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아이젠
(102/203)
102화 아이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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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아이젠
2022.01.11.
“이봐, 일어나!”
누군가의 외침에 졸린 눈을 비비며 깬 스테치는, 늘어지는 하품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물 위에 얇게 낀 살얼음을 부수며 나아가던 배가 살짝 흔들거렸고, 그는 주변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아침 해가 막 떠오르며 내리쬔 햇빛이 수면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으, 추워.”
먼저 일어났던 엘레나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스테치의 안색이 별로 좋지 못한 것을 보곤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또 밤을 설치신 건가요?”
스테치는 말없이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머릿속 한구석에 묻어 두었던 싫은 기억이, 어렴풋이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검은 아티팩트.
설마 북부에 와서까지 그 이름을 듣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영혼까지 스며드는 듯한 차가운 냉기와 몸 전체를 살아 숨 쉬는 생물처럼 휘젓고 다니던 사기. 그런데 그런 물건이 이 땅 어딘가에 또 있다니…….
‘큰일이네.’
스테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단순한 생리적 거부감 이외에도,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그것과 마주한 메멘토 모템은 자기 통제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
덕분에 스테치는 새로운 힘을 얻었지만, 엘레나의 도움을 받고서도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뻗을 정도였다. 어쩌면 그대로 영영 잠들어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번에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다들 짐 챙겨! 거의 다 도착했으니까.”
승객들이 하나둘씩 분주하게 짐을 챙겨 들며 일어나자, 스테치와 엘레나도 서둘러 하선할 준비를 마쳤다.
라켄 공국에서부터 강을 타고 이동하기 시작한지 며칠 뒤.
배가 아무도 없는 부둣가에 닿자, 스테치와 엘레나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이 육지로 내려왔다. 그러나 도시가 있을 거라 기대한 것과는 달리, 주변에 육각형을 그리며 세워진 거대한 첨탑형 구조물들 몇 개를 빼면 사람이 살고 있을 법한 건물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 빨리빨리들 가자고.”
“거기 젊은이, 거기서 뭐 해? 아이젠으로 가는 거 아니었나?”
그 말에 두 사람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을 뒤따라 후다닥 뛰어갔다.
첨탑의 중심에는 바위로 된 원형의 바닥 판이 놓여 있었다.
마차 여러 대가 한꺼번에 올라가도 다 차지 않을 만큼 큰 원판이었는데, 사람들은 그 위로 올라가서 옹기종기 모이는 것이었다.
스테치와 엘레나까지 온 것을 확인한 순간, 행상인 둘이 거대한 레버를 당겨 옆으로 비틀었다. 그러자,
드르륵-. 덜컹!
자신이 올라가 있는 원판이 승강기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거대한 톱니바퀴가 돌아가면서 원판이 지하 깊숙한 곳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내려갔다.
스테치와 엘레나는 그 자리에서 비틀거리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서로 떠들고 이야기하느라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원판이 하강함에 따라 팔 다리를 쿡쿡 쑤셔오던 냉기도 서서히 가시더니, 나중에는 외투를 걸치고 있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뜨뜻한 열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땅 밑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지열 덕분이었다.
“저기……!”
“와…….”
어두워야 할 지하는 반짝이는 조명들로 가득하여 대낮에 가까울 정도로 밝았다.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스팀과 절그럭거리며 맞물리는 기계들의 구동음. 그곳이 바로 사일라스의 대도시 중 하나인, 아이젠이었다.
불과 5분도 채 걸리지 않고 승강기가 지하 밑바닥에 도달했을 즈음, 그들의 눈앞에는 지상에 있을 땐 상상도 못 할 만큼 웅장한 도시가 서 있었다.
“그럼, 나중에 보자고!”
사람들은 제각기 볼일을 보기 위해 삼삼오오 흩어졌다.
스테치는 멍한 표정으로 포석이 깔린 길을 걸어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곳곳에서 무언가를 만드느라 두들기거나 치고 박고 싸우는 둥, 다양한 열기로 뜨거운 곳이었다.
스테치와 엘레나가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외지인들을 받는 숙소였다.
바깥에서 오는 사람들은 드워프들의 체형과 맞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다른 건물들에 비해 문의 높이라던가 가구의 크기 등이 더 컸다.
1층의 식당에는 종업원으로 일하는 인간이나 엘프들도 간간이 보였다.
아이젠의 물가는 대체로 비싼 편이었지만, 카시아에게 받은 돈은 뱃삯과 방값을 치르고도 많이 남아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스테치는 방에 짐을 풀어 놓은 뒤 배낭 안에 탐험 장비만 담아 곧장 숙소 바깥으로 나왔다.
“가자.”
스테치는 던전으로 가기 전, 새로운 무기를 구하기 위해 대장간을 찾아 거리로 나섰다.
왜 굳이 새로운 무기를 못 찾아 안달인가 할 수도 있겠지만, 스테치의 생각은 확고했다.
화염과 얼음, 전기와 바람을 날리는 수 있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힘을 가졌지만, 베네지아의 동방 장군인 마르크 맥도웰은 그 모든 것을 디스펠륨 폭탄 한 방으로 무력화시켰다.
나중에 있을 싸움에서도 그런 일이 또 벌어진다면, 대처할 수단은 오직 스스로의 능력과 장비의 성능이다.
한 사람이 다룰 수 있는 아티팩트의 수에는 한계가 있으니, 남는 건 더 강력한 무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강하고 좋은 장비를 추구하는 것에 이유가 필요할까?
그가 방문한 곳은 무기나 방어구만 전문적으로 만드는 대장장이들이 모인 거리. 대부분은 다른 왕국으로 수출될 물품들을 대량으로 생산해 내느라 바빴지만, 더 깊숙한 곳의 사이에서도 주문 제작만 받는 장인들의 거리가 있었다.
“뭐야, 인간 손님이잖아?”
한창 모루를 두들기던 드워프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스테치를 쳐다보았다.
외지인 손님은 잘 오지 않는 으슥한 구역이었기에, 스테치가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이! 뭐 찾는 거라도 있나?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담배를 피워 대던 드워프 하나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외치자, 스테치는 곧장 그에게로 걸어갔다.
“마침 잘됐네요. 검을 하나 주문하고 싶은데, 어디부터 둘러봐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그런 걸 물어보면 당연히 자기한테 오라고 하지 않을까? 옆에서 따라오던 엘레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는 골목의 더 깊은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좋은 대장장이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아. 더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실력이 좋으니까.”
“고맙습니다.”
“아, 그런데…….”
그는 턱수염을 긁적이며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곧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렸다.
“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직접 보는 편이 낫겠지.”
“?”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 턱이 없었지만, 어쨌든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뒤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을 경쟁자들의 품으로 쉽게 놓아주는 드워프의 모습에 어처구니없어하던 엘레나였으나, 그 의문은 의외로 금방 풀렸다.
“생각이 바뀌면 다시 오너라!”
잠시 후.
호탕한 목소리를 등지고 대장간에서 터덜터덜 걸어 나온 스테치와 엘레나의 얼굴은 하나같이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 사람이 들어왔던 골목을 그대로 걸어 나오자, 처음 스테치에게 길을 알려 주었던 드워프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때?”
드워프의 질문에 스테치가 말했다.
“보아하니 제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나 보군요.”
대장장이의 거리에서도 제일 안쪽에 있던 대장간.
스테치는 품질 좋은 무기를 구하기 위해 금전적 대출혈을 각오하고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앞서 보았던 무기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평작들이었다.
물론 드워프가 만든 물건답게 평균 이상의 품질은 보장되어 있었지만, 그런 것에 비해 가격은 터무니없이 높았다. 결국 스테치는 돈을 쓰기는커녕 조용히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런 거죠?”
스테치의 질문에 드워프가 답했다.
“저 안쪽에 있는 놈, 실력은 사실 거리 앞쪽에 있는 우리들이랑 별 차이 없어. 기존에 있던 사람이 일선에서 너무 빨리 물러나는 바람에, 바로 그다음 연장자인 녀석이 그 자리를 꿰차게 됐을 뿐이지.”
그러면서 그는 은근슬쩍 자신의 가게 앞에 진열된 무구들을 보여 주며 스테치에게 말했다.
“그래서, 어쩔래? 나라면 저쪽보다 훨씬 더 낮은 가격으로 물건을 제공할 용의가 있는데…….”
그 순간, 메멘토 모템이 가게를 살펴보려던 스테치에게 말했다.
『스테치, 잠깐만.』
‘왜? 나 바빠.’
『어디선가 익숙한 기운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네 엘프 친구는 너보다도 먼저 눈치챈 모양이지만.』
스테치가 어리둥절해하며 뒤를 돌아보니, 엘레나의 눈은 거리에서 가장 으슥하고 어두운 골목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느라 한 자리에 오래 있다 보니, 대충 훑어보고 지나칠 때는 몰랐던 희미한 잔향이 그녀의 코를 찌르고 있었다. 정상적이라면 이런 장소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을 어느 ‘흔적’.
『이거 어째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데. 한번 가 보자고. 저 끝에 뭐가 있는지 한번 직접 봐야겠어.』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메멘토 모템.
스테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가지 않는다면 왜 안 갔냐고 하루 종일 시끄럽게 굴겠지. 엘레나는 앞장서는 스테치를 따라 길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결국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된 드워프는, 멍한 얼굴로 두 사람이 향한 골목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쪽은…….”
* * *
골목을 따라 이리저리 꺾어 들어간 스테치는 곧 어렵지 않게 허름한 집 하나를 찾아냈다.
현대적인 건축 감각을 뽐내는 아이젠의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오두막이었다.
『뭐해? 노크라도 해 봐.』
메멘토 모템이 기대에 찬 목소리로 재촉하자, 스테치는 조심스럽게 낡아빠진 문짝을 두들겼다. 그 순간, 안쪽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땡그랑!
“아아, 젠장!”
쨍그랑!
정신 사납게 만드는 소리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웬 드워프 하나가 문을 홱 하고 열어젖혔다. 답지 않게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기다란 망토를 두른 그는, 기다랗게 자라난 머리카락, 눈썹, 수염 때문에 이목구비를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누구냐?”
“어…… 그게 저기.”
정작 자신을 그렇게나 닦달했던 메멘토 모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던 스테치는, 활짝 열린 오두막 문 너머에 놓인 커다란 모루 하나를 발견했다.
‘음?’
그제야 스테치는 오두막 주변에 쌓여 있던 나무 상자들에 눈이 갔다.
안에 담긴 것은 집게와 망치등의 연장, 그리고 해진 작업복이었다. 그것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든 스테치는 눈앞의 드워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저기, 혹시…… 대장장이세요?”
그의 물음에 드워프가 보인 반응은 순식간이었다.
나사 하나 빠진 듯한 얼굴을 바짝 굳히더니, 스테치를 놔둔 채 문을 큰 소리가 나도록 닫아 버렸다.
쾅!
이 쌀쌀맞기 짝이 없는 응대에도 불구하고, 메멘토 모템은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역시 내 감각은 틀리지 않았어. 시간이 흘러서 많이 옅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진한 냄새가 나.』
‘냄새라니?’
그러자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사기 말야, 스테치. 저 남자의 몸과 집에서부터 코를 찌를 정도로 강한 사기가 풍겨져 나오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