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암살자
(100/203)
100화 암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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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암살자
2022.01.09.
라켄 공국.
크로마토스 제국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작은 공국이었지만, 일단은 주위를 둘러싼 3개국 중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있다. 덕분에 지리적 특성을 활용하여 매년 상당한 무역 흑자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놔두면 언젠간 파리가 꼬이는 법.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막대한 이윤을 노리인 암흑가의 거대 파벌들이 공국에 자리 잡고, 공국의 산업을 천천히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몸을 숨기기엔 최적의 장소란 말이군. 노벨리아도 저곳에 있을까?』
‘그렇겠지. 저 땅은 다방면으로 타국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이니까.’
“서두릅시다. 이러다 놓치겠어요.”
엘레나의 재촉을 듣고 퍼뜩 정신을 차린 그는 허둥지둥 그녀를 따라갔다. 산에서 내려와, 공국으로 들어가는 길에 오르기까지 스테치는 묘한 기분이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남부에 있을 적엔 도시 하나를 들어갈 때마다 제라드가 건 수배를 피하기 위해 몸을 숨겨야만 했다. 그런데 이제는 갑자기 떳떳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돌아다닐 수 있다니,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공국으로 들어간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공국의 도시 중 하나인 ‘알타이르’. 깔끔하고 알록달록한 거리가 인상적이었다. 거리에는 분주하게 돌아다니거나 상점에서 무언가를 구입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저기 있다.’
스테치는 불과 모퉁이 몇 개를 돌자마자 도시의 가장 어둡고 으슥한 길로 접어드는 운송꾼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제아무리 발달된 도시여도 슬럼화 된 구역은 있기 마련인가?
늘어선 낡은 집들과 알코올 냄새를 풍기며 쓰러진 거지들. 수상쩍어 보이는 물건들을 파는 장사꾼. 거기에 깡패까지.
전형적인 질 낮은 동네의 풍경이 스테치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엘레나.”
“네.”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살폈다.
뒷골목의 어느 지점을 통과한 이후로, 사람들의 시선은 운송꾼을 쫓아가는 스테치와 엘레나에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단순히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라고 보기엔 수가 너무 많고, 집요했다.
탁.
아니나 다를까.
계단에 앉아 있던 거한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스테치의 앞으로 걸어 나와 길을 방해했다. 그러면서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 숨어 있던 나머지 일당들이 옆과 뒤를 막으면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틈 없이 포위되고 말았다.
“이런 썅.”
노벨리아의 수하들인가? 아니면 단순 시비? 어느 쪽이든 간에 최악의 타이밍인 건 분명하다.
스테치는 그 자리에 멈춰선 채 투덜거렸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순순히 보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스테치는 운송꾼의 발소리와 체취가 점점 옅어지는 것을 느끼곤 엘레나에게 말했다.
“먼저 가. 여기 정리가 끝나면 바로 뒤따라갈게.”
고개를 끄덕인 엘레나가 앞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에 거한은 팔을 뻗어 저지했다.
“어딜 함부로 기어나오-.”
퍽!
상대의 목젖을 주먹으로 한 대 후려갈긴 엘레나는, 거한이 몸을 숙이며 콜록거리는 사이 등을 타고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내려간 턱을 향해 작렬하는 스테치의 어퍼컷. 이빨과 이빨이 부딪치는 순간, 거한은 덩치가 무색하도록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야, 시간 없으니까 전부 한꺼번에 덤벼!”
스테치는 외침과 동시에 반대쪽에 서 있던 깡패에게로 뛰어들며 복부를 부츠굽으로 밀어 찼다.
마법이나 검을 사용해서 피를 봤다간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번거롭긴 하지만 주먹으로 처리하는 편이 나았다.
* * *
슬럼가에 들어설 때 즈음이 되서야 추적자가 붙었다는 사실을 눈치챈 운송꾼은 정신없이 텅 빈 길목을 내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엘레나를 완전히 뿌리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 봤자…….’
어차피 들켰으니 숨어서 쫓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그녀는 심호흡을 한 뒤 지면을 힘껏 박차며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거리를 좁혀오는 엘레나의 모습에,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던 운송꾼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히익!”
턱!
기어이 옷자락을 붙잡힌 운송꾼은 저항도 못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무릎으로 등짝을 단단히 찍어 누른 엘레나는 지치지도 않는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노벨리아 리버펠. 지금 어디에 있지?”
“내, 내가 그걸 그렇게 순순히 말해 줄 것 같아?”
역시 저항하는가. 엘레나는 한숨을 푹 쉬더니 그대로 운송꾼의 뒤통수를 붙잡아 바닥에 내리찍었다. 오물과 뒤섞인 진흙이 콧구멍과 입으로 한가득 들어갔다.
“우웁!”
헛구역질 하려던 운송꾼의 목둘레에 엘레나의 팔이 휘감겼다.
벌써부터 숨이 턱 막혀 오는 게 가녀린 몸에서 나온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힘이었다.
“이대로 30초면 깔끔하게 저 세상으로 보내 줄 수 있어. 좋은 말 할 때 순순히 부는 게 어때?”
“저기…… 저쪽…….”
떨리는 손으로 운송꾼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낡은 집이 한 채 있었다. 그러나 정작 엘레나는 그쪽으론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운송꾼의 애꿎은 손가락만 비틀어 꺾었다.
“아아아악!”
“거짓말. 저 집엔 아무도 없어. 아무래도 넌 말로 해서 들어먹을 인간이 아닌 모양이로군.”
손가락을 움켜쥔 엘레나가 슬쩍 힘을 넣어서 위협을 가하자, 잔뜩 겁을 집어먹은 그는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아, 알았으니까 놔줘!”
모른다고 잡아떼기엔 이미 노벨리아의 은신처까지 너무 깊숙이 들어와 버린 이후였다. 엘레나의 구속을 받으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뒤로 운송꾼은 은근슬쩍 아군이 숨어 있는 골목으로 엘레나를 유도했지만, 그녀의 발차기 한 방에 무릎이 깨지고 나뒹구는 동료의 모습을 보곤 전의를 상실했다.
이윽고 두 사람이 도달한 곳은 어느 낡은 건물의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정말 이런 곳에 사람이 살긴 하는 걸까 싶을 정도로 허름하기 짝이 없는 장소였다.
하지만 그녀는 운송꾼의 안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겁에 질려 헐떡이는 숨소리 하나가 저 아래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쾅!
운송꾼을 기절시킨 엘레나는 문을 걷어차고 방으로 들어갔다.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뚫어놓은 자그마한 채광창이 하나. 그리고 최소한으로 갖춰 놓은 가구들. 그리고 방의 정중앙에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떨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저 사람이 노벨리아라고?’
카시아의 가문과 동업자라곤 상상이 안 가는 몰골이었다. 떡져서 뭉개진 머리카락과 정리하지 못해 자라난 수염까지. 살짝 당황하긴 했지만, 엘레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에게 다가갔다.
“당신이 노벨리아 리버펠인가?”
“크아아악!”
쨍그랑!
노벨리아가 던진 유리컵이 엘레나의 바로 옆에 부딪히며 산산조각 났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엘레나를 노려보는 그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원하는 게 뭐야! 왜 날 한시도 가만 놔두지 않는 거지?!”
‘?’
마치 그들이 오기 전부터 무언가에 시달려 왔다는 듯한 말투. 어찌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엘레나가 머뭇거리는 사이, 노벨리아가 중얼거렸다.
“죽일 테면 차라리 시간 끌지 말고 죽여라…… 구차하게 시간 끌지 말고…….”
먼저 캐내야 할 정보가 산더미인 상황에서 노벨리아를 함부로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단 상대를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뻗던 엘레나는, 채광창을 뚫고 들어오는 빛에 눈이 부신 나머지 잠깐 얼굴을 찡그렸다.
그 순간, 채광창을 뚫고 커다란 물체가 낙하했다.
콰장창!
다년간 갈고 닦은 엘레나의 전투 감각이 전신의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비산하며 반짝이는 유리 파편들 사이로 낙하하는 인영.
후드 때문에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습격자의 손에는 도끼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노벨리아의 정수리가 쪼개지기까지 불과 1초도 채 남지 않은 상황. 엘레나가 뻗었던 손을 괴한에게로 돌리자, 그녀의 오른팔 전체에 타고내린 문신이 황금빛으로 번쩍였다.
“《훨 윈드》!”
투확!
나선형으로 소용돌이치며 뿜어져 나간 돌풍이 몸뚱이를 강타하자, 뒤쪽으로 크게 밀려 나간 괴한이 벽면으로 날아갔다.
바로 옆에 있던 노벨리아는 갑작스런 풍압에 밀려 바닥을 구르느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우왁!”
생각지도 못한 엘레나의 방해에 괴한은 타겟을 그녀로 바꾸었다.
충돌하는 대신 벽을 박차고 뛰어오른 그는 엘레나에게 도끼날을 휘둘렀고, 단검으로 그것을 받아낸 엘레나는 뒤로 수 발자국 이상을 물러나야만 했다.
“으윽!”
팔이 저릿할 정도로 묵직한 일격.
힘겨루기로 상대를 제압하긴 힘들다고 판단한 엘레나는 날을 비틀어 도끼를 미끄러뜨렸다.
직후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괴한의 몸으로 단검을 찔러 넣었지만, 두터운 갑옷 면에 부딪혀 불똥만 튀길 뿐이었다.
그러나 엘레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지면을 구르며 괴한과 노벨리아의 사이를 막아선 뒤, 활과 결합되어 있던 아티팩트를 분리했다.
핸드 캐논 사이즈로 줄어든 스피라투스를 단단히 움켜쥔 그녀는 포구를 괴한에게 겨눈 채 트리거를 당겨 댔다.
탕탕탕!
활로 탄자를 쏴 날려 보낼 때 비하면 약하지만, 견제용으로 쓰기엔 이만한 무기가 또 없었다. 갑작스럽게 날아드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 괴한은 입구 쪽으로 달려갔고, 엘레나는 그 뒤를 쫓아갔다.
뻐억!
막 계단통으로 몸을 들이밀던 괴한의 상체가 크게 뒤로 젖혔다.
“어딜 가려고?”
깜짝 놀란 엘레나와 괴한의 앞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스테치.
내지른 주먹을 거둬들인 그는 다리를 번쩍 들어 자신보다도 덩치가 큰 괴한의 머리통에 엑스킥을 날렸다.
빠칵!
가드도 제대로 못하고 크게 얻어맞은 괴한이 주춤거리는 동안, 스테치는 손을 뻗어 상대가 쥔 도끼를 붙잡았다.
살짝 무게를 늘려 준 것만으로도 당황한 괴한은 무기를 떨어뜨렸고, 가볍게 상대를 무장해제시킨 스테치는 그대로 보디체크를 먹였다.
“우욱!”
땅바닥에 쓰러지며 처음으로 터져 나온 신음소리. 잠깐 여유가 생기자 주먹을 우두둑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던 스테치는 엘레나에게 물었다.
“이놈은 뭐야? 노벨리아의 경호원인가?”
“아뇨. 오히려 그를 죽이려던 걸 제가 막았죠.”
“……무슨 상황인지 전혀 감이 안 잡히는데. 노벨리아를 어떻게 해 보기 전에 이 녀석부터 처리해야겠…….”
스테치가 옆을 돌아보자, 괴한은 입으로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챈 엘레나는 빠른 속도로 달려들어 괴한의 목을 뒤에서 졸랐다.
“뭔가 삼켰습니다!”
“이 자식, 토해 내!”
뒤늦게 멱살을 붙잡고 흔들었지만 약은 이미 그의 목구멍을 절반쯤 타고 넘어가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스테치는 주먹을 비틀어 쥔 다음, 있는 힘껏 괴한의 명치를 쳤다.
“크억!”
산소를 들이키느라 쩍 벌어진 그의 입에서, 환약 하나가 튀어나와 땅에 떨어졌다. 약의 효능이 무엇인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스테치는 엘레나가 괴한의 뒤통수를 후려쳐 기절시키는 것을 보곤 어처구니없어하며 중얼거렸다.
“썩을,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