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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몰락 (98/203)


98화 몰락
2022.01.07.


“저희 상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마차를 이쪽에 세워 두시면 저희가 물품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마중 나온 사람의 인도를 받아 늙은 행상인의 마차 무리가 하역장으로 이동하자, 그곳에는 막 도착한 과일과 모피들로 꽉 찬 상자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곳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물건을 싣고 오가는 마차와 사람들로 가득했다.

“적어도 오늘 하루 정도는 진득하게 쉴 수 있겠군. 다들 이 근처에서 맥주라도 한잔하러 가지.”

윈터 시미안과의 일전을 치른 후, 비교적 순탄하면서도 긴 여정을 거친 스테치 일행은 드디어 목적지 중 하나인 제미니 상회에 도착했다.

도중 스테치는 몇 번 정도 더 다른 몬스터들을 마차까지 유인했고, 매번 성공적으로 그들을 격퇴했다.

처음 윈터 시미안이 마차를 덮칠 때만 해도 잔뜩 긴장했던 용병들도, 스테치가 직접 나서서 해결해 준 덕분에 상처 하나 나지 않고 무사히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어이, 브라이언! 빨리 안 오고 뭐해?”

“갑니다, 가요.”

긍정적인 부분은 그에 대한 용병들의 경계심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처음엔 젊은 A급 라이센스 보유자라는 점이 영 껄끄럽고 재수 없어 보였겠지만, 이제는 질투보단 존경 어린 시선으로 스테치를 바라보는 쪽이 더 많아졌다.

상회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주점으로 몰려간 용병들은 기다란 테이블 하나를 잡았다.

갑작스럽게 몰려온 손님들 덕분에 주점장의 얼굴에는 자연스럽게 행복한 미소가 그려졌다.

“여기 사람 수만큼 맥주 하나씩! 거기다 먹을 것도 좀 가져다주쇼!”

다른 사람들이 음료와 요리를 주문하는 사이 스테치가 테이블로 걸어오자, 클로젯이 재빠르게 빈자리를 내주었다.

그는 스테치의 진짜 실력을 직접 목도한 이후부턴, 살짝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깍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야, 고생 많으셨습니다, 형님. 이제 지긋지긋한 마차 호위도 거의 막바지네요.”

“그래…… 어딜 가도 눈, 눈, 눈…… 당분간은 어디 따뜻한 곳에서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

스테치가 막 종업원이 가져온 맥주를 들이키며 투덜거렸다. 북쪽의 냉기는 뼛속까지 스며들 정도로 차가워서 영 익숙해지질 않았다.

제미니 상회는 마지막 목적지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경유하는 지점.

의뢰주가 여기서 현금과 물품을 교환하고 다음 목적지까지 운송하면, 비로소 의뢰는 끝난다.

“그쪽은 일이 다 끝나고 나면 뭘 할 거야? 우린 이참에 주변에 있는 던전 탐험이나 해 볼 생각인데…….”

용병 하나가 은근슬쩍 스테치에게 물었다. 형식만 질문이지 사실상 팀을 짜자는 권유나 다름없다. 능력 있는 사람 하나 영입하면 무슨 일이든 쉽고 편해지는 건 사실이지만, A급이 뭐가 아쉽다고 B급이랑 함께 하겠는가. 스테치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전 패스할게요. 동료를 별로 많이 두지 않는 편이라…….”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엘레나에게로 향했지만, 그녀는 짐짓 못 들은 척 하며 따끈하게 데운 우유를 홀짝였다.

“그렇다면 그…….”

끼이이익-.

그 순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려던 용병의 어깨 너머에서 주점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경첩 삐걱거리는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이야기에 열을 올리던 용병들이 전부 뒤를 돌아볼 정도였다.

후끈한 주점 안으로 찬 공기와 함께 들어선 이는 다름 아닌 그들의 의뢰주였다.

저쪽도 한잔하러 온 건가? 호위 역들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오를 때 즈음, 테이블을 천천히 훑어보던 늙은 행상인의 눈이 스테치와 마주쳤다.

“?”

“너, 잠깐 밖으로 나와 봐라. 거기 여자도 같이.”

하고 싶은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바깥으로 나가는 늙은이. 갑작스런 지목에 스테치와 엘레나는 주변인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바깥으로 나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늙은이는 상회 건물로 말없이 걸어갔다. 엘레나는 그의 뒤를 따라가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스테치에게 물었다.

“왜 부른 걸까요…… 정산이 끝날 때 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텐데.”

스테치는 어깨를 으쓱이며 상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객들에게 상회의 부와 위엄을 보여 주고 싶었는지, 건물의 내장은 매우 화려했다. 그런 그곳에서 두 사람을 맞이한 것은, 안경을 쓴 어떤 남자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제미니 상회의 지부장 대표인 류트라고 합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되게 빨리 마주치게 되었군.』

남자의 자기소개를 들은 스테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쇼까지 벌여가며 의뢰인의 신뢰를 얻은 것은, 상회를 통해 노벨리아에 대한 정보를 캐기 위한 물밑 작업 중 하나였다. 하지만 상회의 대표와 이리도 빨리 대면하게 된 것은 스테치로서도 의외였다.

“콜먼 씨로부터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먼저 두 분이 상품을 안전하게 운송할 수 있도록 지켜 주신 것에 대해, 상회를 대표하여 감사드립니다. 마침 저희가 가장 바쁠 시기에 두 분의 도움을 얻게 되다니, 정말 운이 좋았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군요.”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스테치의 의뢰인인 콜먼은 괜히 멋쩍어졌는지 거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콜먼은 상회와 직접 계약을 맺고 물건을 납품한 행상인. 자칫 상회가 입을 수 있었던 큰 손실을 막아 주었다는 사실에 류트는 진심으로 안도하는 듯 보였다.

“의뢰였으니까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 순간, 메멘토 모템으로부터 희미한 녹색 빛이 번뜩였다.

* * *

“사실대로 말해라! 대체 언제부터 날 배신했지?”

“그, 그런 건 생각조차 안 해 봤습니다, 왕자님!”

베네지아의 왕성, 캐슬 브랜든의 고문서 보관실.

낡은 스크롤과 책들이 가득 쌓인 방의 가장 어두침침한 구석에서, 알프레드가 핏발 선 눈으로 콘라드를 쏘아보며 윽박지르고 있었다.

벽까지 바짝 밀어붙여진 콘라드는 턱 바로 밑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에 마른 침만 연신 삼켜 댔다.

“예언에 대해 알고 있었던 사람은 오직 너와 나, 둘 뿐이었다! 나는 내가 배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남은 건 자연스럽게 네놈뿐이지 않나!?”

“정말로 제가…… 왕자님을 배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콘라드가 반쯤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힘없이 묻자, 잔뜩 흥분해 있던 알프레드의 머리가 순식간에 차게 식었다.

한 번 열을 가라앉히고 이성을 되찾은 그는, 콘라드의 목에 들이밀었던 로드를 천천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니.”

스스로도 너무 성급한 결론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알프레드를 포함하여 베네지아의 모든 관료들은 첩첩산중으로 쌓인 골칫거리들을 해결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해진 상태였다.

감비니 요새가 무장집단에게 탈취당했던 건의 사후처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온갖 문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큰 문제는 동방의 장군이자 센티그마의 영주인 마르크 맥도웰이었다.

감비니 요새에서 벌인 전투 이후부터 계속 이상하게 굴더니, 부상을 치료하자마자 ‘흥밋거리를 찾아 떠난다.’는 편지만 남기고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영주가 자기 땅을 내버려 두고 실종된다는 초유의 사태에 둘째 왕자는 아주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가 봐라.”

후다닥.

콘라드는 알프레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거의 도망치듯 고문서 보관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직접 언질을 준 것이 아니라면, 첫째 왕자가 무언가 손을 써서 예언을 감청한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는 점이지만…….

깊은 한숨을 쉰 알프레드는 정확히 5분을 기다린 뒤, 어둑어둑한 보관실을 걸어 나왔다.

“왕자님! 도대체 어디 계셨습니까? 한참을 찾아다녔는데…….”

그러나 복도로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시종장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알프레드는 짜증 난다는 티를 팍팍 내며 머리를 쓸어 넘긴 뒤, 시종장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어디 있든 그건 내 마음이다. 어쨌든 무슨 일이지?”

“셋째 왕자님이 깨어나셨습니다. 지금 바로 가 보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시종장의 말에 알프레드는 곧바로 발걸음을 옮겨 제라드의 방으로 향했다.

최근 들어 왕성 이곳저곳이 시끌벅적해졌지만, 제라드의 방 주변만큼은 환자의 절대 안정을 위해 일반 시종들의 접근조차 물리고 있어 매우 조용했다.

벌컥.

경비병이 비켜선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곳엔 침상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제라드와 그를 돌보는 의사가 있었다.

“…….”

천천히 고개를 돌린 제라드와 눈이 마주치자, 알프레드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근육이 빠져 눈에 띄게 줄어든 몸집. 상반신 전체를 칭칭 두르고 있는 붕대. 수분기를 잃어 말라비틀어진 입술. 그리고 어깨 아래부터 흔적도 없이 사라진 왼팔.

이래서야 차라리 막 성으로 옮겨져 왔던 그때가 더 사람 같아 보일 지경이었다.

“일어났-.”

“35일.”

알프레드는 제라드의 쉬어 터져서 거칠어진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35일은 그가 감비니 요새에서의 사건 이후로 잠들어 있던 시간이었다. 제라드는 아직도 작금의 상황이 실감나지 않았는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팔이 있었던 자리와 알프레드를 번갈아 보았다.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됐냐고?”

일말의 안도감, 그리고 약간의 분노. 의사를 바깥으로 내보낸 알프레드는 복잡하게 얽힌 두 감정을 간신히 추스르며 지금껏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그중 대부분은 맥도웰 후작의 증언에 기초한 내용이었다. 제라드가 벌인 일 때문에 무슨 문제가 터졌는지, 그리고 자신이 그 탓에 얼마나 고생하고 있었는지.

“……자, 속이 시원하냐?”

알프레드가 신랄한 어투로 쏘아붙였다.

“언제든지 뒤로 물러서서 지원을 요청할 수도 있었지만, 너는 그러지 않았지. 바로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

제라드는 입을 살짝 벌린 채로 이야기를 듣기만 할 뿐,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알프레드는 이를 악물었다.

만신창이가 된 동생에게 화풀이를 한다는, 치졸하기 짝이 없는 행위. 스스로도 이것이 온당치 않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한 번 터진 입에서는 어느새 본인이 생각지도 않은 온갖 험악한 말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네가 깨어나면 전해 주라던 아버지의 말씀이 있다.”

알프레드가 말했다.

“제라드 메서. 북방 장군으로서 전선 수호의 직무에 충실하지 못했던 점, 그리고 요새의 적침을 허용한 것도 모자라 아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점을 짐은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제라드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현 시각 이후로, 너를 북방 장군의 직위에서 해임한다.”

“…….”

충격을 받을 거라 생각했지만,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알프레드는 그런 제라드를 지켜보다가 천천히 등을 돌리고 방을 나갔다.

환자를 돌보기 위해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의사가 방으로 들어가고 나서 잠시 후, 그제야 짐승처럼 흐느끼는 소리가 그 안에서 터져 나왔다.

“흐어어어억…… 끄으윽…….”

그 소리를 들은 알프레드는 두 눈을 꾹 감고선 집무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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