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얼어붙은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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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얼어붙은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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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얼어붙은 땅
2022.01.02.
“왕자님, 안 됩니다!”
근위대장이 필사적으로 막아섰지만, 분노로 눈이 뒤집힌 알프레드의 발길을 붙잡기엔 역부족이었다. 도리어 그는 자신을 쫓아오는 근위대장을 돌아보더니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자네도 끈질기군! 왕자인 내가 이 성 어딜 가든 문제될 건 뭐란 말인가?”
“하, 하지만…….”
첫째 왕자인 랍토레스로부터 방문자를 전부 물리라는 명령이 있었다…… 라는 이야기를 지금 이 자리에서 꺼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이 무슨 선택을 하든 추후 곤란해지긴 마찬가지일 터. 결국 근위대장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그 자리에 멈춰 섰고, 알프레드는 콧방귀를 뀌며 성큼성큼 어딘가로 향했다.
쾅!
문을 거의 박살 낼 기세로 열어젖힌 알프레드는 태연하게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랍토레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아하게 차까지 홀짝이는, 너무나도 작위적인 태도에 순간적으로 하마터면 쌍욕이 터져 나올 뻔했다.
“무슨 일이길래 그리 심각하게 구는 거냐?”
“어떻게 하신 겁니까?”
거두절미하고 바로 질문을 날리는 알프레드. 랍토레스는 읽던 책을 덮더니 말했다.
“말을 명확하게 해 주지 않는다면 나도 뭐라 답변해 줄 수 없단다.”
“감비니 요새에서 벌어질 사고를 미리 예측한 것도 모자라서, 본디 동쪽에 있어야 할 맥도웰 후작까지 지원 병력으로서 보낸다? 왕도에서 요새까지의 거리를 감안하면 결코 우연은 아니지요. 대체 그 정보를 누구에게서 들으셨냐는 말입니다.”
베네지아 왕국이 다른 남부연합국에 비하여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기까지는 콘라드의 노력이 결코 적지 않았다.
그의 아티팩트, ‘테이레시아스’에는 미래를 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이 아티팩트에는 단순한 미래 예언과 궤를 달리 하게 만드는 특별한 요소가 숨겨져 있었는데, 바로 미래를 선별해서 보여 준다는 점이었다.
테이레시아스가 보여 주는 미래는 운명이 크게 비틀리는 순간이다. 정해진 인과가 순리대로 발생하지 않고 뒤바뀌는 지점. 단순히 말하자면, 무언가 중요한 일이 벌어지는 미래의 어느 때를 보여 주는 것이다. 한정적이긴 해도 미래를 아는 한 베네지아가 부강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문제는 볼 수 있는 미래가 단편적인 부분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
해당 순간에 개입했을 때의 결과가 어떻게 이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며, 미래시의 내용을 잘못 해석할 경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있었다. 때문에 혼란 방지를 목적으로 현왕과 알프레드를 제외하곤 테이레시아스의 내용을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콘라드의 예시를 멋대로 감청하고, 함부로 병력을 동원하시다뇨? 형님의 행동이 얼마나 많은 위험을 초래했는지 알고나 계십니까?”
알프레드가 분노한 까닭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가 감비니 요새에서 벌어질 사태에 대해 예견 받은 날짜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5일 전. 그동안 예기치 못한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병력을 준비하는 한편, 그가 본 미래에 대한 해석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그런 노력을 너무나도 간단히 짓밟듯,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그의 형은 예시의 내용을 엿본 것도 모자라 독단으로 병사들을 운용하는 우를 저질렀다.
테이레시아스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정말로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짓거리였다.
“진정해. 결국은 내 결정이 옳았잖냐? 오히려 내가 그토록 빨리 움직이지 않았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누가 알겠어?”
랍토레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얼굴은 비록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헤실헤실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도 내심 자신의 섣부른 판단에 후회하는 중이었다.
고작 요새 하나를 탈환하는 데에 투입한 병력치고는 너무 과한가 싶었지만,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알게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가 가장 총애하는 부하는 눈을, 동생은 팔 한 짝을 잃어버렸다. 그나마 긍정적인 요소라면 요새를 비교적 말끔하게 되찾았다는 부분이지만, 앞서 말한 두 가지의 비중이 너무 컸다.
“뭐, 이쪽도 피해가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로 끝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지 않을까.”
랍토레스의 말에 알프레드는 황당하단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다행이라고요……?”
여하튼 이번 사건은 랍토레스에 대한 지지를 늘려 주는 꼴이 되었다. 그의 자칭 ‘빠르고 신속한 대응’은 북부 전선을 가까스로 유지시키는 데에 크게 공헌한 것으로 포장되었고, 신중을 기하려던 알프레드는 정작 중요한 순간에 결단을 못 내리는 사람으로 평가가 역전되어 버렸다.
“하아…….”
신경질이 난 알프레드는 들고 있던 지팡이로 연신 방바닥을 두들겨 댔다. 그래도 왕국 내적으로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가고 있었지만, 바깥에서는 온갖 문제가 연쇄적으로 속출하는 중이었기에 신경 써야 할 사안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장 큰 근심거리는 귀족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것이었다. 어중이떠중이 집단을 끌고 가 봤자, 베테랑 병사들이 잔뜩 주둔 중인 감비니 요새를 점령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누군가의 강력한 지원이 있다면 모를까. 때문에 알프레드는 쿠데타를 벌일 가능성이 높은 귀족들부터 차례로 수사하기에 이르렀고, 자연스럽게 이는 큰 반발을 일으켰다. 정적이나 요인 제거의 핑계거리 아니냐는 말도 들을 정도였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요새에 대한 소식이 벌써부터 남부연합국들의 귀로 들어가면서 은근슬쩍 국정에 끼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감비니 요새의 탈취는 베네지아 왕국의 방어능력을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이제껏 거둬들인 전선 지원금의 사용처를 묻는 불만 섞인 메시지들도 잇따랐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신경 쓰이는 건…….’
대체 랍토레스는 무슨 방법을 써서 콘라드의 예시를 훔쳐본 걸까? 그걸 모르는 이상, 이후 알프레드가 보고 듣게 될 모든 정보들은 랍토레스 쪽으로 새어 나갈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볼일 없으면 이만 나가 줘. 난 지금 좀 바빠서.”
랍토레스가 본인 입으로 밝히지 않는 한은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방문 쪽을 향해 손을 흔들어 대는 랍토레스를 한 번 흘겨본 뒤, 알프레드는 천천히 왔던 길을 되돌아 방을 나섰다.
* * *
푸른 수평선 너머로 크로마토스 제국의 항구 도시 ‘미르’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동안, 하늘에서는 새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미처 두꺼운 옷을 준비하지 못한 몇몇 이들은 따뜻한 남부와는 180도 달라진 날씨 때문에 생각지도 못한 추위를 겪느라 덜덜 떨고 있었다.
승객들이 매번 똑같은 문제로 고생하는 걸 봐온 탓인지, 선원들은 어딘가에서 미리 꺼내 둔 외투를 하나씩 나눠주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외투를 걸친 엘레나는 털로 된 포근한 옷깃에 얼굴을 파묻고는 눈을 꼭 감았다. 그게 어쩐지 귀여워서 곁눈질로 쳐다보던 스테치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와 버렸구나…….’
입김이 보일 정도로 차가워진 공기. 스테치는 자신이 정말 북부에 와 있음을 새삼 다시금 체감하게 되었다.
그레이 스컬쉽의 추격을 완전히 뿌리친 지 일주일.
환상을 사용한 초기 제압에 실패한 스컬쉽은 그 명성이 무색하게도 허무하게 찰리를 놓치고 말았다.
이후 이어지는 마력 폭풍도 무사히 넘기고,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 즈음엔 아퀸의 습격마저 완전히 사라져 생각보다 안전한 항해를 지속할 수 있었다.
“잠깐 이쪽으로 와 봐라. 그리고 거기 너도 같이.”
승객들이 멀리에서 보이기 시작한 항구를 살피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뻐끔거리며 담배를 태우던 클라우디아가 스테치와 엘레나에게 남몰래 손짓했다.
두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순순히 그녀에게 걸어갔다.
“항구에 도착하기 전에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불렀다.”
클라우디아가 말했다.
“고마워. 이 배에 탄 모두가 무사히 여기까지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다 네 덕분이야. 자칫 잘못했다간 두 눈 멀쩡히 뜨고 죽을 뻔했어.”
“납치가 실패했으니 같은 배를 또 덮치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당분간은 몸을 사리시는 편이 좋겠어요.”
스테치의 말에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레이 스컬쉽의 진실이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탄로 나지 않았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자면 그들이 사용하는 아티팩트의 환상 능력이 매우 강력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데 하필 이번엔 스테치라는 치명적인 변수가 작용하여 그 허실이 들통 나고 말았으니, 앞으로 녀석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클라우디아는 담뱃대를 입에 물고선 품 안을 잠시 뒤적이더니, 쪽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게 뭐죠?”
“이번 일에 대한 보답. 난 평소에 일이 많이 들어와서 눈 돌아가게 바쁘거든. 하지만 그 쪽지에 적힌 개인 연락책을 써서 하고 싶은 말을 남겨 놓으면 그 어느 메시지보다도 가장 먼저 확인하게 될 거야. 네가 원하는 물건이나 사람이 있다면 단 한 번, 하던 일도 때려치우고 즉시 옮겨다 주마.”
그 멀고 먼 남북을 오가며 귀중한 물자나 사람들을 옮겨다 주는 만큼, 원래대로라면 어마어마한 운송대행료를 지불해야 했다. 그런 걸 무상으로 해 준다니 이 얼마나 귀한 기회인가. 스테치는 조심스레 쪽지를 받아 배낭 한편에 집어넣었다.
잠시 후, 배는 항구에서 가장 으슥한 구석에 정박했다. 인식 장애 필드 덕분에 어느 누구도 그들을 볼 수 없었지만, 사람들로 득시글한 곳에 밀항선이 당당하게 들어선다는 사실은 묘한 괴리감을 불러일으켰다.
“들킬 걱정 하실 필요 없이 순서대로 배에서 내리시면 됩니다. 경비병이 말을 걸면 미리 나눠 드린 신분증을 제시해 주세요.”
선원의 인도에 따라 차례대로 나서는 승객들. 용병들은 스테치에게 손을 흔들면서 배를 내려가더니, 이윽고 항구를 바삐 오가는 인파에 뒤섞여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나타난 그들을 의심스럽게 여기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스테치와 엘레나는 선장과 선원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느라 배에서 가장 늦게 내렸다.
이미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갈 길을 갔는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우리도 슬슬 가볼까…… 엘레나?”
늦어지는 대답에 스테치가 뒤를 돌아보니, 엘레나는 항구에 가득 들어찬 사람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드워프, 인간, 엘프들이 각자 맡은 일을 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인종차별이 심각한 남부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북부만의 일면. 엘프인 엘레나의 입장에서는 이것만큼 신기하고도 놀라운 광경은 따로 없었으리라.
“…….”
엘레나의 얼굴을 뒤덮고 있던 페이스 페인팅이 순간 사라질 것처럼 일렁거렸지만, 섣부른 행동이라 판단했는지 결국은 그대로 유지시켰다.
“언젠가는 남부도 이렇게 되면 좋겠네요.”
“……응.”
스테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뱃길 내내 북부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즐거워하던 이유는 아마 제국의 이런 비차별정책을 동경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디로 갈 거죠?”
“일단은 숙소부터 잡자. 이 주변에서 가능한 모든 지리 정보를 모은 다음…….”
그때, 설명을 듣고 있던 엘레나의 뒤에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고 끼어들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제삼자의 난입에 스테치가 깜짝 놀라서 자세히 보니 카시아와 그녀를 수행하는 남자였다.
이미 어디론가 갔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잠깐 저 좀 따라와 주실래요?”
입을 채 열기도 전에 카시아가 먼저 말을 걸어왔고, 스테치가 되물었다.
“어디로?”
“제 집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