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단서 (101/203)


101화 단서
2022.01.10.


[그럼…… 노벨리아가 제 납치를 사주한 게 아니란 말인가요?]

“확실해. 노벨리아는 배신자가 아니야. 오히려 이쪽도 너나 죽은 어거스틴 씨랑 같은 피해자였지.”

수정구 너머로 들리는 카시아의 질문에 스테치가 답했다.

잠적해 버린 노벨리아의 은신처를 찾아 급습한 스테치와 엘레나는, 얼떨결에 그를 암살하려던 정체불명의 괴한을 저지했다.

정확한 상황 파악을 위해 노벨리아를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킨 그들은, 메멘토 모템의 에너지가 완충되는 즉시 어빌리티를 사용하여 기억을 읽어 냈다.

그리고 스테치는 노벨리아가 카시아의 납치에 대해 무언가를 숨기고 있기는커녕, 아무것도 모른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카시아는 그가 되레 암살당할 뻔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에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동업자들을 피해 몸을 숨겼다고 생각했던 노벨리아가, 사실은 정체불명의 세력으로부터 도망치려던 거였다니.

[그 암살자는 어떻게 됐는데요? 뭔가 알고 있던가요?]

“그건 지금부터 확인해 볼 생각이야.”

통신구에서 고개를 돌린 스테치가 슬쩍 뒤를 돌아보자,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던 노벨리아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는 엘레나가 보였다.

현재 그들이 있는 장소는 어느 여관의 방. 주인에게 웃돈을 얹어 준 덕분에 가장 조용하고 깔끔한 방을 골라잡은 스테치는, 덕분에 안심하고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긴장할 필요 없어요. 우린 적이 아닙…… 니다.”

부하들을 때려눕히고 협박까지 한 사람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닌가? 괜스레 머쓱해진 엘레나가 말끝을 흐리자, 노벨리아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런 것보다, 날 저놈하고 한곳에 두지 말아 줘.”

그가 말하는 ‘놈’이란, 물론 암살자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옴짝달싹 못 하게 단단히 포박된 그는 정신을 잃고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그는 씁- 하고 한번 입맛을 다신 뒤 엘레나에게 말했다.

“잠깐 리버펠 씨를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 줘. 이 자식은 내가 살펴볼게.”

고개를 끄덕인 엘레나는 노벨리아를 데리고 방이 줄지어 늘어선 복도로 걸어 나갔다.

덜컥.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스테치와 암살자 두 사람만 남았다.

스테치가 아직까지도 뻗어 있는 암살자의 얼굴로 뜨겁게 우려낸 찻물을 뿌리자, 그는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가 무언가를 해 보기도 전에, 스테치는 반지 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네 차례야.”

스르륵-.

메멘토 모템의 어빌리티는 노벨리아의 기억을 읽어 내고도 아직 조금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반지의 혼이 암살자의 몸에 들어갔고, 몸부림을 치려던 암살자는 이윽고 잠잠해졌다.

“어때, 뭔가 알아냈어?”

“『…….』”

사람의 기억을 읽는 것은 문을 열고 방 안을 들여다보는 것과도 같았다. 대부분은 열려 있지만, 가장 은밀하고 숨기고 싶은 기억으로 들어가는 문은 대체적으로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자물쇠가 있다 한들 결국은 부술 수 있으므로, 사실상 메멘토 모템이 마음만 먹으면 파헤칠 수 없는 기억이나 비밀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문도 자물쇠도 아닌 칠흑같이 어두운 안개의 벽이었다.

꺼림칙하면서, 또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기운.

“『어떻게……?』”

이런 경우도 있나? 당황한 메멘토 모템은 기억으로의 진입을 시도해 보았지만, 보이지 않는 반발력이 그를 계속해서 밀어냈다. 안개의 틈으로 보이는 것은 그저 조각 난 기억의 파편들뿐.

“무슨 일인데?”

기억으로의 접근을 차단하다니, 인위적인 조작이 있지 않고서야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메멘토 모템은 신경질적으로 으르렁거리더니 반지로 돌아와 버렸다.

암살자는 빙의가 풀리자마자 줄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고꾸라졌다.

털썩!

암살자의 머릿속에 들어간 건 아주 잠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더러운 것을 뒤집어쓴 것처럼 끈적한 기분이 들어 아주 불쾌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마치…….

설마.

꺼림칙한 예감을 애써 뿌리친 메멘토 모템은,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스테치에게 말했다.

『안 돼. 안개 무리 같은 게 가로막고 있어서 그 너머에 무슨 기억이 있는지 볼 수가 없어.』

메멘토 모템의 힘을 막아 내는 방벽이라니, 대체 이 암살자가 무엇을 알고 있길래 그렇게 꽁꽁 가려 놓았단 말인가. 놀란 스테치의 반응에 메멘토 모템이 뒤늦게 덧붙였다.

『네 생각이 뭔지는 알겠지만, 아니야. 이건 기억이 봉인된 게 아니라, 처음부터 녀석의 머릿속이 무언가를 헤집어볼 수 없을 정도로 혼탁했던 거야.』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내가 그 틈새로 본 것은…… 세계수였어. 하늘을 찌를 정도로 거대하게 자라난 세계수.』

세계수.

북부에서도 최북단에 위치한 엘프들의 왕국 케일럼에는 거대한 나무, 세계수가 있다는 이야기를 카시아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엘프들이 얼어붙은 북부의 대지에서 식물을 가꾸고 먹을 것을 생산할 수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그 세계수의 보살핌 덕분이었다고.

그러나 메멘토 모템의 말을 들은 스테치는 오히려 더더욱 영문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대체 이 암살자가 누구고, 뭐 하는 사람이길래 노벨리아를 노리는 걸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암살자는 카시아를 납치하려던 이들과 연관이 있는 걸까?

『여기서부터 그 케일럼이라는 나라까지는 어느 정도 거리지?』

“멀어…… 정말 멀어. 말을 타고 가도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어.”

노벨리아도 이번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면, 남은 단서는 케일럼에 있다는 세계수 하나뿐이었다.

스테치는 엘레나와 노벨리아를 방 안으로 불러들인 뒤, 수정구 너머에 있는 카시아에게 말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이 암살자는 케일럼 왕국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는 것 같아. 조금 특수한 방법을 써서 기억을 읽어 봤는데, 세계수가 보였거든.”

생각지도 않은 단어가 튀어나오자 카시아는 물론이고 엘레나도 당황스러워했다.

[세계수…… 케일럼이요? 그건 지금 여러분이 있는 위치에서 거의 정 반대편에 있잖아요. 대체 왜 그곳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난들 아나.”

카시아는 한숨을 푹 쉬더니 짐짓 걱정스러운 말투로 중얼거렸다.

[저는 이번 암살 시도가 어떤 쪽으로든 제 납치 사건하고 연관이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직 근거는 없지만…… 하필 저희 아버지의 ‘사업’ 파트너들이 동시에 목숨을 위협받는다니, 너무 절묘하잖아요?]

스테치는 카시아가 언급한 파트너 이야기에 무언가를 떠올리곤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남은 한 사람은 어때? 용의자가 더 있다고 말하지 않았었나?”

[그게 문제에요. 여러분이 없는 동안 알아봤는데, 그쪽도 지금 어디에 있는지 행방이 묘연하더라고요.]

산 넘어 또 산이네. 스테치가 혀를 차는 소리에 카시아가 말했다.

[일단은 그쪽에 대해선 저희가 소재 파악에 들어갈 테니, 그때까지는 자유롭게 활동해 주세요.]

“알았어. 뭔가 새로 알게 되면 다시 연락할게. 아참, 그전에…….”

스테치가 말했다.

“노벨리아를 그쪽에서 보호해 주면 안 될까? 이 양반, 혼자 알아서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기엔 너무 허당이야.”

어거스틴 리버우드가 사망하던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암살 위협을 받은 노벨리아는, 최소한의 경호 인력을 이끌고 미리 준비해 둔 은신처들을 순례하며 지냈다고 한다.

다만 그렇게 숨는 와중에도 외부 연락책을 남겨 둔 것은, 지금처럼 역추적당할 빌미를 제공할 뿐이니 크나큰 실책이었지만.

[그렇다면 제가 그쪽으로 데리러 갈 사람을 보낼 테니, 제미니 상회에서 대기하라고 하세요. 이런 일에 딱 맞는 사람이 있거든요.]

스테치는 오케이 사인을 보낸 후 통신을 종료했다. 그러자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노벨리아가 뭔가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인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먼저 자네들의 도움에 감사를 표하네. 하지만 허당이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 나는 그저 정보 수집을 하고 있었을 뿐이라네. 류트와의 연락망을 만들어 놓은 건 여차할 경우 내가 모은 정보를 전부 넘겨주기 위해서였어.”

“무슨 말이죠?”

스테치가 물었다.

“어거스틴이 죽었을 때, 나는 그게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어.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지! 내 직감은 예리하니까!”

그는 열변을 토했다.

“그래서 독자적으로 어거스틴을 죽인 일당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지. 라켄에서 활동하는 정보상들과 인맥을 총동원해서 온갖 정보들을 긁어모았어. 심지어는 요인 암살 미수부터 원인 불명의 사고사들도 전부 다.”

노벨리아는 침대 옆에 대충 놓인 지도를 끌어다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그의 손가락은 라켄 공국을 가로질러, 동쪽에 위치한 사일라스 왕국에서 멈췄다.

“녀석들은 사일라스의 던전들을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어. 확실해.”

“그거 근거는 있는 주장인가요?”

그는 품 안에 꾸깃꾸깃 접혀진 종이 한 장을 꺼내 스테치에게 보여주었다.

종이에 그려진 사일라스의 수많은 던전들 중, 4~5곳 정도를 연결 짓는 하나의 붉은 선이 눈에 띄었다.

그 외에 다수의 메모들이 잔뜩.

“평소라면 모르고 지나쳤을 숫자와 지표들이 하나로 엮여서 보이기 시작하더군. 요 근래 흘러간 출처 불명의 돈과 상품들은 전부 한 지점으로 향하고 있었어. 그게 바로 저곳이야.”

노벨리아의 날카롭게 빛나는 눈을 본 스테치는 깨달았다.

허당이긴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대상인. 음모론자에 가까운 그의 안목이 없었더라면 애초에 이 정도로 자수성가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리라.

* * *

다음 날.

야심한 밤, 노벨리아는 몸이 성한 부하들을 모두 불러 모아 상회로 돌아갔다.

메멘토 모템의 말에 의하면 노벨리아를 추적하던 사람은 암살자 단 한 명뿐. 감시가 없는 지금이 움직이기엔 절호의 기회였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그는 카시아가 마련한 장소에서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숨죽이고 지내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스테치는 무심코 검을 꺼내 휘둘러보았다.

카시아가 지급해 준 이 검은 대량 생산품치고는 썩 괜찮은 품질이었다. 하지만 페네트레이터에 비하면 아무래도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카시아에겐 미안하지만, 절삭력도 무게 중심도 이전에 쓰던 검이 훨씬 우수했다.

‘마침 잘됐네. 안 그래도 무기를 좀 더 좋은 걸로 바꿔 볼까 생각 중이었는데.’

“마지막으로 이 자의 처분이 남았네요. 어떻게 하실 건가요?”

멀어져 가는 노벨리아에게 손을 흔들어 주던 엘레나는, 축 늘어진 암살자를 어깨에 들쳐 메고 검을 살펴보던 스테치에게 물었다.

정신을 차릴 때마다 두들겨 패서 기절시키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니, 암살자의 몸은 거의 다진 고깃덩이처럼 되어 있었다.

들고 나오면서 주변 사람들이 수상한 눈으로 보긴 했지만, 술에 절었다는 말에 대충 납득하는 듯 보였다.

“죽여 버리는 수밖에.”

이미 놈에게서 빼낼 수 있는 정보는 전부 얻었다. 살려 놓아 봤자 골치만 아파질 터.

주변에 아무도 없는 라켄 공국의 외곽까지 나간 스테치는 단검으로 암살자의 숨통을 끊어 놓은 다음 마법으로 그의 시체를 소각했다.

다 타 버린 후엔 흔적이 발견되더라도 그게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되리라.

『…….』

‘그러고 보니 너는 아까부터 왜 그래? 뭔가 말수도 적고…….’

메멘토 모템이 무언가를 불편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사태를 관망하느라 말을 안 하는 것과 말없이 짜증 내는 것 정도는 스테치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차이가 명백했다.

『놈의 안에 가득 찬 그 기운은…….』

메멘토 모템이 입을 열었다.

『라크샤 산맥의 아티팩트와 똑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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