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크루오늄
(104/203)
104화 크루오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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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크루오늄
2022.01.13.
지하 도시 아이젠에서부터 북부 대륙의 동쪽으로 이어지는 산맥, 록포드.
지표면 위에 두텁게 쌓인 눈, 그리고 그 아래로 굳어 있는 얼음 바닥과 절벽 때문에 등반하기엔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그렇게 사람의 접근이 뜸한 만큼,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귀중한 던전들이 많아 탐험가들이 꾸준히 찾아가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스테치와 엘레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얼마나 더 가면 되는지 물어봐 줄 수 있나요?!”
『거의 다 왔어.』
“거의 다 왔대!”
스테치가 거의 악을 쓰듯 외쳤다.
흩날리는 눈발. 외투를 뚫고 스며들어오는 냉기.
고도가 높아질수록 기상 상태는 시시각각 악화되어 갔고, 결국엔 육안으로 길을 찾기 어려운 상황까지 이르렀다.
그 뒤로 던전의 입구까지는 메멘토 모템의 길 안내를 받아 찾는 수밖에 없었다.
“휴…….”
던전으로부터 불과 50m 쯤 떨어진 지점에서 작은 동굴을 발견한 스테치와 엘레나는, 탐험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정비를 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젠을 떠나기 전, 스테치는 멜키오르에게 다시 한번 대장장이로서 힘써 줄 것을 부탁했다.
스테치가 벌린 도움의 손길은 팔이 썩어 문드러져 가는 멜키오르가 평생의 꿈을 이룰 마지막 기회였다.
결과적으로 멜키오르는 스테치의 제안을 수락했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사안들이 남아 있었다.
먼저 재료의 문제.
아티팩트는 그렇다 치더라도, 일반적인 철과 합금은 그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한다. 멜키오르는 이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오래 묵은 던전에서만 생성되는 광물, 크루오늄를 사용했다.
사람에겐 독이나 다름없는 사기를 가득 품은 탓에 대장장이들 사이에서는 써먹을 길이 없는 소재로 악명이 높았지만, 거꾸로 말하자면 그만큼 아티팩트의 기운을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금속이기도 했다.
‘그리고…….’
멜키오르가 사용했던 연장들.
사기를 흡수하여 만들어진 저주받은 아이템들은 아무래도 내구성이 평균 이하로 떨어지는데, 멜키오르의 연장들은 아티팩트가 일으킨 폭발의 여파로 한층 더 진한 사기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저주받은 아이템을 연장으로서 쓰기 위한 조건과 내구도 문제 등을 고려해 보았을 때, 스테치와 멜키오르에게 남은 기회는 한 번.
때문에 이번 던전 탐험은 아티팩트와 크루오늄의 확보를 겸하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 될 예정이었다.
“준비됐지?”
스테치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넉넉하게 여유를 잡은 밧줄로 자신과 엘레나를 연결한 뒤, 한창 눈이 쏟아지던 바깥으로 나가 던전 입구로 향했다.
동굴과 던전의 거리가 멀지 않아서 찾아 가는 길이 어렵진 않았다.
“여기네요.”
주변 지형을 뒤틀어 길을 형성되는 던전의 특성답게, 그 내부는 수정처럼 맑은 빙벽으로 되어 있었다.
메멘토 모템과 유령불로 길을 밝히자, 얼음에 반사된 빛으로 통로 전체가 아름답게 반짝였다.
얼어붙은 혹한의 환경을 탐험해 본 경험은 없었기에, 불행히도 《패스파인딩》은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가야겠군.”
한 마디로 던전의 가장 아래쪽이면서 제일 안쪽을 향해 무작정 이동하는 것.
스테치는 수직 통로 구조가 나올 때마다 픽을 박아 넣으며, 느리지만 최대한 안전하게 이동했다.
익숙지 않은 북부의 몬스터들에게 대처하기 위해선 안전이 필수였다.
“캬아악!”
아니나 다를까, 빙벽에 낀 서리를 걷어내고 튀어나오는 몬스터들. 《애니멀 인스팅트》의 감각으로도 상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에 당황한 스테치는,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녀석들의 심장박동과 호흡은 아주 느리고 작으니까 못 알아채는 것도 당연해. 그 정도로 일일이 당황하지 마.』
차분한 목소리로 경고하는 메멘토 모템의 말을 들으며 스테치는 눈앞에 나타난 몬스터를 훑어보았다. 푸른빛을 띤 비늘, 그리고 사족 보행형에 인간만 한 사이즈. 위협적인 발톱과 이빨.
『그리고 뒤로 물러서. 근접전으로 상대하기엔 까다로운 놈이다.』
빙혈 몬스터 ‘프로스트 베인’은 세로로 찢어진 동공으로 스테치 일행을 쳐다보며, 뱀 같은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스테치의 손짓을 신호로 받아들인 엘레나는 기다란 얼음 화살을 형성하여 냅다 쏴 날렸다.
프로스트 베인의 두터운 비늘을 예리한 얼음 결정 화살이 꿰뚫는 순간, 상처 부위에서 터져 나온 피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쩌저적!
공기 중으로 노출되기가 무섭게 얼어붙는 몬스터의 혈액을 본 스테치는, 근접전을 지양하라는 메멘토 모템의 지시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녀석들의 피가 검에 묻었다면, 그대로 얼어붙어 싸움에 지장이 생겼을 것이다.
“《파이어볼》!”
냉기에 익숙한 놈들에게 《파이어볼》의 효과는 발군이었다. 화염의 열기를 견뎌 낼 수 없었던 프로스트 베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키이잉-!
그 순간, 천장의 얼음 빙벽을 뚫고 나온 고드름 형태의 무언가가 스테치의 정수리를 노리고 떨어져 내렸다. 스테치보다도 한발 먼저 위협을 감지한 엘레나가 있는 힘껏 활대를 휘두르자, 튕겨 나간 고드름이 바닥에 착지하더니 보석처럼 붉은 모노아이를 번뜩였다.
“저, 저것도 몬스터인가?”
고드름같이 생긴 등껍질을 매달고 있는 몬스터의 이름은 ‘아이시클러’. 프로스트 베인과 더불어 남부에선 볼 수 없었던 북부 고유의 몬스터였다.
곤충처럼 마디 구조로 된 징그러운 다리들을 한껏 오므린 아이시클러는, 등껍질을 드릴처럼 회전시키며 스테치에게로 몸을 날렸다.
캉!
“어딜!”
스테치가 검으로 아이시클러를 막아 내느라 공격의 기세를 늦추자, 한창 밀리고 있던 프로스트 베인들이 그 틈을 타 역공을 가해 왔다.
놈들의 아이스 브레스 공격은 직선적이고 단조로워 피하기 쉬웠지만, 그것을 통로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아이시클러들이 보충해 주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방어하고 회피하느라 바쁜 나머지 마법을 쓸 여유가 없었다.
“으윽!”
팔뚝을 스치고 지나가는 아이시클러의 공격에 스테치는 신음했다. 찢어진 상처와 차가운 공기가 접촉하면서 쓰라려 왔다.
쿠르르르-.
스테치와 엘레나가 적들과 치고받는 동안, 불길한 진동이 던전을 뒤흔들었다.
아이시클러가 뚫고 나온 구멍들을 따라, 미세한 균열이 통로 전체로 서서히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파이어볼》이나 《에어 불렛》 같은 주문을 썼다간 당장에라도 통로 전체가 무너져 내릴 것이다.
“《아이스 웨이브》!”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를 그대로 휘두르자, 균열로 벌어진 통로 틈새들이 얼음으로 메꿔졌다. 훌륭한 대처였지만 결국은 임시방편. 스테치는 엘레나에게 외쳤다.
“더 넓은 공간까지 이동하자! 이대로 가다간 끝이 없겠어!”
엘레나는 아이시클러 하나를 발로 차 버린 다음, 스테치의 뒤를 따라 던전의 더 깊숙한 곳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그들이 마주하게 된 것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균열과 그 사이를 간신히 연결해 주고 있는 좁달막한 얼음 다리였다.
“우와아악!”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그대로 떨어지려던 스테치를 구해 준 것은 엘레나였다.
후방에서 화살을 쏴 대며 적들의 추격을 저지하던 엘레나는, 단검을 뽑아 바닥을 찍고선 로프를 잡아당겼다.
“끄으응!”
엘레나의 근력으로도 스테치의 체중을 붙들고 있기엔 역부족이었다.
박아 넣었던 단검이 얼음에 박힌 채 질질 끌려가는 동안, 스테치는 등반 장비로 가져온 픽 하나를 있는 힘껏 빙벽 틈에 꽂아 넣고선 절벽에서 단숨에 올라왔다.
“엘레나, 통로!”
스테치의 문제가 일단락된 것을 확인한 엘레나는 즉시 뒤를 돌아보며 굵직하고 기다란 얼음 화살을 만들어 냈다.
이번엔 처음부터 통로를 무너뜨리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엘레나는 최대한도로 시위를 당겼다.
마력으로 구성된 활줄에서 푸른 스파크가 튀는 순간, 엘레나의 화살이 번개처럼 날아갔다.
콰광-!
화살이 가한 충격으로 얼음덩어리들이 폭삭 내려앉아 통로를 봉쇄했다. 그러나 그 영향으로 지면과 함께 기다랗게 이어진 얼음 다리가 흔들리자, 스테치가 뿌려 댄 냉기가 구조를 보강해 주었다.
“가자!”
두 사람은 다리를 보강해 가면서 건너편으로 이동했다. 자칫 잘못하면 두 사람 다 떨어질 정도로 위험한 다리였지만, 아이시클러의 끈질긴 추격을 받느라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키이잉!
날카로운 파쇄음과 동시에 아이시클러들이 얼음덩어리들을 뚫고 나오자, 스테치는 팔을 크게 휘둘렀다.
“《테슬라》!”
보랏빛 전기 구체가 주변을 밝히며 허공에 붕 떠오르는가 싶더니, 스테치 일행을 향해 튀어 오른 아이시클러를 스파크로 날려 버렸다.
《테슬라》의 구체는 그 이후로도 다가오는 적들을 요격하며 충분한 시간을 벌어 준 뒤 사라졌고, 스테치는 다리를 완전히 건너자마자 주문을 시전했다.
“《에어 불렛》!”
바람의 탄환이 거대한 얼음 다리를 일격에 두 동강 내면서, 추격해 오던 몇몇 아이시클러들이 어두컴컴한 지하 저편으로 떨어졌다.
급박했던 분위기가 진정되자, 스테치는 턱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록포드 산맥에는 수많은 던전들이 널려 있었지만, 스테치가 들어온 이곳은 난이도가 특히 더 높았던 모양이다.
거기다 하필이면 몬스터들도 하나같이 낯선 놈들투성이라 그의 지식들은 대부분 통하지 않았으며, 자연스럽게 대응도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정신없이 싸우느라 사용한 마력을 회수하지도 못했다.
‘차라리 커스 아우라라도 쓸 수 있다면 손쉽게 제압했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어빌리티의 매개체가 되어 줄 저주받은 아이템이 수중에 하나도 없다. 나중에 시간이 비면 도감의 글귀 한 줄이라도 더 읽어 두겠다고 다짐한 스테치는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선 다음,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 * *
그 이후로도 얼음동굴 던전은 남부 출신인 스테치로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일면들을 보여 주었다.
평소에는 얼음 속에 잠복해 있다가 온기를 감지하면 달려드는 몬스터나, 근처에 있는 생물의 체온을 빨아먹고 성장하는 식물형 몬스터 등등. 온갖 위협 요소들이 가득했지만, 다행히도 큰 문제는 없었다.
“가장 중요한 크루오늄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엘레나의 물음에 스테치가 답했다.
“그거 말인데.”
어느덧 대공동의 입구에 도착한 스테치는, 화려하게 장식된 얼음문을 열어젖히고 안쪽에 발을 들여놓았다.
텅 빈 대공동 여기저기에 솟아오른 얼음 기둥들의 뿌리 부분 즈음에, 삐죽삐죽 튀어나온 검은 빛깔의 금속 덩어리. 금속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사기를 확인한 메멘토 모템이 중얼거렸다.
『틀림없어. 이게 멜키오르란 놈이 말했던 크루오늄이다.』
록포드의 던전들은 대체로 아주 오래되었고, 대공동은 그 안에서도 던전의 사기와 마력이 가장 집중된 포인트였다. 때문에 스테치가 크루오늄을 구하기에 최적의 장소는 바로 이곳을 포함한 근처의 던전들뿐이었다.
“크루오늄은 찾았으니까, 이제…….”
스테치는 쓴웃음을 지으며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얼음 조각을 집어 올리더니, 대공동 한가운데를 향해 힘껏 던졌다. 그러자…….
휘오오오-!
거센 냉풍이 몰아치며,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무언가가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위에 널린 얼음 입자들이 뭉쳐 큼지막한 구체를 만들어 내더니, 이윽고 거대한 눈알이 되었다.
“……채굴은 저 녀석을 끝장내고 난 다음에 하자고.”
스테치와 엘레나는 각자의 무기를 들어 올리고 임전태세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