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최후의 작품 (105/203)


105화 최후의 작품
2022.01.14.


쩌저적.

키퍼를 중심으로 날카로운 얼음 결정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눈알 전체를 빈틈없이 가득 메운 얼음 가시들은, 일반적인 백색 얼음과 달리 보기만 해도 불길함을 자아내는 검은 빛을 머금고 있었다.

변화를 마친 키퍼는 그제서야 눈알을 뒤룩거리며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불청객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녀석이 스테치와 엘레나를 발견하기까지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스테치와 눈이 마주친 키퍼는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한편, 빼곡히 자라난 얼음 가시들을 꿈틀거렸다.

“……!”

스테치는 본능적으로 손을 휘둘러 두꺼운 얼음 방벽을 세운 뒤 《크로스 윈드》를 발동시켰고, 그와 동시에 키퍼의 몸이 ‘폭발’했다.

파바밧!

전방위로 일제히 발사된 수십, 수백 개의 얼음 가시촉이 대공동의 내벽과 얼음 방벽 위로 쏟아져 내렸다. 초장부터 키퍼가 퍼붓는 맹렬한 공격에 엘레나가 당황스러워하는 사이, 스테치는 반격을 개시했다.

“《에어 불렛》!”

방패막이로 썼던 빙벽이 터지며, 수많은 얼음 파편들이 키퍼에게로 날아갔다. 그러나 그 정도로 키퍼의 신체에 상해를 입히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스테치도 별반 기대는 안 했는지, 키퍼의 상태를 확인하지 않은 채 곧바로 《파이어볼》을 날렸다.

푸화아악!

화염 덩어리가 키퍼를 휘감으며 자그마한 폭발을 일으켰다. 녀석이 그 충격으로 잠깐 움직임을 멈추고 있는 동안, 스테치는 주머니에 있던 무언가를 한 움큼 쥐어 엘레나에게 던져 주었다.

“그걸 써! 녀석에게 잘 먹힐 거야!”

그가 넘긴 것은 다름 아닌 패네트레이터의 화약탄들.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것을 스피라투스의 주둥이 안에 집어넣었다. 화약탄들을 활로 쏘아 보내기 용이한 형태로 재구성한 엘레나는, 빠른 속도로 활시위를 당겨 댔다.

펑! 펑!

“《테슬라》!”

스테치는 스파크를 튀기는 전기 구체 두 개를 허공에 띄워 놓고선 키퍼의 배후로 우회했다. 엘레나의 폭발 화살과 《테슬라》의 협공에 키퍼의 정신이 쏠려 있을 때, 스테치는 얼음 기둥을 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라 전기 에너지가 인챈트 된 검을 크게 휘둘렀다.

“하!”

카앙!

마법으로도 끄떡없던 키퍼에게 아주 조금이지만 스테치의 검이 박혔다. 그러자 키퍼의 주변에서 검은 고드름들이 생성되더니, 스테치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들었다. 공중에서 피할 길이 없었던 그는 《에어 버스트》를 날려 키퍼를 밀어냄과 동시에 고드름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콰장창!

바닥에 착지한 스테치는 이를 악물었다. 싸늘한 감각을 따라 고개를 떨구어 보니, 허벅지에는 어느새 굵직한 고드름 하나가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실려 있던 검푸른 냉기는 빠른 속도로 피부를 따라 퍼져 나갔다.

마치 동상이라도 걸린 것처럼 시퍼렇게 변색한 피부를 확인한 스테치는, 가시를 뽑아 던져 버린 뒤 《리커버리》로 상처를 회복했다. 까딱 잘못했으면 피부가 아예 괴사해 버렸을 것이다.

“젠장, 더럽게 차갑잖아.”

스테치는 엘레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쏜 화살들은 하나같이 요란한 폭발을 일으키며 키퍼를 자극하고 있었지만, 그다지 큰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휘오오—.

주변의 빙설을 잔뜩 끌어모은 키퍼는 자신의 형태를 변화시켰다. 눈알을 중심으로 형성된 그것은 뾰족한 이빨을 가진 외눈의 해골이었다.

“!”

키퍼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제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던 좀 전과는 달리, 이번엔 적극적으로 근접전을 걸어왔다. 화살을 쏘던 엘레나는 주둥이를 쩍 벌리고 달려드는 키퍼를 피하기 위해 죽기살기로 몸을 날렸다.

『이 자식……!』

키퍼의 행동은 마치 상대의 수준을 가늠하며 적합한 공격 방식을 시험해 보는 것 같았다. 키퍼로서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행동이었겠지만, 메멘토 모템의 눈엔 오만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허공을 깨문 키퍼는 그대로 방향을 꺾어 스테치에게로 날아갔다. 갑작스런 타깃 변경에 미처 피할 틈이 없었던 그에게 키퍼가 날카로운 어금니를 들이밀었다.

“아텔리어 씨!”

콰지직!

“끄으응!”

스테치는 검을 키퍼의 주둥이 사이로 끼워 넣어 다물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키퍼는 검에 매달린 스테치를 그대로 땅에 찍어 누른 뒤, 지면을 따라 밀어붙였다. 등짝이 갈려 나가는 고통에 스테치는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키퍼의 강력한 치악력으로 검이 박살 나기 일보 직전, 스테치는 녀석의 주둥이 안에 팔을 집어넣고선 주문을 먹였다.

“《에어 불렛》!”

망치라도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스테치로부터 튕겨져 나간 키퍼의 머리통은, 바닥을 구르며 한참을 미끄러졌다.

땡그랑!

키퍼는 무언가를 으적으적 씹어 대다가 스테치의 앞으로 툭 뱉어 냈다. 그것은 본래의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진 그의 검이었다. 쓰러져 있던 스테치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동안, 지척까지 다가온 키퍼가 다시 한번 입을 벌렸다.

콰지끈!

그러나 순순히 그것을 놔둘 엘레나가 아니었다.

양다리를 지면에 탄탄하게 고정한 그녀가 두 번째 화살을 발사하자, 온전히 스테치에게만 집중하던 키퍼가 크게 밀려났다.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훨씬 더 강력한 한 방을 먹여 줄 수 있었겠지만, 스테치를 구하기 위해선 이 정도가 한계였다.

“?!”

잠깐 쉴 여유라도 주면 좋으련만, 키퍼는 또다시 물과 냉기를 빚어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 유리처럼 맑고 투명한 얼음 조각 하나를 전방에 생성시킨 키퍼의 동공에서 알 수 없는 빛이 반짝였다.

『피해라! 저건…….』

이제껏 조용히 있던 메멘토 모템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 그와 동시에 키퍼의 눈알에서 응집된 에너지가 터져 나오더니, 푸른 광선이 발사되었다.

대공동을 통째로 꿰뚫을 듯한 기세로 발사된 굵은 광선. 그 궤적을 따라 연기처럼 흩날리는 한기와 함께 커다란 얼음 덩어리들이 자라났다. 정확히 자신을 노리고 날아오는 광선을 피하기 위해 스테치는 대공동의 얼음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영하를 넘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까지 떨어지는 기온에 스테치는 헛숨을 들이켰다. 저런 공격을 정통으로 맞았다간 메멘토 모템의 어빌리티로도 부활할 수 없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광선 공격이 멎자 기둥 밖으로 얼굴을 내민 스테치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얼음으로 된 프리즘, 그리고 거울처럼 깨끗한 반사판들을 무수히 만들어 낸 키퍼는 그것들을 복잡한 각도로 재배열시켜 허공에 띄웠다.

쥬와아아앙-!

프리즘을 통과하며 사방으로 퍼져 나간 빛줄기들이 반사판에 닿았고, 궤도를 꺾어 각각 스테치와 엘레나를 향해 뻗어 나갔다. 두 사람은 다급히 다른 엄폐물을 향해 뛰어갔지만, 이대로 가다간 키퍼의 공격에 당할 것이 뻔했다.

‘뭔가, 뭔가 없나?’

주위를 둘러보던 스테치는 얼음 기둥 아래쪽에 삐죽 튀어나와 있던 크루오늄에 시선이 미치는 순간,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차가운 금속 덩어리 위에 손을 얹은 그는 즉시 어빌리티를 발동시켰다.

“커스 디바우러!”

크루오늄은 사기를 머금은 금속. 즉, 그 본질은 저주받은 아이템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커스 디바우러를 사용하여 사기를 흡수하는 것도 가능할 터.

슈화아악-.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크루오늄으로부터 발산되던 진한 사기가 스테치의 반지로 빨려들어 가며 반짝이는 빛무리를 일으켰다. 전신에 충만하게 차오르는 힘을 체감하며 손아귀를 강하게 움켜쥔 스테치는, 기둥 밖으로 뛰쳐나감과 동시에 마법을 날렸다.

《레인포스드 액티브 스킬 : 에어 불렛 → 에어 드릴. 파쇄 능력을 갖춘 공기의 회전압축탄을 발사합니다.》

투콱!

얼핏 보기엔 《에어 불렛》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주문이었지만, 그 위력은 차원이 달랐다. 프리즘을 박살 낸 공기탄은 그대로 광선 자체를 관통하더니, 기어이 키퍼의 눈알 위에 적중하며 거대한 균열을 남겨 놓았다. 이제껏 한 공격 중 유일하게 눈에 띄는 성과였다.

“!”

“엘레나, 기둥을 부숴!”

기회가 생겼을 때 속공으로 몰아쳐야만 한다. 키퍼의 눈에서 발사되던 광선의 빛이 멎자마자, 스테치는 엘레나에게 의미를 알 수 없는 지시를 남기고 대공동의 얼음 기둥들 중 하나를 향해 돌진했다.

엘레나는 망설임 없이 활시위를 당겼다.

퍼벙!

화살에 의해 얼음 기둥이 서서히 옆으로 기울어졌다. 스테치가 쓰러지려는 기둥 아래까지 달려가 손가락을 대는 순간, 폰두스의 효과를 받은 기둥의 무게는 0이 되었다.

“으랴아아아아!”

자신의 몸뚱이보다 수십 배 이상의 크기를 자랑하는 얼음 기둥에 손톱을 박아 넣고 움켜쥔 스테치는, 그대로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그것을 있는 힘껏 집어 던졌다. 손끝을 벗어나자마자 무게가 원래대로 돌아온 얼음 기둥은 그대로 날아가 키퍼의 눈알 정중앙을 후드렸다.

콰아아앙!

강화된 근력과 얼음 기둥의 질량이 합쳐졌을 때 발휘되는 파괴력은 실로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대포알처럼 튕겨져 나간 키퍼는 대공동 한쪽 벽에 꽂히며 새하얀 먼지구름을 일으켰고, 스테치는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에어 드릴》!”

남은 부스터의 힘을 모두 쏟아부은 주문. 날카로운 파쇄음을 일으키며 회전하는 공기탄이 발사되었고, 천천히 균열을 일으키던 키퍼에게 최후의 쐐기를 박아 넣었다.

콰르르륵!

눈알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 스테치의 마법이 내부에서 폭발을 일으키자, 키퍼를 구성하던 얼음은 형체도 남기지 않고 산산 조각났다.

* * *

“준비됐소, 영감님.”

도리안의 말에 멜키오르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대장장이를 그만둔 지 오래인 그에게 남은 거라곤 쓰다 만 재료 약간, 그리고 낡아빠진 연장뿐이었다. 금속을 녹이거나 가열할 때 필수인 노(爐)나 다른 것들은 이미 옛날 옛적에 처분해 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손을 벌려 준 것은 다름 아닌 도리안이었다.

“정말 괜찮겠나? 나 같은 놈이랑 이렇게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들통나면 자네는…….”

“그런 말 하기엔 이미 늦었다는 생각 안 드슈?”

도리안은 멜키오르의 오두막에서 가져온 연장들을 수레에 실으며 투덜거렸다.

“어차피 여기서 당신이 무얼 하든 간에 그 결과는 인정되어서도, 알려져서도 안 됩니다. 뒤집어 말하면 내가 여기에 어떻게 관여하든 간에 들킬 일은 없다는 소리지.”

“뭐 그런 막무가내 같은…….”

어이없어하는 멜키오르에게 도리안이 말했다.

“드워프에게 있어 가장 큰 형벌은 자신이 남긴 족적이 무시받고 잊혀지는 것. 그건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소?”

“…….”

멜키오르의 실험에서 사상자는 없었다.

하지만 그 위험천만한 실험이 실패한 이후로, 그가 일궈 낸 업적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아이젠의 기록에서 말소되었다. 멜키오르가 당장 사형당하지 않고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것은, 살아 있어 주는 쪽이 더 고통스러운 벌이 되기 때문이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겠지. 하지만 최소한, 당신을 돕겠다고 나선 그 인간 꼬맹이와 나는 기억할 거요.”

도리안은 수레를 끌며 자신이 운영하는 대장간으로 향했다.

좁다란 골목을 이리저리 꺾어 큰 대로까지 나오자, 벽에 기댄 채 기다리고 있던 스테치와 엘레나의 모습이 멜키오르의 눈에 들어왔다. 그의 옆에는 던전에서 가져온 아티팩트, 그리고 배낭 한가득 캐 온 크루오늄이 놓여 있었다.

“준비는 다 됐나요?”

“물론이지.”

후드를 써서 얼굴을 가린 멜키오르, 그리고 도리안이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쇳물이 절절 끓고 있는 용광로로 인해 이미 실내 온도는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멜키오르와 스테치가 웃옷을 벗고 작업복으로 갈아입는 것을 지켜보며, 엘레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세, 브라이언.”

그리고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난 멜키오르가 스테치에게 말했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선언, 혹은 결심과도 같았다.

“이것이 대장장이 멜키오르가 만드는 최후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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