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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일발역전 (86/203)


86화 일발역전
2021.12.26.


“밀어붙여!”

“절대 요새 안으로 들여보내지 마!”

스카이의 부하들은 한창 성벽로 위에서 요새 안으로 들어오려는 병사들을 막아 내고 있었다.

적이 접근하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달구기 시작한 모래는 붉어지다 못해 태양처럼 새하얗게 빛을 뿜어낼 지경이었는데, 그들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모래를 냅다 아래로 부어 버렸다.

“아아아악!!”

잠시 후, 병사들의 고통에 찬 비명 소리가 엘레나의 귓전을 때렸다.

요새의 입구는 훤히 뚫린 데다 들어오려는 병사들은 많았지만, 스카이의 부하들은 생각 이상으로 적의 침입을 잘 저지해 내고 있었다. 뜨거운 모래를 부은 자리에 미리 가져온 기름을 쏟자, 수 미터 높이의 화염이 치솟으며 입구를 완전히 틀어막아 버렸다.

“잘 탄다!”

“야! 보고만 있지 말고 그거 가져와, 그거!”

덜커덕!

한 아름 사이즈의 커다란 상자를 내려놓고 뚜껑을 열자 나타난 것은 바로 폭탄이었다.

14년의 세월.

스카이는 크로마토스 제국에서 입수한 화약 제조 공법을 응용하여 소형이면서도 치명적인 파괴력을 발휘하는 폭탄을 개발했는데, 이번 전투를 위해 가져온 폭탄과 폭약만 해도 자그마치 마차 다섯 대가 넘는 분량이었다.

콰과광!

“으아아악!”

입구 근처로 쏟아지는 폭탄 세례에 병사들은 허겁지겁 성으로의 진입을 미뤄 두고 멀어져 갔다.

그러는 동안 트레뷰셋과 발리스타가 지속적으로 가하는 공격에 의해 마법사들의 방어에도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베네지아 병사 측이 가지고 온 공성 병기는 마법포가 유일했는데, 그나마도 고작 1문밖에 없는 데다 한 번 발사에 필요한 마력량이 많다는 것이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했다.

덕분에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행하는 과정에서 마력을 빠르게 소진해 버린 마법사들은 차례대로 쓰러져 갔다.

“이익…… 왕국을 좀먹는 도적놈들 같으니!”

마법사 한 명이 마지막 남은 마력을 쥐어짜 마법포에 주입하자, 푸른 불꽃을 토해 내며 탄이 발사되었다.

“흐응!”

엘레나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의 장력과 발사 가능한 두꺼운 화살을 세팅한 뒤 당기고 있던 시위를 놓았다. 포탄보다 빠르게 날아간 화살이 마력탄에 닿자, 수십 개의 작은 조각으로 나눠진 탄이 성벽 여기저기에 꽂혔다.

당연히 요새가 입은 데미지는 전무에 가까웠다.

퓻!

엘레나가 쏜 화살들은 방패 뒤에서 머리를 내밀고 결과를 지켜보던 병사들의 머리에 하나씩 꽂혔다. 헤드헌터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정도로 끝내 주는 활 솜씨에 스카이의 부하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 * *

타앙!

메멘토 모템의 총 끝에서 불꽃이 터져 나왔다.

스테치는 마르크의 방패를 피해 뒤로 빠졌고, 메멘토 모템은 계속해서 빈틈을 노리고 총을 쏴 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르크는 2 대 1이라는 대치 상황이 무색하게, 점점 두 사람의 협공을 막아 내는 것도 모자라 때로는 압도하기까지 했다.

과연 장군의 직책을 맡은 자 답다고나 할까.

메멘토 모템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긴 했지만, 갑옷을 두른 그의 몸에서 총탄이 꿰뚫을 수 있을 정도로 약한 부위는 상완부와 머리가 유일했다.

마르크는 그 점을 십분 활용하여 최소한의 동작만으로 조준을 피하거나 탄을 막아 내는 동시에 스테치를 공격하는 데 더욱 집중했다.

마르크가 손에 쥐고 쓸 정도로 소형화 된 화기를 처음 상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봤을 때, 그의 대처는 상당히 능숙하고 세련됐다.

‘『썩을, 겉멋만으로 장군 클래스가 된 건 아니다 이건가.』‘

마르크의 사각에서 뒤쪽으로 돌아간 메멘토 모템이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스테치에게 주의가 팔린 줄 알았던 마르크는 즉시 방패를 돌려 들어 머리를 가렸다.

한 번 매운맛을 본 마르크는 처음부터 메멘토 모템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초월적인 맷집 덕택에 괜찮아 보일 뿐, 또 맞아 줄 정도로 스카이의 총탄은 물렁하지 않았다.

콰앙!

마르크가 레오니다스를 내세워 발사된 산탄을 모두 막아 내자, 메멘토 모템이 외쳤다.

“『지금이야!』”

“커스 디바우러!”

그리고 그때 접근해 온 스테치가 마르크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부스트가 걸린 신체 능력으로 통상보다 훨씬 빠른 스피드로 움직인 덕분에, 마르크는 제 때에 반응할 수 없었다.

캉!

그러나 그는 ‘공격을 피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를 골랐다.

마르크는 자신이 걸친 갑옷이 얼마나 튼튼한지를 잘 파악하고 있었고, 또한 그가 봤을 때 스테치의 검은 도저히 무언가를 베거나 찌르고 들어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치기 직전, 스테치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빠지지직!

“!”

갑옷에서 스파크가 번쩍임과 동시에 강렬한 스파크가 마르크의 체내를 휘젓고 다녔다.

통짜 금속으로 된 마르크의 갑옷은 바라크의 전기를 상대로는 너무나도 취약했다.

생각치도 않았던 충격에 깜짝 놀란 마르크는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듯싶더니, 공격을 위해 방패를 다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이번엔 한발 앞선 스테치가 먼저 다가와 폰두스를 낀 손으로 레오니다스의 사자 머리를 붙잡았다.

‘증량!’

평소처럼 방패를 들어 올리려던 마르크는 갑자기 훅 불어난 무게에 당황하여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면에 박혀 들어갈 정도로 무거워진 레오니다스는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옆으로 빙 돌아간 메멘토 모템이 마르크의 뒤통수를 향해 다시 총을 쐈다.

방패를 쓸 수 없었던 그가 재빨리 두꺼운 건틀렛으로 가려 총탄을 막아 냈지만, 도움닫기로 뛰어오른 메멘토 모템이 건틀렛 낀 손과 머리통을 함께 걷어찼다.

“『지금이다!』”

스테치가 방패로부터 손을 떼자 갑자기 원래대로 돌아온 무게에 마르크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으아아아!”

스테치는 뒤로 쓰러지려는 마르크에게 미리 장전해둔 검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저렇게 무방비 상태에서 이 일격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타앙!

타격부가 마르크의 턱을 꿰뚫기 직전, 그는 쓰러지던 자세 그대로 뒤로 넘어가며 발끝으로 스테치의 손을 쳐올렸다.

스테치가 놓친 페네트레이터가 공중으로 떠오르며 타격부는 허공을 강타했고, 마르크는 바닥에 쓰러졌다.

“『이 자식이!』”

바닥에 착지한 메멘토 모템이 손에 든 화기의 총구를 곧바로 마르크에게 향했지만, 그는 즉시 몸을 굴려 방패로 총탄을 막아 냈다. 몸집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기민한 동작이었다.

콰과광!

지금껏 누적된 충격 에너지를 그대로 되돌려 주는 마르크. 메멘토 모템은 꼼짝도 못 한 채 날아갔고, 스테치는 땅에 떨어진 검을 주워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하다.

디스펠륨 때문에 적극적인 공세에 나설 수 없게 된 탓도 있었지만, 그런 걸 떠나서 마르크 맥도웰이라는 남자는 너무나도 격투에 능했다.

테크닉부터 즉흥적인 임기응변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기술적인 완성도는 제라드보다도 뛰어났다.

하지만 절망적으로 보이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스테치의 얼굴은 여유만만했다. 슬슬 이 마르크 맥도웰이라는 남자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이 잡히고 있었다.

‘아직도 덤비는가.’

턱 끝에 맺힌 핏방울을 갑옷 위로 슥 훔쳐 낸 마르크는 방패를 들고 자세를 취했다.

스테치는 더 이상 회피 위주의 싸움은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는지 적극적으로 마르크에게 뛰어들었다.

스테치가 인챈트 된 검을 휘두르자 마르크는 방패로 공격을 간단히 받아 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스테치가 노린 것이었다.

마르크 맥도웰은 지금까지 대부분의 공격을 아티팩트인 레오니다스로, 나머지는 갑옷으로 커버해 왔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전기는 금속 갑옷을 걸친 그에게 있어 최악의 상성. 갑옷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다면 마르크에게 남은 유일한 방어 수단은 오직 방패뿐이었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자면, 스테치는 마르크가 방패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을 유도해 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증량!’

스테치가 자신의 검을 막아 낸 방패를 손으로 짚자, 마르크가 한 팔로는 도저히 들 수 없는 무게가 되어 버렸다.

스테치는 방패를 붙잡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 다음, 검으로는 방패를 쥐고 있던 마르크의 팔을 건드렸다.

“!”

검과 금속 방어구가 접촉하는 순간 전신으로 내달리는 전류. 마르크는 살면서 처음으로 진정으로 고통스럽다는 게 어떤 감각인지를 확실히 맛보았다.

마르크는 자신의 적에게 심리적 압박감을 가하는 것에 능했다.

단순한 신체 스펙으로 압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에 뒤지지 않는 테크닉과 센스로 상대의 전의를 상실시키게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다. 때문에 그와 적대한 이들은 본 실력의 절반도 채 발휘하지 못하고 패배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스테치는 달랐다.

그는 자기 연령대에 비해 수많은 던전 키퍼를 상대로 싸워온 베테랑 중의 베테랑. 마르크 ‘정도’의 압박에 굴하고 무너질 인간이 아니었다.

빠지지직!

“크윽!”

마르크는 선택해야만 했다.

방패를 내려놓고 공격을 피해 물러설 것인가? 아니면 버티면서 다른 수를 찾아볼 것인가?

방패에서 손을 뗀 그는 감전되는 와중에도 스테치의 검을 직접 붙잡아 떨쳐 낸 뒤, 발로 걷어차 멀리 밀어 버렸다.

먼저 달려들던 이전과는 달리 지금은 조금이라도 빨리 떨어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

누적된 데미지로 잠시 비틀거리던 마르크는 방패를 다시 쥐며 숨 가쁘게 헐떡였다.

스테치는 바로 공격을 이어 나갈 수 없었는데, 메멘토 모템을 포함하여 한 번에 세 개의 아티팩트를 동시 조작하는 것은 기력소모가 너무나도 심했던 탓이었다.

“……적이지만, 정말 훌륭하군. 여기까지 애를 먹을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다.”

잠시 후 입을 연 마르크에게서 나온 말은 적의도 없는 순수한 감탄이었다.

마르크 맥도웰은 군인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실력자.

아티팩트도 위력적이다. 반면 그런 그를 상대하는 스테치는 주력기인 마법이 봉인 당하고, 무기와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테치는 단 한 번의 공격도 맞지 않으면서 마르크에게 역공까지 가한 것이다.

“끄아아악!”

그때 들려온 누군가의 비명. 스테치가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주변을 살펴보니, 마르크의 뒤에 누워 있던 제라드가 몸부림을 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골드메라에서 뻗어져 나온 두 개의 촉수가 각각 제라드의 목덜미와 어깨로 파고 들어가, 게걸스럽게 무언가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던 스테치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마르크는 스테치를 상대하다 말고 황급히 제라드에게 다가갔다.

거의 발작 수준으로 버둥거리는 제라드는 두 눈을 부릅뜨고선 소리쳤다.

“스테치…… 아텔리어어어!”

탓!

마르크를 지나쳐 간 제라드의 검이 방어 자세를 취한 스테치의 검등을 두들겼다.

도저히 방금 전까지 죽어가던 사람이라 보기 힘들 정도의 괴력과 스피드. 약이 잘 들었다고 보기엔 무언가 이상했다.

‘이 자식, 갑자기 뭐야?!’

“왕자님, 안 됩니다!”

제라드를 말리기 위해 마르크는 뒤에서 그를 잡아당겼다. 제라드는 지금 골드메라의 힘을 끌어낸 대가로 리바운드를 겪고 있는 상태. 이 이상 무리를 했다간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끄응…….”

한편, 바닥에 쓰러져 있던 메멘토 모템은 힘겹게 눈을 떴다.

아무래도 레오니다스의 사자후를 얻어맞고 잠깐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몸 이곳저곳이 움직일 때마다 쑤셔오는 것이 어디 한 군데 정도는 부러진 모양이었다.

‘이놈 이름이 스카이랬던가? 막 굴려서 미안하게 됐구만.’

새삼 인간의 몸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고 투덜거리며 앞을 쳐다보자, 검을 든 스테치가 막 제라드와 마르크에게로 뛰어들고 있었다.

푸욱!

스테치의 검이 제라드의 팔뚝을 꿰뚫었다. 그러나 그 이상 파고들지는 못했는데, 골드메라의 힘으로 재생하면서 검이 붙어 버린 탓이었다.

제라드는 인간 같지 않은 웃음을 지으며 스테치에게 말했다.

“잡았다……!”

어떡하지? 스테치는 생각했다.

이대로라면 승부를 내기도 전에 메멘토 모템의 어빌리티를 사용한 리바운드가 자신에게도 되돌아온다. 그렇게 되면 복수고 뭐고 전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검에 부착된 빨갛고 커다란 버튼이 문득 떠올랐다.

최후의 수단. 위급한 상황.

지금이 그때가 아니면 언제겠는가?

스테치가 버튼을 막 누르자마자, 뒤에서 달려 나온 메멘토 모템이 스테치를 미친 듯이 끌어당겼다.

제라드에게 박힌 페네트레이터마저 놓친 스테치가 뭐라고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눈앞이 하얀 섬광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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