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배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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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3.
카시아로부터 뜬금없는 초대를 받았을 때, 이유를 묻는 스테치에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너무 뻔하지 않나요? 설마 제가 목숨을 구해 준 은인에게 아무런 보답도 하지 않고 내팽개쳐 둘 구두쇠로 보이셨나요?”
딱히 거절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엘레나와 함께 카시아의 집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그렇게 알지도 못하는 어딘가로 내달린 지 벌써 한 시간째. 길어지는 이동 시간에 좀이 쑤신 스테치는 마차의 창 바깥을 내다보았을 때, 새하얀 눈발이 그를 반겨주었다.
저 멀리의 산과 숲, 그리고 넓은 평야까지도 하얗게 뒤덮은 눈은 스테치가 일평생 봐온 눈보다도 훨씬 많았다.
남부에 있을 땐 상상도 못 했을 광경에 스테치뿐만 아니라 엘레나도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맞은편 좌석에 앉아 두 사람의 반응을 흥미롭게 구경하던 카시아는, 오랜 침묵을 깨고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실례지만 두 사람은 무엇 때문에 북부까지 오시게 된 건지 여쭤 봐도 될까요.”
이걸 대체 뭐라고 해야 하나? 남부에서 왕자 멱을 따려다 실패하고 도망치듯 빠져 나왔습니다? 갑작스런 질문에 주저하던 스테치는 한참 고민한 뒤에서야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남부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졌을 뿐이고…… 그 이상은 딱히 말하고 싶지 않아.”
남부에서 북부, 혹은 북부에서 남부로 밀항을 하는 데에는 엄청난 뱃삯을 치러야 한다.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오갈 수 있는 곳이 아닌 걸 상대도 아는 이상, 어설프게 대답해서 의심받을 바에야 적당히 이 정도로 얼버무리는 편이 나았다.
심중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스테치를 쳐다보던 카시아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뭐, 상관없어요.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까.”
엘레나도 더 이상 옆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무시하기 힘들었는지, 바깥 구경을 그만두고 카시아를 돌아보았다.
“보통 밀항선을 타고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북부에 아무런 기반도 다져지지 않은 상태에서 새 출발을 시작하죠. 그쪽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틀렸나요?”
스테치는 부정하지 않았다. 던전에 들어갈 때마다 틈나는 대로 주워 둔 금과 보석도 제라드와의 일전을 치르기 전에 거의 다 써 버린 상태. 여유자금으로 조금 남겨 둔 것을 제외하면 땡전 한 푼도 없는 상황이긴 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부터 두 분이 북부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으실 수 있도록, 이동 수단과 주거지, 그리고 금전 등 제가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원해드리겠습니다.”
“에?!”
정작 그 제안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란 것은 스테치가 아닌 엘레나였다. 수행원과 나눈 대화의 내용이나, 납치까지 당할 뻔했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미 상대가 평범한 일반인이 아니라는 것쯤은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감안해도 보답의 수준이 엄청나긴 했다.
그 순간, 하얀 언덕 너머로 거대한 저택 하나가 나타났다.
높은 담과 쇠창살로 둘러쳐진 그것은 이국적인 정취가 느껴지는 양식으로 지어져 있었는데, 여태까지 스테치가 봐온 그 어떤 건축물보다 더한 화려함과 웅장함을 자랑했다.
눈으로 뒤덮인 저택의 외견에 그는 난생처음으로 아름답다는 감상을 떠올렸다. 아마 남부에서도 저 정도 저택을 소유한 귀족은 드물지 않을까. 넋을 잃은 스테치에게 싱긋 웃어 보인 카시아가 말했다.
“많이 늦기는 했지만, 정식으로 자기소개를 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카시아 하덴브록. 북부에서 가장 잘나가는 대 상인 가문의 후계자입니다.”
* * *
스테치와 엘레나는 카시아와 수행원의 뒤를 따라 마차에서 내려 저택으로 들어갔다.
미리 대기 중이던 사용인들이 마차의 말고삐를 넘겨받았고, 카시아와 나머지 사람들의 외투를 받아갔다.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대우에 당황한 스테치와 엘레나가 뻣뻣하게 굳어 있자, 보다 못한 카시아가 손을 흔들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문을 열어젖힌 접견실의 문 안에서 따뜻한 공기가 부드럽게 스테치를 감싸 안았다.
벽난로의 불을 통해 퍼지는 열기에 기분 좋은 후끈함이 느껴졌다. 카시아가 권한 소파에 앉은 스테치는 몸이 푹 들어갈 정도의 쿠션감에 깜짝 놀랐다.
카시아는 안락함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스테치에게 쓴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편안해 보여서 다행이네요.”
아차. 스테치는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후다닥 자세를 바로잡았다. 반면 그와는 달리 카시아의 제안을 들은 이후로 내내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던 엘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하덴브록 씨?”
그러자 배에서 내린 이후로 줄곧 진지한 분위기를 내뿜던 카시아는 깔깔거리며 웃어 재꼈다.
“귀족도 아닌데 왜 그렇게 어려워해요? 그냥 배에 있을 때처럼 이뻐해 주시면 되는데.”
그제야 안심한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고, 부드럽게 미소 지은 카시아에게 스테치가 물었다.
“카시아,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
“뭐죠?”
“제안해 준 내용에 대해서는 잘 알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한 시간이나 걸리는 저택까지 굳이 우릴 데려온 이유가 뭔지 모르겠는데…… 혹시 뭔가 다른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거 아냐?”
단순히 식사 대접을 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왠지 그게 다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스테치의 말을 들은 카시아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뭔가 잘못 말했나 싶어 당황해하는 그에게 그녀가 말했다.
“스컬쉽에 돌아가지 못하고 남았던 그 선원, 기억하세요?”
“응.”
카시아의 납치조를 리드하던 사내.
메멘토 모템의 능력까지 써서 기억을 읽어 봤지만, 납치의 목적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를 포함한 스컬쉽의 선원 대부분은 선장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른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아무래도 환상을 써서 선원들의 기억을 조작한 것처럼 보였다.
결국 아무 쓸모도 없다고 판단된 사내는 목이 베여 바다로 떨어졌다.
“기억을 읽어 봤지만 널 납치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만 남아 있을 뿐이었고, 그걸 지시한 자의 정체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아 내지 못했었지.”
“네. 제 호위 역을 맡았던 말콤도 직접 신문해 보았지만 결과는 똑같았죠. 하지만 이걸 보세요.”
카시아는 품 안에 넣어 둔 물건을 꺼내 스테치에게 내밀었다. 천인지 붕대인지 모를 무언가로 감싸인 그것을 풀어 보니, 독특한 디자인의 단검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카시아가 말했다.
“그 단검은 제가 북부를 떠나기 며칠 전, 절 습격해 온 산적들을 격퇴하면서 발견한 물건이에요.”
단검의 재질이나 마무리 솜씨를 봤을 때, 고작 일개 산적들의 소지품으로 나왔다기엔 지나치게 뛰어난 품질이었다. 노획물인가?
“단검을 찾아내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그들이 단순한 노상강도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카시아는 상체를 구부려 스테치에게 팔을 뻗어 단검의 자루 밑바닥을 가리켰다.
그녀가 짚어 준 부분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스테치는 곧 읽을 수 없는 글자로 된 문자열을 찾아냈다.
남이 알려 주지 않았더라면 찾아내기 힘들 정도로 교묘하게 감춰져 있었다.
“그 문자열은 드워프 왕국 사일라스의 공방에서 한정판 제품에만 찍어 주는 일련번호에요. 원 소유자의 이름, 생산 일자, 식별 넘버. 그 외에도 많은 정보들이 그 짧은 문구 안에 전부 담겨 있죠. 사일라스의 드워프들은 그만큼 자신들의 작품에 대한 자부심이 꽤…… 강하거든요.”
카시아는 코웃음 쳤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 일련번호에 적힌 원 소유자의 이름이에요.”
“누군데?”
“어거스틴 리버우드…… 저희 가문처럼 자수성가한 대상인이에요. 그리고 제 아빠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비즈니스 파트너이기도 하셨고요. 불행하게도 제가 제국에서 떠나기 바로 며칠 전에 산적들의 습격을 받고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제 수행원인 말콤이 산적들에게 단검의 출처를 추궁했고, 그들 중 하나가 어거스틴 씨를 죽인 뒤 기념품으로 단검을 몰래 빼돌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쪽은 저와 달리 납치가 아니라 처음부터 살해 명령을 받고 움직였다고 하더군요. 그 말은 즉, 납치와 살해에 대한 것 모두 우발적 범행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성을 띠고 있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그들의 타겟은 하나같이 저희 하덴브록 가문의 소속원인 저나, 가문의 오랜 벗이었던 어거스틴 씨였죠.”
스테치에게 설명하던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이건 육상과 해상을 가리지 않고 저희 가문을 향해 퍼붓는 공격입니다. 저는 누군가가 스컬쉽 일당과 산적들에게 이 모든 일들을 사주했다고 생각해요.”
스테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연…… 일 가능성은 없을까? 미안하지만, 너와 그 어거스틴이라는 사람을 습격한 집단이 너희 가문을 압박하기 위한 목적으로 움직였다고 보기엔 연결고리가 너무 미약해. 굳이 배후가 있다고 생각하는 근거가 뭐야?”
그러자 카시아는 함부로 입 밖에 내놓기 힘든 이야기가 있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저희 가문은…… 북부와 남부간의 무역을 본격적으로 재활성화 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어요.”
스테치가 깜짝 놀라 물었다.
“뭐? 그게 가능해?”
까마득히 머나먼 옛날. 대륙을 남과 북으로 양분할 정도로 거대한 마력 폭풍이 형성되었다. 어느 누구도 왜 그런 현상이 벌어졌는지는 모른다. 안타깝게도,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레 단절된 남북은 육상 루트 이외에는 교류할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기술이 발달하고 안전한 해상 루트가 발견될 적엔, 이미 두 지역 간의 이념과 사상이 크게 틀어진 상태였다.
비인간종에 대한 차별적 정책의 유무가 그 대표적인 예시였다. 때마침 북부 제국과 남부 연합을 둘러싼 기류가 미묘해지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시점이였다.
“어렵지만 불가능하진 않아요. 제국도, 남부의 왕국도 밀수가 성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전부터 눈치채고 있었으니까요. 다만 그걸 제지하지 않은 것은 사상의 차이를 접어두고서라도 그 이익이 컸기 때문이죠. 이렇듯 이미 물 밑에서는 밀수란 형태로 교류가 이어지고 있었으니, 남은 것은 그걸 수면 위로 건져 올리기만 하면 끝나는 문제였어요.”
카시아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이 일을 위해 북부에서 가장 큰 상인 몇몇이 비밀리에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아빠가 이를 이끌고, 어거스틴 씨와 몇몇 사람들이 이를 전폭 지원했죠. 저는 가문의 대리자로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남부로 내려가 상인들과 계약과 협의를 체결했습니다.”
북부 출신인 카시아가 남부에서 북부로 올라가는 배에 타고 있었던 이유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이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 씨는 본격적으로 작업에 착수하고 고작 며칠 뒤에 살해당하셨어요. 그리고 저는 그걸 돕는 과정에서 납치당할 뻔했고요. 슬슬 무언가 보이시나요?”
스테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단순히 우연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하덴브록 가문과 어거스틴이 본격적으로 움직이자마자 일이 산발적으로 터지기 시작했다는 건 너무나도 노골적이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그런데 카시아의 이동 루트를 정확히 파악하고 납치를 시도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계획에 참여한 사람 중에 배신자가 있다는 말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