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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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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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환심
2022.01.06.
절그럭 절그럭.
서리 낀 사슬들이 맞부딪히면서 일으키는 금속음이 귓가를 연신 울리자, 스테치는 신경질을 내면서 귓구멍을 후벼 댔다. 아무리 별것 아닌 소리라도 수 시간이 넘게 듣고 있으면 짜증이 나는 법이다.
지난밤 내렸던 눈이 드문드문 쌓인 언덕을 넘어, 이제는 하얗게 물든 길을 지나가는 마차의 행렬. 스테치는 엘레나가 걸친 두꺼운 가죽 외투를 보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클라우디아의 선원들이 준 외투가 없었더라면 북부의 냉기에 압도되어 진작 얼어붙었을 것이다.
“거기, 노닥거리지 마! 제 발로 걸어왔으면 일을 해야 될 거 아냐!”
바로 앞, 그러니까 최선두의 마차에 탄 늙은이의 호통이 뒤쪽의 스테치에게까지 들려왔다.
물론 그 말은 마차의 스테치를 포함한 일곱 명의 호위 역 전원에게 하는 소리였다. 어쩐지 이 늙은이는 짠돌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사람을 거슬리게 만드는 면모가 있었다.
“그닥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죠, 역시?”
마부석에 같이 타고 있던 젊은 남성이 스테치에게 말을 걸었다.
함께 호위를 맡은 이 남자의 이름은 클로젯. 스테치보다 한두 살 정도 어리긴 했지만 그래도 젊은 나이에 B급을 달성한 나름의 실력자였다.
다른 사람들의 연령대가 비교적 높아서 어울리기 힘들었는지, 그는 스테치가 합류한 이후로 찰떡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저 정도면 양반인데 뭐 어때.”
스테치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쥐꼬리만도 안 되는 용병들의 급여를 까기 위해 주둥이를 털어 대는 의뢰주들과 비교하면, 저 늙은이의 꼬장 정도야 새발의 피였다.
“그나저나 A급이라면서요? 대체 뭘 해야 길드에서 그런 등급을 줍니까?”
클로젯의 질문이 떨어지는 순간, 옆에서 따라오던 몇몇 사람들의 귀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라이센스의 등급은 당사자가 해온 의뢰의 난이도, 달성률, 고객 만족도 등등 다양한 지표를 종합하여 길드가 자체적으로 부여한다.
분명 클로젯은 스테치가 무슨 F급 시절부터 A급 의뢰를 여럿 해치운 괴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남들보다 배는 열심히 뛰고, 본인의 스킬을 수시로 갈고 닦아. 어쭙잖은 실력으로 무모한 일에 뛰어들지 말고, 항상 자기 목숨을 아껴서 다음 기회를 노려. 그럼 언젠가는 A급이 될 거야.”
스테치의 담담한 말에 클로젯은 입을 헤 벌리며 생각에 잠겼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들릴락 말락 하게 투덜거리며 스테치로부터 멀어졌다. 하긴, 남들이 들으면 뜬구름 잡는 말이라고 비웃을 소리다.
스스로의 말을 곱씹던 스테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알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 클로젯은 문득 몸이 뻐근해졌는지, 마부석에서 내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실 저도 좀 궁금하긴 했어요. 왜 굳이 이 일을 맡으신 건가요?”
둘만 남게 되자마자 엘레나가 얼른 스테치에게 물었다.
스테치가 길드 본부로 들어가서 의뢰를 하나 골라내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2분도 채 되지 않았다. 무언가 의도한 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카시아의 말에 의하면, 노벨리아 리버펠은 라켄 공국 근처에 상회를 두고 있어. 그런데 저 할아버지가 내걸었던 의뢰서를 보니까, 중간 경유 지점으로 노벨리아의 상회가 예정되어 있더라고.”
일개 행상인 주제에 대상인이 운영하는 상회의 본점으로, 그것도 미리 사전에 일정까지 짜서 직접 물건을 납품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큼 상회와 이번 의뢰주는 서로 오랜 시간 동안 신뢰 관계를 쌓아 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번 임무를 통해 좋은 인식을 심어 놓는다면, 상회와 접촉할 때 큰 이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어필을 무슨 수로 해내냐는 건데…….”
의뢰인이 부실하기 짝이 없는 호위역의 숫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출발한 이유는, 뒤집어 말하자면 이번 의뢰가 그만큼 위험하지 않다는 뜻. 스테치가 나설 만한 해프닝은 아예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잠시 후, 줄곧 생각에 잠겨 있던 스테치의 눈이 반짝였다.
* * *
휘이이이—.
“이런, 오늘 시계는 최악이군요. 고작 몇 미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니 원…….”
조금 전부터 희미하게나마 다시 내리기 시작한 눈발은 금세 거칠어지더니, 바로 옆에서 마주 걷던 클로젯의 목소리가 묻힐 정도로 휘몰아쳤다.
북부의 눈보라를 처음 겪어 보는 스테치는 이러다 마차가 멈추는 것은 아닌가 싶어 살짝 걱정됐지만, 마차의 바퀴와 그것을 끄는 말들도 멀쩡했다.
‘하지만 몰래 뭘 하기엔 딱 이 정도가 좋지.’
주변을 둘러본 스테치는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지금부터 무슨 일을 할지에 대해서 미리 얘기를 해 두었지만, 그래도 걱정되기는 매한가지인지 엘레나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의 행동을 쳐다보았다.
푹!
단검이 훑고 지나간 손가락 끝으로부터 방울방울 흘러나오는 새빨간 피.
상처가 크든 작든 간에 아픈 건 똑같은 법이라, 스테치는 자기도 모르게 눈썹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이 정도로 뭔가를 해 보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스테치는 차분히 주머니에서 풀 뭉치 하나를 꺼내 잘근잘근 씹었다.
상귀스의 풀, 통칭 ‘출혈초’. 회복 물약의 원료들 중 하나인 식물로, 즙을 내서 혈액과 섞으면 화학 반응을 일으키며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이때 뭐라 형언하기 힘든 달콤한 냄새와 혈향이 뒤섞여 풍기는데, 이것이 멀리 떨어진 몬스터를 유인하기에 적격이었다.
스테치는 씹던 풀을 뱉고 침을 손가락에 펴 바른 뒤, 마차 바깥으로 손을 내밀어 피를 떨어뜨렸다.
떨어진 핏방울이 새하얗고 차가운 눈을 붉게 물들이는 것을 본 스테치는, 한참이 지나서야 손을 거둬들였다. 차가운 설원의 냉기 때문에 상처 난 부위가 쓰라릴 지경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을 마부석에 앉아 느긋하게 기다리던 엘레나가 바늘에라도 찔린 듯 움찔거렸다.
스테치가 돌아보자, 추위에 질려 꼭 감고 있던 그녀의 두 눈이 어느 샌가 떠져 날카롭게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스테치 스스로도 무슨 몬스터를 유인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효과는 발군이었나 보다.
“왔습니다.”
“《애니멀 인스팅트》.”
그녀가 무언가를 감지했다면 되물어볼 필요도 없다. 스테치가 스킬을 발동시키고 귀를 기울여 보니, 미약하지만 코를 찌르는 냄새가 차가운 공기 틈새로 흘러왔다. 그가 기다려 온 상대가 드디어 미끼를 물고 걸려든 것이다.
“그래…… 아주 희미하게 악취가 나는데…… 거리는 대략 앞으로 150m 정도인가?”
“어떡할까요?”
“……지금 뭔가 해 봤자 의미가 없지. 일단은 남들이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오도록 놔두자.”
스테치의 말뜻을 알아들은 엘레나는 활을 꺼내려던 것을 멈추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뭘 하고 있는 거지?
걸어가던 클로젯은 왠지 모르게 갑자기 어수선한 분위기의 엘레나와 스테치를 쳐다보며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조용해진 두 사람의 모습에 흥미를 잃었다. 그러나 잠시 후, 선두 마차의 호위를 맡고 있던 용병의 외침이 들려왔다.
“몬스터다!”
스테치와 엘레나가 마부석에서 몸을 삐죽 내밀고 앞을 살피자, 거대하고 희끄무레한 물체가 마차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얼핏 보였다.
털로 수북이 뒤덮인 2.5m 정도의 거체에, 은근하게 풍겨오는 악취.
사람처럼 두 다리로 걸어 다니며, 몽둥이를 무기마냥 쥐고 있는 이 녀석들의 이름은 윈터 시미안.
비록 그 출현 빈도는 적지만 설원에서 가장 위협적인 몬스터 중 하나이며, 지능도 매우 높았다.
녀석의 주름진 얼굴에 호기심이 깃들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겉모습이 그럴 뿐이다.
몽둥이의 끝에 꽁꽁 얼어붙은 피와 살점이 이 몬스터의 진정한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
마차를 몰던 노인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똑같은 루트로 수십 번이 넘도록 마차를 몰아 봤건만, 이런 몬스터들이 나타난 것은 난생처음이다.
평소엔 별의별 사고가 일어나도 잠잠하던 녀석들이 갑자기 왜?
용병들이 기세등등하게 검과 도끼를 뽑아 들었지만, 먼저 나서는 이는 없었다.
그들 중 태반은 윈터 시미안이라는 몬스터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다.
“뒤에서도 옵니다.”
윈터 시미안은 지능적으로 먹잇감을 사냥할 줄 아는 몬스터였다.
요컨대 저런 식으로 대놓고 나타날 몬스터가 아니란 뜻. 북부의 몬스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스테치가 그것을 눈치챈 것은 엘레나의 경고가 들려올 때쯤이었다.
“이런. 더 이상 못 본 척 구경만 할 수는 없겠네.”
스테치는 마차에서 내려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엘레나는 자동적으로 그와 반대인 마차 행렬의 뒤로 향했다. 구경만 하던 두 사람이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자, 호위 역들은 물론이고 몬스터들의 주의조차 그들에게로 쏠렸다.
빠지직-.
스테치의 검신을 타고 노란 뇌광이 번뜩이는 모습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농담 좀 섞어 말하자면, A급 탐험가는 B급에게 있어 영웅과도 같은 존재다. 그런 이들의 싸움을 가까운 곳에서 실시간으로 감상할 수 있다니, 최고의 볼거리 아닌가?
호위 역들은 자신들도 나서서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멍하니 입을 벌리고 스테치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법으로 그냥 쓸어버리면 되는 것을 왜 굳이 직접 나서는 거야?』
‘되도록이면 쓸 수 있는 패는 내보이지 않는 편이 좋다 이거지.’
스테치는 힐트를 한 번 꽉 움켜쥔 후 앞으로 뛰쳐나갔다.
탓!
뻗어져 나간 검이 윈터 시미안의 몽둥이와 접촉한 순간, 몽둥이는 강화된 절삭력에 의해 마치 두부를 가르듯 양분되었다.
떨어져 나간 토막이 허공에 머무르는 사이, 스테치의 검은 반월을 그리며 나아가 윈터 시미안의 목을 정확히 치고 들어갔다.
촤악!
대기를 후끈하게 달구는 피분수가 스테치의 상반신으로 쏟아지고, 목을 잃은 윈터 시미안의 시체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옆에 서 있던 녀석의 동료들이 뒤늦게 괴성을 지르며 나섰지만,
“흐읍.”
스테치는 가볍게 뒤로 일보 후퇴해서 공격을 피한 다음, 바닥에 꽂힌 몽둥이를 밟고 뛰어올랐다.
검을 반 바퀴 돌려 역수로 쥔 그는, 있는 힘껏 윈터 시미안의 정수리 쪽으로 그것을 찍어 넣음과 동시에 중량을 한계치까지 배가시켰다.
“으아아아아!”
콰과광!
골통을 가볍게 깨부수고 들어간 검이 바닥에 꽂히면서, 땅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윈터 시미안의 몸뚱이는 머리끝부터 고간까지 쭉 두 동강 나 버렸다.
그 와중에 스테치가 한 번 더 전신에 피를 끼얹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굉장하군…….”
이것이 A급의 힘인가?
넋이 빠져 중얼거리던 용병의 시야 바깥에서, 푸른빛이 일렁거렸다.
무심코 돌아본 그곳에는, 마차 위에 올라가 마력의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엘레나가 보였다.
그녀는 스테치와는 정 반대쪽을 응시하며 무언가를 조준하고 있었는데, 그 시선을 따라간 용병은 쥐도 새도 모르게 마차 후열까지 접근해 온 윈터 시미안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보, 복병이다! 후방에서 적의 기습!”
그러나 그런 그의 외침이 무색하게도, 모두가 뒤를 돌아보자마자 엘레나가 한껏 당겼던 화살이 무지막지한 파공음을 일으키며 날아갔다.
콰곽!
날카롭고 매끈한 얼음 결정으로 된 그녀의 화살은, 윈터 시미안의 머리통 하나를 수박처럼 박살 내며 아득히 먼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마력활의 특성상, 엘레나는 구조적 결함을 무시하고 시위의 장력을 마음대로 조절하는 것이 가능했다. 때문에 그녀가 쏘는 화살 하나하나에는 대포와도 맞먹는 위력이 실려져 있었다.
퍼벙!
윈터 시미안의 어깨를 분쇄한 화살이 지면에 꽂히면서, 쌓여 있던 눈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나름 머리를 쓰겠답시고 용병들의 뒤를 노렸던 녀석들이었으나, 엘레나의 무자비한 화살 세례 앞에서는 한낱 무력한 고깃덩어리일 뿐이었다.
“……후우.”
활시위를 재차 당기려던 엘레나가 한숨을 내쉬자, 하얗게 새어나온 입김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마침 스테치도 그와 동시에 마지막 몬스터를 처리하고선 검을 지면에 꽂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