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노벨리아 리버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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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노벨리아 리버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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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노벨리아 리버펠
2022.01.04.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누군가가 일부러 정보를 흘리고 있지 않은 이상, 일개 산적이나 해적이 하덴브록 가문과 어거스틴의 루틴을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카시아가 주장하는 ‘숨은 배신자’가설에 더더욱 힘이 실리게 되는 것이다.
“……이제 보니 네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처음부터 보답이니 뭐니 하는 게 아니었어. 그렇지?”
눈을 감고 묵묵히 카시아의 말을 경청하던 스테치가 입을 열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을 겪게 만든 것에 대해 상당히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부탁드립니다.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밝혀 주세요.”
카시아가 지금까지 스테치와 엘레나라는 외부인에게 가문의 민감한 비밀까지 털어놓아 가며 긴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바로 이것을 위해서였다.
스테치가 아무런 대답도 없이 팔짱만 끼고 있자, 그녀는 그것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덧붙여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받아들이지 않으셔도 저의 제안은 항상 유효합니다. 이 부탁은 그것과는 별개로, 그러니까 일종의 의뢰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네요.”
카시아의 말을 들은 스테치가 물었다.
“왜 하필 그런 걸 우리에게 부탁하는 거지? 우린 너와 배에서 마주쳤던 것 이외에는 별다른 접점도 없고, 북부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이 전혀 없어. 가문의 중대사를 맡길 상대로는 그야말로 최악 아닌가?”
그러자 카시아는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제가 구태여 두 분을 지정한 이유가 바로 그거에요.”
무슨 소리지? 스테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카시아가 그의 의문에 답해 주었다.
“일련의 사고들을 일으킨 주동자가 누군지는 아무도 몰라요. 제가 누군가를 시켜서 조사를 부탁해도, 머지않아 상대측에서 금방 눈치채겠죠. 그래선 의미가 없어요.”
스스로 한 말을 되짚어 보던 스테치는 그제야 그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카시아의 납치를 주도한 자의 당초 계획은 카시아를 납치하여 남북 무역의 재개를 방해하는 것이었으리라. 지금쯤 배후자는 카시아가 납치되었을 거라 착각하고 있을 터. 하지만 스테치라는 예상외의 존재가 끼어드는 바람에 모든 일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상대의 시점에서 스테치는 카시아와 일면식도 없는 완전한 제삼자.
카시아의 생환 소식이 퍼진 이후에도 배후자의 감시망에 걸리지 않으면서, 누구보다도 안전하게 조사를 진행할 수 있는 사람은 스테치와 엘레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릴 이 먼 곳까지 데려온 거였어?”
“항구에 서서 백날 떠들어 봤자 제발 나 잡아 잡숴~ 하는 꼴이잖아요.”
카시아가 싱긋 웃었다.
“하덴브록 가문의 계획에 동참한 대상인은 어거스틴 리버우드 씨를 제외하고 두 명이에요. 두 분은 이들의 뒷조사를 해 주셨으면 해요. 거기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지원해드리도록 하죠. 물론 거기에 대한 보상도 지급하겠습니다.”
스테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와 엘레나의 궁극적인 목표는 던전을 돌아 힘을 키우기 위함이지, 남을 돕느라 시간 낭비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설령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그녀는 그 뜻을 존중해 줄 테고, 지원해 주겠다는 약속도 물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매몰차게 다 때려치우고 무시하기는 좀…….
스테치가 문득 엘레나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그녀는 마침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는 표정으로 카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지 않겠어?』
내내 침묵을 고수하던 메멘토 모템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네 목적은 북부 여기저기에 널린 던전들의 아티팩트를 모으는 거잖아. 저 여자가 말한 대상인들의 뒤를 캐려면 어차피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할 텐데, 지원도 받아가면서 하고 싶었던 일도 하면 서로에게 윈-윈 아냐?』
‘뭐…… 그렇긴 하지.’
일행 중 가장 깐깐한 녀석마저 괜찮다고 말하니, 더 이상 거부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스테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우리가 할게. 안 그래도 우리 둘은 북부에서도 돌아다닐 일이 많을 테니까, 하는 김에 겸사겸사 그쪽 문제도 함께 처리하면 되겠지.”
“저, 정말요?”
기나긴 설득을 위해 꺼낼 말을 준비하고 있던 카시아는, 스테치가 생각 이상으로 간단하게 수락해 버리자 맥이 빠졌는지 축 늘어졌다. 형편 좋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스테치가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더라면 일이 무척 곤란하게 돌아갔을 것이다.
엘레나는 그런 그의 결정에 기뻐하며 스테치의 어깨를 탁탁 두들겼다.
“아…… 긴장돼서 죽는 줄 알았네…….”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안도하는 카시아의 뒤에서,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말콤이 그녀를 다독였다.
“잘 됐군요, 아씨. 정말 다행입니다.”
“응…….”
카시아의 힘없는 대답에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말콤. 그런 그를 보고 있던 스테치는 문득 궁금해진 나머지 직접 말을 걸어 질문했다.
“그쪽은 내가 이런 중요한 일을 맡아서 한다고 나서는데 걱정 안 되나?”
“당신은 이미 아씨의 눈앞에서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아씨가 믿고 맡기기로 결정했다면 저도 그 의견에 무조건 따를 뿐입니다.”
말콤은 스테치와 처음 대면했을 때의 태도가 상상조차 가지 않을 만큼 공손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환상에 빠져 카시아를 지키지 못했을 때 스테치가 대신 구해 주었던 부분이 내심 고마웠던 모양이다.
“구차한 이야기는 그만해 둬. 브라이언 씨가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으니까, 이제는 내가 내 몫을 다 할 차례야. 두 분을 지하실로 안내해드려.”
카시아의 말을 들은 말콤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모두. 잠시만 일어나 주시겠습니까? 보여드리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스테치와 엘레나는 어리둥절해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말콤의 뒤를 따라갔다.
저택의 가장 으슥한 구석까지 이동한 세 사람은 지하로 내려가는 조그마한 계단에 다다랐는데, 따뜻한 지상과는 달리 지하실은 입구에서부터 서늘한 공기가 밀려 나오고 있었다.
말콤이 지하실의 스위치를 넣자, 어두운 공간 속으로 순식간에 밝은 빛이 들어왔다.
“……우와.”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스테치는 물론이고, 뒤따라온 엘레나까지 감탄사를 절로 뱉어 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벽면을 따라 길게 늘어진 수십 개의 거치대 위에는 번쩍이는 금속 갑옷과 방패, 무기 따위가 걸려 있었다.
고급스런 저택에 두기엔 부담스러울 정도의 거대한 도끼나 망치부터, 실용성이 의심되는 두터운 갑주에 이르기까지 온갖 장비들로 그득했다.
남부 출신인 스테치의 눈에는 북부만의 독특하고 이색적인 디자인에 심취하여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엘레나는 자신이 쓰기 어려울 법한 갑옷이나 대형 무기보다는 비교적 가벼운 레이피어나 활에 흥미를 보였다.
“엄청나게 많네.”
뒤늦게 지하실에 들어선 카시아는 두 사람의 반응에 만족했는지 기분 좋게 말했다.
“판매하기 위해서 지하실에 보관 중이던 것들이에요. 마음에 드시는 게 있으면 마음대로 가져가세요. 본가가 여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게 아쉽네요. 그쪽엔 훨씬 더 좋은 물건이 많이 있는데…….”
이 저택만 해도 충분히 큰데 본가가 아니라고? 스테치는 새삼스레 카시아의 재력에 놀라워하며 벽에 걸린 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집에 보관된 무기의 태반은 인간이 아닌 드워프가 제작한 상등품이었다.
휭-!
인간이 만든 검과는 다르게, 드워프제 검은 더 무거운 합금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밸런스를 잘 잡아놓아서 휘두르는 맛이 좋았다. 안 그래도 페네트레이터가 박살 난 덕분에 적당한 무장의 필요성을 체감하던 참이었다.
“됐다, 이 정도면 충분한 거 같아.”
적당히 그립감이 좋은 검을 챙긴 스테치는 카시아에게 이끌려 다시 지상으로 올라갔다.
접견실을 지나 식당으로 들어가자 막 만들어져 온 따뜻한 요리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배에서 내린 이후로 처음 보는 음식이었다.
사용인들의 안내에 따라 의자에 앉은 그들이 머뭇거리자, 카시아가 말을 걸었다.
“드세요. 배도 고프실 텐데, 나머지 이야기는 먹으면서 합시다.”
말린 고기나 희멀건 국물, 씹기도 힘든 딱딱한 빵만 먹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간만에 먹는 부드럽고 진한 맛의 요리에 스테치는 거의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음식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잠시 동안 말없이 이어지는 식사 시간. 정신없이 구운 감자와 생선찜을 먹어치운 스테치는 배가 터질 지경이 되어서야 손을 멈췄다. 너무 추하게 굴었나 싶어 다른 사람들을 살폈지만, 누구도 그의 모습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음…….”
스테치가 카시아에게 물었다.
“네가 우리에게 맡기기로 한 일 말인데, 혹시 정해진 기한이 있나?”
“제가 부탁한 게 해결하기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배후자가 언제 어디서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니…….”
딱히 기간을 특정하기 애매한 듯, 카시아는 말끝을 흐렸다. 일의 난이도를 감안하면 충분히 시간을 들여도 좋다고 말했겠지만, 마냥 느긋하게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 스테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준 뒤 말했다.
“알아들었어. 일정에 지장이 가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빨리 해결해 보도록 할게.”
카시아의 손짓에 다른 사용인들이 빈 그릇과 접시 등을 치우고 다른 물건들을 올려놓았다.
그중 하나는 대륙 북부의 지형이 세밀하게 그려진 커다란 지도였다. 스테치가 엘레나도 잘 볼 수 있도록 지도를 펼쳐 보이자, 엘레나는 손가락 끝으로 지도를 훑으며 말했다.
“이것 보세요.”
지도에 그려진 북부 대륙의 20~30% 정도는 사람이 이용할 수 없는 혹한의 땅이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남부에 비하면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이 거대한 땅은 주변 국가에 의해 4등분이 되어 있었는데, 북부의 서쪽과 남쪽을 포함해 절반 가까이 되는 넓이를 차지하고 있는 크로마토스 제국이 단연 으뜸이었다.
그다음으로 큰 곳은 서쪽에 위치한 사일라스. 드워프들이 모여서 만들어 낸 그들만의 왕국으로, 마법과 기계 공학이 가미된 온갖 신기한 물건들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세 번째 왕국은 지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케일럼이라는 곳이었다. 이쪽은 사일라스처럼 엘프들만 모여 사는 왕국이라고 한다. 인접국에게 여러 무구와 장치를 팔며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사일라스와는 달리, 이쪽은 북부 전체에 식량을 공급하는 곳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세 왕국의 중심에 자리 잡은 작은 공국, 라켄.
“씁.”
스테치는 혀를 찼다. 북부가 남부보다 크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지도로 보니까 도저히 걸어 다닐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의 사이즈였다.
카시아가 탈 것을 제공해 주겠다고 처음 이야기를 꺼낸 것도 다 이것 때문이 아닐까.
다행히도 지도에는 온갖 크고 작은 던전들의 위치가 빼곡하게 표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좋아. 혹시 충고라던가, 해 줄 말은 없어?”
수첩을 꺼내든 카시아는 빠르게 무언가를 끄적이더니, 해당 페이지를 찢어 스테치에게 넘겨주었다. 거기에 적힌 것은 카시아의 가문을 노리고 있다고 의심되는 용의자의 이름이었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전부 둘이지만, 그중에서 가장 먼저 조사해 줬으면 하는 사람은 바로 이 노벨리아 리버펠입니다.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그의 상회가 있으니, 그쪽을 통해서 접근해 보는 편이 좋을 거예요.”
카시아가 말했다.
“오늘은 저희 저택에서 쉬시고, 내일 출발하시면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