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뱃사람들의 악몽 (90/203)


90화 뱃사람들의 악몽
2021.12.30.


삐걱-. 삐걱-.

장루원 몇몇을 제외하곤 모두가 잠든 새벽. 평소보다 훨씬 일찍 일어난 스테치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어두운 통로를 걸어갔다.

항해가 시작된 지도 이제 거의 일주일. 마력 폭풍의 영향이 최고조가 되기 전에 한 번쯤 제대로 된 해돋이를 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스테치는, 늘어지는 하품 소리를 흘리며 갑판 위로 올라갔다.

“흐암…….”

다행히도 구름 한 점 안 낀 새벽하늘이 시원한 공기와 함께 스테치를 반겼다.

시간도 딱 맞춰서 나온 덕분에 해가 뜨기까진 조금 여유가 남아 있었다.

멀미약도 미리 마셔 두었겠다, 남은 것은 바닷바람을 즐기며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다른 사람의 인기척을 느낀 것은 스테치가 밖으로 나온 지 5분 정도 지난 뒤였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랜턴의 불을 비춰 보자, 난간 반대쪽 끝에서 벙 찐 표정으로 스테치를 보고 있는 백발의 여성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어, 너는…….”

분명 식사시간 때 봤던 사람이다. 이런 시간에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두 사람 다 똑같은 생각을 하느라 당황한 탓에 서로만 마주 보고 있던 바로 그때, 여성이 몸을 기대고 있던 난간 아래에서 희끗한 물체가 슬그머니 올라왔다.

“조심해!”

갤리온 선 찰리에는 죽은 아퀸이 남기고 간 녹슨 단검이나 창 따위가 갑판 구석에 가득 쌓여 있었다.

무기가 없었던 스테치는 급한 대로 창 하나를 집어 들고 있는 힘껏 투척했다.

푸욱!

아퀸의 머리를 뚫고 들어가는 창날.

난간에 얹었던 손이 그대로 미끄러지고, 아퀸은 차갑고 어두운 바다로 추락했다.

몬스터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여성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배 전체에 울려 퍼지는 소리. 잠시간의 적막이 흐른 뒤, 한 템포 늦게 소동을 감지한 찰리의 이곳저곳에서 선원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아퀸은 단독으로 움직이지 않는 몬스터.

하나가 나왔다면 나머지도 곧 나타날 것이라는 소리였다.

일단 여자를 방으로 되돌려보내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 스테치가 손을 뻗은 순간, 누군가가 스테치의 옆을 스쳐 지나가 여성에게로 달려들었다.

“읏!”

스테치의 손이 있던 자리를 날카로운 도끼날이 훑고 지나갔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게 늦었더라면 손목이 통째로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여성을 품에 끌어안고 갑판 바닥을 미끄러진 정체불명의 남자는, 스테치에게 손도끼를 겨눈 채 윽박질렀다.

“너 이 새끼……! 아씨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이제 보니 그는 평소 배 안에서 여자와 함께 딱 붙어 다니던 남자였다.

상황이 딱 오해하기 좋다 보니 뭔가 단단하게 착각을 한 모양인데…… 스테치가 막 입을 열어 항변하려는 사이, 남자의 품에 안겨 있던 여성은 주먹을 번쩍 들어 그를 연신 쥐어박았다.

콱! 콱!

“아!”

“이 바보! 저 사람은 날 구해 주려고 했단 말이야! 내가 다른 사람 함부로 겁주지 말라고 그랬지!”

“악! 그게, 그러니까…… 아이고!”

한편, 번개같이 전투 준비가 끝난 선원들이 검이나 몽둥이를 들고선 후다닥 달려왔다.

타이밍 좋게 배의 측면을 붙잡고 올라오던 아퀸들과 마주친 그들은 분기탱천하여 함성을 내질렀다.

“이 빌어 처먹을 몬스터 놈들, 배에서 꺼져!”

이윽고 떨어지는 경보.

등 떠밀린 스테치와 여성, 그리고 그녀를 호위하던 남자는 선원들에 의해 자신들의 방안으로 밀어 넣어졌다. 갑작스런 소란에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던 용병들도, 아퀸의 습격이라는 스테치의 말을 듣곤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어이, 뭔가 할 말 없냐?”

스테치가 남자에게 묻자, 그는 한 마디의 대꾸조차 하지 않고 자기 해먹 위에 올라가 버렸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모습에 혀를 찬 스테치는 방 안에 딱 하나 있는 의자에 걸터앉아 상황이 종료되길 기다렸다.

20분 정도 시간을 때운 스테치가 조용히 문을 열고 갑판으로 올라가자, 여기저기 널린 아퀸의 시체들을 버리고 바닥의 얼룩을 닦아 내던 선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젠장!”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바닥에 굴러다니던 아퀸의 머리통을 걷어차는 클라우디아. 스테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몹시 짜증스러워 보였다.

“왜 그러세요?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시는데요.”

“뭔가 심상찮아. 이전에 비해서 아퀸들이 배를 덮쳐오는 빈도도 늘었고, 손놀림이 좋아졌어. 방금 전에 내 부하 한 놈은 모가지가 날아갈 뻔했다니까.”

그녀의 말대로 아퀸들의 움직임은 날이 갈수록 그 은밀함과 공격성이 증가하고 있었다. 클라우디아의 반응을 보아하니 이런 일은 처음인가보다.

스테치가 물었다.

“제가 이 배에 처음 오를 때처럼 인식장애 마법을 걸면 안 되나요? 그거면 아퀸의 접근도 막을 수 있을 텐데요.”

엘레나의 말에 의하면, 배에 걸려 있던 인식장애의 마법은 그녀가 항상 사용하고 있는 것의 확장판이었다.

그렇다면 바다를 항해하는 동안 몬스터의 간섭도 피할 수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러자 클라우디아가 툴툴거리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이 배 전체를 덮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인식장애 필드는 오래 가지도 못 할 뿐더러, 자주 만들 수도 없어. 바다에서 튀어 나오는 문젯거리들은 우리 손으로 직접 처리하는 수밖에 없다고.”

요컨대 그렇게 속 편한 해결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스테치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시는데, 막 갑판 위로 올라온 엘레나가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하음.”

엘레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스테치를 발견하고선 갸우뚱거렸다.

“……그다지 좋은 아침은 아니었지만 뭐 그렇다 치자.”

함께 바람을 쐬다 식당으로 들어온 스테치는 아침으로 나온 희멀건 고깃국을 떠먹으며 엘레나의 얼굴을 살폈다.

해돋이는커녕 훌륭하게 아침을 망쳐 버린 스테치와 다르게, 충분히 수면을 취한 엘레나는 기운이 넘쳐 보였다.

“북부에서는 식후 간식으로 눈 위에 꿀처럼 달콤한 소스를 끼얹어 먹는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어, 아니…….”

“북부에는 드워프들이 만들어 낸 온갖 신기한 기계장치들이 많이 있대요! 눈 위를 달리는 전용 탈 것이 있다는 거 아세요?”

“…….”

항해가 이어지면서 몬스터의 출몰이 잦아지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더 큰 변화는 엘레나가 갑자기 온갖 북부 잡지식들을 뽐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북부에 대한 그녀의 기대감 또한 이야기거리만큼이나 잔뜩 부풀었는지, 이제는 식사시간만 되면 입을 달싹일 지경이었다.

스테치가 고기를 뜯으며 물었다.

“그런 이야기들은 다 어디서 배운 거야? 책?”

“룸메이트가 알려 줬어요. 정말 착하고 아는 것도 많더라고요.”

누구? 스테치는 엘레나의 눈길을 따라 어느 테이블로 고개를 돌렸고, 갑자기 쏟아지는 시선을 눈치챈 백발의 여자는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저 사람, 북부 출신인가?’

북부와 남부는 서로 적대 관계인 데다, 지리적으로 교류가 불편한 탓에 오가는 정보의 양이나 사람의 수가 극히 적었다.

북부에 대한 정보는 오직 현지인의 기록이나 입을 통해서 전달 받는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백발 여성은 북부 출신일 가능성이 높았다.

‘애초에 북부의 인간이 왜 베네지아에서 크로마토스로 가는 밀항선에 타고 있는 거지? 반대라면 모를까…….’

갑자기 든 의문에 스테치는 엘레나가 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려보내며 한참 동안 말없이 고기와 비스킷만 씹었고, 그러는 동안 식사가 끝나 버렸다.

엘레나와 헤어진 스테치가 남자방으로 들어서려는 그때, 거친 손 하나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잠깐.”

“……뭐냐?”

스테치가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돌아보자, 예의 무뚝뚝한 인상의 남성이 서 있었다.

사정은 둘째 치고 자신에게 칼을 겨눴다는 행위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스테치는 무심코 날카롭게 반응했지만, 남자는 그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아씨가 고맙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하셨다.”

“뭐?”

스테치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방으로 먼저 들어가 버린 그는, 평소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해먹에 몸을 던지고 등을 돌려 버렸다.

뒤따라온 스테치가 몇 번 불러보았지만, 묵묵부답일 뿐이었다.

“에휴, 그래. 마음대로 해라.”

물질적인 보상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면 얼굴 정도는 보면서 직접 말해야 되는 거 아니야? 속으로 툴툴거리는 스테치는 그대로 해먹에 누워 눈을 감았다.

다른 용병 두 명이 그에게 카드 게임을 권했지만, 이미 몇 십 번이고 했던 게임을 또 한다고 지루함이 해소될 것 같진 않았기 때문에 조용히 손을 흔들어 거절 의사를 표했다.

그렇게 스르륵 깊은 잠에 빠져든 스테치가 눈을 뜬 것은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이후였다.

살짝 열린 나무창 틈으로는 황혼의 붉은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자기 전에는 아직 중천에도 도달 못 했던 해가 벌써 저물어 가고 있다니,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잠을 자고 있었던 거지?

본의 아니게 점심을 통째로 걸러 버린 스테치는 밥 달라고 울부짖는 배를 움켜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늦게 방에서 나온 스테치는 다른 날보다 유달리 분주하게 배 이곳저곳을 오가는 선원들의 모습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 일어나셨어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고 서 있던 엘레나는 스테치를 발견하고선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다들 바빠?”

“기상 상태가 예측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안 좋아지고 있어서 다들 대비하고 있는 거예요. 아무래도 오늘부터 며칠간은 갑판 위에 올라가지도 못하겠죠.”

* * *

“단순한 기상 악화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선장실에서 걸어 나오던 클라우디아의 질문에 항해사가 말했다.

“마력 폭풍의 영향권에 꽤 가까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풍파가 몰아치기엔 너무 이른 시점입니다. 바람과 물의 흐름도 일지에 기록된 것들과는 완전히 딴판이고요. 뭔가 이상합니다.”

벌컥!

문을 열고 갑판에 나선 클라우디아는 품 안에 넣어 두었던 망원경을 꺼내 전방에 낀 먹구름을 살펴보았다. 노을색으로 물들었던 하늘을 눈 깜짝할 사이에 뒤덮고 있는 구름떼 사이에서, 푸른 뇌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일단 배를 우현으로 천천히 꺾어. 항해에 지장이 될 만한 요소가 있다면 일정을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피해 줘야지…… 응?”

항해사에게 지시를 내리며 망원경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클라우디아는 초점을 어느 한 지점에 둔 채 그대로 멈췄다.

아무것도 없어야 할 바다 한가운데에, 뾰족한 기둥 같은 것이 튀어나와 있었다. 저게 뭐지?

쿠구구구구-.

배를 좌우로 기우뚱거리게 만들 정도의 거대한 울림.

온갖 거친 풍파에도 견뎌온 클라우디아와 다른 베테랑 선원들마저 잠깐이나마 균형을 잃을 정도의 진동.

“뭐—”

그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수십 미터 높이로 치솟은 거대한 물기둥. 그것이 통째로 내려앉는 순간, 클라우디아의 배는 종이배처럼 허무하게 밀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갤리온 선의 난간과 돛대를 붙잡고 버티던 선원들과 클라우디아의 눈으로, 웬 거대한 물체가 들어왔다.

곳곳에 낀 따개비와 해초. 코가 비뚤어질 것만 같은 바다의 비린내.

자욱하게 낀 물안개를 걷어내며 나타난 그것은 다름 아닌 해골 형상의 범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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