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그레이 스컬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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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그레이 스컬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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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그레이 스컬쉽
2021.12.31.
예로부터 뱃사람들 사이에서는 수많은 바다의 미신들이 떠돌아다녔다. 단순한 괴담 수준부터 전설에 이르기까지 그 양과 질은 다양했다.
내용이 얼마나 터무니없든 간에 믿는 것은 오롯이 본인의 몫.
그러나 클라우디아의 앞에 있는 그것은, 허구가 아닌 현실이었다.
“저 배는……!”
선원들이 기겁하여 주저앉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그레이 스컬쉽.
배의 골조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뼈와 녹슨 강철들. 박쥐의 피막처럼 핏줄이 두드러진 돛. 모든 것이 구전 속에 묘사된 외견 그대로였다. 클라우디아의 뺨을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것과 동시에, 한 줄기 벼락이 내리쳤다.
“너희들! 정신 똑바로 차려! 여기서 넋 빼놓고 있으면 우리 모두 죽어!”
“하, 하지만…….”
스컬쉽이 이토록 공포스러운 존재가 된 이유는 간단했다. 한 번 등장하면 주변에 있는 범선들은 모조리 격침시켜 생존자를 거의 남겨 놓지 않기로 악명 높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스컬쉽 안으로 끌려들어 간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그렇게 사라진 이들이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지는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클라우디아가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형 아티팩트 ‘퀴네에’를 움켜쥐자, 손가락 사이로 환한 빛무리가 새어 나왔다. 인식장애의 마법을 발동한 그녀의 배는 반짝이는 입자에 뒤덮여 갔다.
“타각을 좌현 35도로! 전속력으로 스컬쉽에서 벗어난다!”
인식장애의 술이라면 그레이 스컬쉽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막연한 희망을 품게 된 선원들은 그제야 자리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포 준비!”
항해하면서 단 한 번도 쓸 일이 없을 것 같았던 화포들의 포문이 차례대로 열렸다.
묵혀 둔 탄을 포구에 집어넣고 돛을 조율하는 동안, 스컬쉽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인식장애 필드의 지속 시간은 20~30분. 주어진 시간 안에 얼마나 도망칠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스컬쉽을 우회한 찰리는 거칠어진 파도에 흔들거리면서 원래의 항로를 따라 다시 이동했다.
“발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내 신호가 있을 때까지 쏘지 마라!”
이제는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힐 지경이 되자 클라우디아는 악을 써 가며 지시를 내렸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제대로 된 발사각이 나오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아직 스컬쉽과의 거리도 충분히 벌리지 못했다.
또한 인식장애 필드는 한도를 넘어선 소리나 격한 움직임까지 가려 주진 못하므로, 신중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불행하게도 애가 타는 클라우디아의 심정과 다르게, 바다는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휘몰아치는 역풍과 파도 때문에 배는 똑바로 나아가질 못했고, 굵어진 빗줄기는 시야 확보를 곤란하게 만드는 데에 단단히 한몫했다.
선원들은 바삐 갑판 이곳저곳을 오가며 배를 조정했지만, 시시각각 빠르게 변화하는 기상 상태에 모두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발사!”
인식장애 필드가 걷히는 타이밍과, 역풍을 타느라 지그재그로 나아가던 배가 사선을 확보한 순간. 클라우디아의 발포 명령에 따라 나란히 정렬된 포구에서 폭염이 뿜어져 나왔다.
투콰광!
그러나 스컬쉽의 돛대와 측면을 박살 내고 들어가야 할 포탄들은, 깨끗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도중 목표에 닿기도 전에 파편을 튀기며 터져 나갔다. 마치 허공에 투명한 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뭐야, 대체!”
첫 공격을 받은 직후, 언제까지고 제자리에 있을 것처럼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던 스컬쉽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컬쉽이 지면을 내달리는 마차처럼 부드럽게 수표면 위로 미끄러지는 광경은 클라우디아가 봐온 것들 중 최고로 기묘한 것이었다.
“따라잡히고 있습니다!”
간신히 넓혀 둔 간극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찰리의 뒤를 쫓는 그레이 스컬쉽. 클라우디아의 재빠른 행동으로 잠깐이나마 사기가 올랐던 선원들의 얼굴에 다시금 절망감이 어른거렸다.
철컥!
아슬아슬한 거리까지 찰리를 따라잡은 스컬쉽에서 크고 묵직한 쇠갈고리들이 발사되었다.
갑판 바닥을 부수고 들어간 갈고리들로 급제동이 걸린 찰리는 잠깐이지만 크게 뒤쪽으로 기울어졌다.
“으아아!”
선원들이 굴러 내리는 사이, 결국 승객으로서 배에 타고 있던 용병들이 무슨 상황인지 보기 위해 갑판 위로 올라왔다.
평소 습격에 대응하던 것과는 달리 대포까지 쏴 대니 도저히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그리고 그때, 스컬쉽으로부터 튀어나온 수십 개의 인영이 굵직한 쇠사슬을 거미줄처럼 타고 찰리로 접근했다.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보이는 인영들의 정체는 뼈까지 말라붙어 썩어가는 사람의 시체였다.
“저게 뭐야? 유령선!?”
“승객들은 스스로 자기 몸을 방어하세요! 본 선의 선원들은 더 이상 당신들을 지켜 줄 수 없습니다!”
승객들에게 외친 클라우디아가 검을 뽑아드는 것을 신호로, 선원들은 각자의 무기를 들어 올렸다.
선원들은 스컬쉽의 몬스터들이 밀려드는 모습에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지만, 저항조차 하지 않고 목숨을 내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체 무슨 난리통이야, 이건?”
뒤늦게 용병들을 따라 나온 스테치와 엘레나도 이야기에서나 나올 법한 광경에 놀라워했다.
단순히 날씨 안 좋아지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흉물스런 배 한 척이 나타나 이쪽을 공격해 오고 있으니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백병전이다!”
선상에서는 시체들과 선원들의 본격적인 싸움이 벌어졌다.
선원들과 합세한 용병들이 열심히 시체들을 베어 넘겼지만, 쓰러뜨린 수보다 새로 배에 오르는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흥!”
엘레나는 막 다가오던 시체의 머리통에 발차기를 먹인 뒤, 단검을 뽑아 들고 다른 선원들을 돕기 위해 싸움판으로 뛰어들었다.
백발 여자와 항상 붙어 다니던 남자는 도끼에 달린 끈을 붙잡고 휘둘러 대며 몰려드는 시체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자 쪽은 방에 놔두고 온 모양이었다.
승객들 중 유일하게 무기가 없었던 스테치는 아퀸의 녹슨 단검 두 개를 집어 들고 앞으로 나섰다.
“키에엑!”
뒤에서 엘레나를 덮치려던 시체 하나를 막 베어 넘기고, 단검을 손 안에서 빙빙 돌리다가 다른 시체의 머리통에 던졌다.
푹!
깔끔한 솜씨로 몬스터 둘을 끝장낸 스테치. 그러나 다음 적을 찾아 전투를 이어가는 스테치의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치!』
“?”
방금 뭐였지? 멍하니 서서 두 눈을 끔뻑이는 스테치에게, 사각에서 나타난 시체가 덤벼들었다.
썩은 내가 풀풀 풍기는 이빨에 단검을 물려 놓고 한참을 씨름하던 스테치는, 시체의 배를 걷어차고 나서야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스……치!』
또다. 누가 나한테 말을 걸어오고 있는 걸까.
스테치가 검을 크게 휘둘러 시체 하나의 모가지를 댕겅 잘라 내자, 골통을 쪼개 놓을 정도로 커다란 호통이 울려 퍼졌다.
『스테치 아텔리어!』
막 단검을 찔러 넣으려던 스테치는 고통으로 신음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귓구멍에서 피가 나는 건 아닌가 손으로 더듬거린 스테치는, 헐떡이면서 메멘토 모템에게 말을 걸었다.
“가, 갑자기 왜 그래?!”
『갑자기는 개뿔. 내가 널 깨우려고 몇 번이나 말을 걸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속사포처럼 쏘아 댄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지. 넌 지금 너도 모르는 사이에 환각에 빠져 있어. 일시적으로 널 깨우긴 했지만, 다시 꿈에 빠져드는 것도 시간문제야.』
“잠깐만…… 도저히 이해가 안 돼. 환각이라고? 뭐가?”
『모든 게 다! 네가 보고 있는 건 전부 심상이 만들어 낸 헛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금 이 순간에도 환상이 깨지지 않는 이유는, 네가 마음 한 구석에서 내 말을 믿지 않고 있기 때문이야.』
푹 젖어 눈앞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낸 스테치는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나서서 환상이라고 해 봤자,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메멘토 모템은 한숨을 푹푹 쉬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 봐. 지금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이 순간까지도 적이 우릴 공격하지 않는 이유는 뭔데?』
“……어?”
그제서야 스테치는 쉴 틈 없이 밀려오던 적의 공세가 잦아들었다는 것을 알아들었다.
승객들과 선원들 모두 초점을 잃는 눈으로 멍하니 엉뚱한 방향에 무기를 휘두르는 동안, 정작 시체들은 달려오는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메멘토 모템의 말은 끊이질 않았다.
『왜 적선은 이쪽을 포격으로 때려 부수지 않고 굳이 백병전을 걸어온 걸까? 언제부터 넌 남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말을 걸게 된 거지?』
지금껏 당연하게 먼저 떠올렸어야 할 내용들을 계속해서 지적당하자, 스테치의 시야에 희미한 노이즈가 끼기 시작했다.
『시간만 있다면 스스로 모순을 자각하고 환상을 깨도록 내버려 두었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여유가 없으니 내가 도와주마.』
* * *
“평소처럼 조용하군. 움직여!”
검은 반다나를 복면처럼 두른 남자들이 조용히 찰리에 올라탔다.
갑판 위는 흉흉하게 무장한 선원들과 승객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저마다 엉뚱한 방향을 응시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아마도 지금 그들의 머릿속에선 격렬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역시 우리 선장은 굉장해. 수 킬로미터 바깥에 있는 사람들까지 죄다 환각에 빠트리다니…….”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빨리 따라오기나 해! 타겟은 갑판 아래에 있을 거야.”
갑판 아래로 내려간 그들은 배 이곳저곳을 수색해 나갔다. 무기 보관실, 그리고 주방과 식량 저장고 등을 뒤진 후 마지막에 향한 곳은 객실이었다.
누군가가 아직 배 안에 남아 있다면 이제 이곳뿐. 사내들은 상대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입구를 둥글게 에워싼 다음, 문고리를 비틀어 열었다.
“저기 있다.”
침대 옆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은 백발의 여성. 환각에 걸렸는지 그녀의 눈빛도 갑판 위의 이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손쉽게 목표를 확보한 그들은 여자를 어깨 위에 들쳐 메고 방을 나서 갑판 위로 이동했다.
“그런데 선장님이 왜 이 여자를 원하시는 거야?”
“난들 아냐? 얼핏 듣자하니 무슨 상인의 딸이라는 것 같은데…… 정 궁금하면 직접 가서 물어보던가.”
갑판 위로 나온 사내들 중 리더격인 남자 하나가 나머지 이들에게 조각배를 준비시켰다.
일행이 모두 빠져나오기만 하면 스컬쉽이 함포 사격으로 이 배를 갈아 버릴 것이다.
“잠깐 기다려 봐. 간만의 기회인데 우리도 한 몫 단단히 챙겨야지 않겠어?”
사내 하나가 손을 들어 다른 승객들을 가리켰다. 보통 무기를 든 선원들과 다르게, 몇몇 승객들은 척 보기에도 범상찮은 장비들을 두르고 있었다.
괜찮은 수준의 무기나 장비들만 떼어다 팔아먹으면 제법 괜찮은 용돈 벌이가 될 것이다.
여성을 어깨에 얹은 남자가 한숨을 푹 쉬었다. 어차피 안 된다고 해 봤자 불만만 쌓이고 득 될 것이 없어 보였다.
“……용건이 있으면 빨리 해라.”
“흐흐…… 좋아.”
신이 난 사내가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재빨리 무기들을 챙기고 다니는 사이, 멍하니 서 있던 스테치의 손아귀에서 푸른빛의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