……푸핫-!』”
쓰러져 있던 스카이는 마치 죽다 깬 사람처럼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부릅뜬 눈의 동공 한가운데에는 기이한 녹색 빛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으아아!』”
벌떡 일어선 스카이가 망가진 화기를 집어던지고, 다른 손에 든 화기의 방아쇠를 당겼다.
스테치에게 달려들며 주먹을 날려대던 마르크의 어깨로 산탄이 박혀 들어갔고, 처음으로 그의 몸에서 새빨간 피가 터져 나왔다.
“?!”
방패를 내세우고 자리를 굳힌 마르크의 눈에 경계심이 얽혔다.
스테치는 총구에서 흘러나오는 연기를 후 불어 재끼는 스카이를 흘끗 쳐다보더니 얼굴을 짝 소리 나게 덮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이거 기분 되게 이상하다.”
메멘토 모템이 낯익은 얼굴로 말하는 모습은 새삼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자 메멘토 모템은 한심하다는 듯 물었다.
“『지금 그게 중요하냐?』”
스카이의 몸을 강탈한 메멘토 모템은 그가 기억하는 모든 정보, 그리고 몸에 익힌 테크닉들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메멘토 모템이 능숙하게 총열을 꺾는 모습을 바라보며 스테치가 말했다.
“한 시간밖에 없어…… 그 안에 우리가 정말 저놈을 끝장낼 수 있을까?”
“『끝장내야지.』”
철컥!
새 탄을 장전해 넣고 총열을 다시 되돌린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안 그러면 넌 여기서 저 새끼한테 죽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