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일시후퇴
(87/203)
87화 일시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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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일시후퇴
2021.12.27.
찌이잉-.
귓가에 이명이 울리고, 눈앞은 새하얀 빛으로 점철되어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정신 차려, 임마!”
비몽사몽 하던 그의 뺨이 얼얼해지도록 때리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스카이였다.
스테치는 흐릿하던 스카이의 얼굴이 선명해지자마자 어빌리티의 리바운드로 전신의 뼈가 뒤틀리는 듯한 고통과 함께 구역질을 했다.
“으웨에엑!”
“이놈 또 왜 이래? 대체 내가 얼마나 정신을 잃었던 거야?”
불과 조금 전까지 메멘토 모템에게 몸의 주도권을 내주고 있었던 스카이는 자신이 기절에서 막 깨어난 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의 기억은 마르크의 공격에 기절한 시점부터 끊겼다가, 대폭발이 일어난 자리로부터 스테치를 끌어내는 부분부터 이어지고 있었다.
그 필름이 끊긴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스카이의 전신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때마다 쿡쿡 쑤셔올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테치를 안전한 위치까지 옮긴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폭연으로 휩싸인 폭발 현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폭발력을 한곳에 집중시키기 위한 마법 술식. 거기에 촉매 역할이 되는 물질들의 화학 반응.
스카이는 비록 터지는 장면을 보진 못했지만, 그 폭발이 자신의 작품에서 나온 결과물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내가 만든 거긴 하지만 굉장한 위력이구만…… 괜스레 아까워지는데.”
털썩.
스카이는 스테치의 옆에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아텔리어 씨!”
성벽에서 내려온 엘레나가 두 사람에게로 뛰쳐 왔다.
사람이 둘인데 이쪽은 거들떠도 안 보다니, 스테치 너 여자 잘 골라잡았구나. 나는 기쁘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속으로 주워섬긴 스카이는 말했다.
“걱정 마. 정신은 멀쩡해. 그냥 입 하나 움직일 힘조차 없는 거지.”
“다…… 다행이다…”
엘레나가 털썩 주저앉았다. 수성 중에 대폭발이 일어났을 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 몰라 당황했지만, 어쨌든 가장 중요한 스테치가 무사한 것을 보니 안도감이 들었다.
“……죽었을까요?”
잠시 후 마음을 진정시킨 엘레나가 스카이에게 넌지시 물었다. ‘누가?’라고 물을 것도 없이 곧장 그녀가 하는 말을 알아들은 스카이는 말했다.
“아마도? 그건 내가 지금껏 개발한 작품 중 최고의 녀석이었어. 트리니트로톨루엔에 희귀물질인 컴파운드-0506A을 섞고, 바람 술식을 더하면…….”
알 수 없는 소리긴 하지만 어쨌거나 강력하다는 의미인 듯 싶었다. 한창 떠벌 거리며 자랑을 늘어놓는 스카이의 말을 피식 웃으며 들어 주던 엘레나의 귀에, 문득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은 다름 아닌 폭발의 중심지. 당황한 그녀가 벌떡 일어나서 매연 속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거대한 사람의 형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크으…….”
찌그러져서 울퉁불퉁해진 전신의 갑옷 틈새로부터 줄줄 새어나오는 피.
먼지로 숯검댕이처럼 새까맣게 변한 머리카락과 피부. 연기 속에서 나타난 이는 제라드를 어깨에 들쳐 멘 마르크였다.
“괴물 같은 자식.”
스카이는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 정도 폭발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이 있단 말인가?
물론 마르크의 상태는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안 좋았다.
충격에 휩쓸린 탓도 있었지만, 폭발의 매개체가 된 페네트레이터의 날카로운 조각들이 터져 나오며 그의 갑옷을 뚫고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 결과 폭탄에 손을 들이대고 있던 것과 다름없던 제라드는 팔 한 짝을 통째로 날려먹었고, 마르크의 오른쪽 눈알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는 기다란 금속 파편이 꽂혀 검붉은 피만 울컥울컥 흘러나오고 있었다.
쇼크사 해도 모자랄 판인데 서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엘레나는 즉시 화살을 뽑아 마르크에게로 겨누었다. 지금의 그는 이 화살을 피할 힘조차 없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왕자와 동방장군을 한꺼번에 처리해 버리면……!
콰광!
그 순간, 요새의 입구를 막고 있던 화염과 뜨거운 모래더미가 날아온 무언가에 맞아 모조리 쓸려버렸다.
그것을 필두로 수많은 베네지아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요새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보스! 큰일 났습니다!”
한 발 먼저 성벽에서 내려온 스카이의 부하들이 뛰어오자 엘레나가 당황하여 외쳤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죠!? 적의 포는 다 부순 줄 알았는데요?”
“후발 부대의 장거리 사양 마법포야! 이쪽의 사정거리 밖에서 포격중이라고!”
그 말에 맞장구치듯 안뜰에 떨어지는 2차 포격. 엘레나와 몇몇 사람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병사들은 점점 더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하…….”
힘없이 웃는 마르크의 얼굴엔 언제부터인지 희미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이거야 도망치는 수밖에 없겠구만.”
드러누워 있던 스카이가 끙~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엘레나가 물었다.
“하, 하지만 목표는요?”
“정신 차려, 아가씨. 지금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저놈들을 죽이는 게 먼저일 것 같아, 아니면 병사들한테 붙잡혀 뒤지는 게 먼저일 것 같아? 냉정하게 생각해 봐.”
마르크는 분명 중상을 입긴 했지만, 이런 급박한 상황에 그의 방패를 뚫고 제라드까지 죽일 여유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스테치는 이미 연달아 싸우느라 완전히 방전된 상태.
엘레나는 하는 수 없이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죠?”
“이렇게.”
시시각각 몰려오는 병사들을 보고도 여유만만하던 그가 손짓하자, 옆에 서 있던 부하들이 품 안에서 동그란 구슬을 꺼내 일제히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퍼버벙!
“!”
순식간에 요새 안뜰을 꽉 채운 검은 연기. 마르크는 즉시 방패를 들어 뒤로 빠지기 시작했고, 몰려오던 병사들은 시야가 가려지자마자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기 시작했다.
“이건 뭐죠……? 콜록!”
엘레나는 아티팩트의 능력으로도 쉽게 꿰뚫어 볼 수 없는 어둠에 놀라워하며 물었고, 그녀의 손을 낚아챈 스카이는 호쾌하게 웃어대며 말했다.
“으하하, 뉘르마니아 산 암흑 가루로 만든 특제 스모크 봄이다! 효과는 좋지만, 지속 시간은 짧은 게 흠이지.”
엘레나는 스카이가 동그란 고글을 뒤집어쓴 채 얼굴을 들이밀자 깜짝 놀랐다.
아무래도 그가 이 어둠 속에서 속 편히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저 고글 덕분인 모양이었다.
준비된 마차가 세워진 장소까지 도착한 그들은 빠른 속도로 출발 채비를 마쳤다. 부하 하나가 진이 빠진 스테치를 말 위에 올려놓자, 스카이가 힘겹게 다른 말에 올라탔다.
“너는 저 말에 타. 스테치 자식 안 떨어지게 조심하고.”
엘레나가 스테치가 탄 말의 고삐를 쥐자, 스카이가 다른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출발하자! 저 새끼들한테 잡히면 나중에 나한테 디질 줄 알아! 이럇!”
스카이를 시작으로 출발하는 마차와 말들의 행렬.
연막의 어둠을 뚫고 나가자 포격으로 깨끗하게 정리된 요새의 입구가 코앞에 있었다.
“우왁, 뭐야!”
갑자기 튀어나온 스카이 일행의 질주에 놀란 병사들이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요새로 들어가기 위해 입구에서부터 쭉 늘어서 있던 병사들 중 몇몇은 말발굽에 찍히거나 차여 즉사하기까지 했다.
“야! 저, 저거!”
“사수! 빨리 저놈들을 쏴!”
우왕좌왕하던 병사들이 활을 꺼내 들려는 찰나, 또다시 연막탄이 터졌다.
스카이와 엘레나의 말을 뒤따르는 마차에서는 열심히 연막탄과 폭탄을 섞어 던져대고 있었다. 병사들과 요새로부터 충분히 거리를 벌렸다 싶을 때 즈음, 뒤쪽에 바짝 붙어 있던 스카이의 부하가 외쳤다.
“저흰 이만 찢어지겠습니다! 행운을 빌어 주십쇼!”
“오냐! 아지트에서 보자!”
스카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빠른 속도로 방향을 트는 스카이의 부하들. 엘레나가 스카이에게 물었다.
“왜…… 어디로 가는 거죠?”
“병사들이 쉽게 쫓아오지 못하도록 유인하는 거야! 고작 병사들한테 잡힐 정도로 어수룩한 놈들은 아니니까 걱정 말라고!”
스카이가 외쳤다.
* * *
“콜록콜록!”
연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걷혔다. 하지만 감비니 요새를 무단 점거하던 일당은 한 놈도 남김없이 사라진 데다, 마르크 맥도웰과 제라드 왕자의 상태는 너무나도 심각했다.
병사들 중 대다수는 도망자들의 추격을 위해 출발했고, 나머지는 마르크와 제라드를 돌보기 위해 남았다.
“이럴 수가…….”
“야! 빨리 회복물약 좀 가져와!”
어느 한쪽이 그나마 낫다, 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마르크는 오른쪽 눈이 완전히 뭉개져 원형을 알아볼 수가 없었고, 제라드의 팔은 탄화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런 식으로 완전히 결손 된 부분은 회복 물약으로는 도저히 재생시키는 것이 불가능했다.
충격에 젖어 있는 것도 잠시. 다른 병사들이 약병을 가져오자 마르크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기다란 금속 파편을 손수 뽑아내고 눈구멍에 회복물약을 들이붓는 모습은, 온갖 끔찍한 상처를 봐 온 병사들에게도 기괴한 광경이었다.
“…….”
앓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혼자서 응급처치를 끝낸 마르크는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병사들은 정신을 잃은 제라드를 조심스럽게 땅에 뉘어둔 후 팔이 있던 자리에 끈적한 물약을 뿌렸다. 팔이 떨어져 나간 단면으로 새하얀 거품이 일며 상처가 치료되기 시작하자, 병사들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하루 사이에 일국의 왕자와 장군이 이토록 치욕적인 참패를 당하다니.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왕국 전체에 오늘 하루는 최악의 날로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꿀꺽꿀꺽.
병사가 건네준 물을 들이 키던 마르크는 짐짓 아무 문제도 없는 것 마냥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왠지 모를 찜찜한 기분에 좀처럼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뭐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듯한 이 느낌은?
갑옷이 벗겨지고 붕대에 칭칭 싸여 누워 있던 제라드를 가만히 응시하던 마르크. 그때,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뭐…… 크억!”
“아아악!”
폭발로 인해 안뜰 한가운데에 생긴 거대한 크레이터. 그 안으로 막 끌려 들어가던 병사가 또 한 번 비명을 내지르자, 마르크는 벌떡 일어서서 방패를 들고 달려갔다.
“뭐야?!”
“무슨 일인데?”
요새의 피해 규모를 파악하고 정리하던 병사들도 비명소리를 듣자마자 마르크를 쫓아갔다.
콰직. 콰직.
불길한 소리를 배경으로 크레이터 안에서 병사들을 처리하고 있던 무언가가, 이윽고 불쑥 튀어나와 마르크의 앞에 내려앉았다.
그것은 제라드 메서의 검, 골드메라였다.
“!”
마르크가 거대한 방패를 풍차처럼 크게 휘두르자, 수십 개의 촉수를 놀려 가볍게 회피한 골드메라가 벌레같이 기이한 동작을 선보이며 어딘가로 이동했다. 검이 향한 곳에는 제라드가 있었다.
“안 돼!”
마르크가 빠르게 제라드에게로 되돌아갔다.
굶주린 검이, 미처 치르지 못한 대가를 마저 지불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지금의 골드메라가 제라드에게 가서 무슨 짓을 벌일지는 너무나도 명백했다.
마치 만찬을 목전에 둔 거렁뱅이처럼, 촉수 끝에서 탐욕스럽게 체액을 흘려 대는 골드메라. 미동도 하지 않는 제라드에게 촉수를 박아 넣으려는 찰나, 골드메라의 힐트를 마르크가 잡았다.
푸욱!
손으로 촉수를 쑤셔 넣으며 미친 듯이 저항하는 골드메라를, 마르크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친 뒤 방패로 내리쳤다.
10번, 20번, 50번. 그리고 더 많이.
숨죽이며 지켜보는 모든 병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마르크는 방패를 크게 들어 올려 마지막으로 크게 한 방 검을 찍었다.
콰지직-.
아름다운 장식이 가미되어 있던 골드메라의 우그러지고 깨진 틈 사이에서, 보랏빛 피가 물집 터지듯 흘러나왔다. 그러나 마르크는 확실하게 끝장을 내기 위해 방패를 양손으로 붙잡은 다음, 온 힘을 다하여 내리쳤다.
그날, 제라드의 검은 완전히 파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