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배후에 서 있는 자들
(107/203)
107화 배후에 서 있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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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배후에 서 있는 자들
2022.01.16.
“태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뭘, 돈 받고 하는 건데 이 정도쯤은.”
썰매견들을 몰던 드워프, 토드가 말했다.
도리안에게 적당히 값을 치른 스테치는 아이젠에서 록포드 산맥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거스틴을 습격했던 집단의 뒤를 쫓을 겸, 다음 던전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도시 바깥은 간간이 눈보라가 몰아치는 데다, 때에 따라선 눈이 허리 높이까지 차올라 걷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기상 상태가 썩 좋진 않았지만, 두 사람은 토드의 개 썰매를 탄 덕분에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설마 이대로 바깥에서 야영해야 되는 건 아니겠죠?”
쏟아지는 눈발에 엘레나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그 소리를 귀신같이 들은 토드가 호탕하게 웃어 대며 말했다.
“설마 그런 짓을 시킬까 봐? 조금만 더 가면 나 같은 썰매꾼들이 자주 쓰는 은신처가 있지. 거기서 하루를 보내고 이동할 거야.”
토드의 직업은 썰매꾼. 사냥이나 운송을 도맡아 하던 그는, 직업 특성상 근처에 쉬어 갈 만한 장소들이 어디에 있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떨어질 때까지 썰매를 타고 달리던 세 사람은, 곧 안전하게 밤을 보낼 수 있는 동굴 하나를 찾아냈다. 토드의 말대로 썰매꾼들이 자주 애용하는 장소인지, 안쪽에는 간단한 취사도구나 불을 때기 위한 마른 장작들이 놓여 있었다.
“다행히 오늘은 아무 이상 없구나. 정리를 워낙 잘해 놔서 그런지, 가끔 짐승들이 여길 자기 굴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더라고.”
토드는 머리 위에 쌓인 눈을 털어 내며 부싯돌로 불을 피웠다. 금세 훈훈한 열기가 동굴 안에 가득 찼고, 눈을 녹여 물을 끓인 그는 스테치와 엘레나에게 차를 권하며 물었다.
“고기 좀 사겠는가? 마침 어제 잡은 사슴이 있거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장사하는 토드의 모습에 피식 웃은 스테치는 주머니에서 동전 몇 닢을 꺼내 주었다.
“이걸로 주실 수 있는 만큼 주세요.”
“감사. 잠깐만 기다리게.”
토드는 미리 잘라 놓은 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썬 다음, 꼬챙이에 꿰어 구워 주었다. 따뜻한 불가 옆에 앉아 눈 구경을 하며 즐기는 식사는 훌륭했다.
잠시 후, 식사를 완전히 마친 토드는 나무토막을 더 집어넣으며 말했다.
“불침번은 내가 설 테니 푹 자 두게. 내일 눈발이 잦아들면 바로 출발할 테니.”
잠자리를 준비하러 토드가 잠깐 멀어진 사이, 스테치는 엘레나와 함께 동굴 입구 쪽으로 걸어 나갔다. 눈발은 더더욱 심해져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가 되어 있었다.
스테치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저쪽에 뭐가 있단 말이지?’
『그래. 사기 때문에 처음엔 근처에 던전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웬 엉뚱한 놈이 풍겨 대는 거였어. 넌 인간이라 잘 모르겠지만, 저건 귀에다 대고 ‘나 여기 있다~’ 하면서 소리를 질러 대는 거랑 마찬가지라고.』
엘레나는 메멘토 모템의 말을 스테치의 입으로 전해 듣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모르겠어요. 전 마력이라면 모를까, 사기에는 감각이 비교적 둔해서…….”
우웅-.
스테치는 난데없이 허리춤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떨림은 다름 아닌 칼집에 들어가 있던 할로우 블레이드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뭐야?”
그 순간, 입구 근처에 묶여 있던 썰매견들이 으르렁댔다. 심상찮은 낌새를 느낀 스테치와 엘레나가 긴장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려는 찰나, 메멘토 모템이 외쳤다.
『온다!』
멀뚱히 서 있는 스테치와 엘레나의 사이로, 혹한의 냉기보다도 서늘한 무언가가 옆구리를 스쳤다. 눈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분명 무언가가 두 사람을 ‘지나갔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스테치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스테치 일행이 쓸 침낭을 펴 주던 토드는 어느새 상반신을 축 늘어뜨린 채로 다가오고 있었는데, 몸에서는 새하얀 한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끄으윽.”
사람에게서 나왔다고는 믿기 힘든 기괴한 목소리가 벌어진 토드의 입 틈으로 새어 나왔다. 두 눈은 까뒤집어져 흰자위만 남아 있었는데, 꽤나 소름 끼치는 비주얼이었다. 스테치는 물론이고 엘레나조차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되지 않아 머뭇거리는 동안, 메멘토 모템이 입을 열었다.
『레이스(Wraith, 망령)!? 하지만 대체 어떻게…….』
‘뭐야, 그게?’
본디 레이스는 아스트랄 도메인에 속한 이계의 존재. 그런 녀석이 사람이 사는 세계인 마테리얼 도메인(Material Domain, 물질계)을 저렇게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은 세계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꼭 그런 것도 아닌가…….』
메멘토 모템은 가렛의 아티팩트인 타른카페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티팩트의 힘을 빌린 가렛조차 다른 차원에 오래 머물 수 없었던 것을 감안해 보면, 확실히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말이 되지 않았다.
“크아아악!”
야만인처럼 돌변한 토드가 도끼를 휘두르며 돌진해 왔다. 사이드 스텝을 밟아 회피한 스테치는, 메멘토 모템을 다그치며 물었다.
‘야, 한눈팔지 마! 대체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알고 있으면 설명 좀 해 보라고!’
『유령이야. 너나 엘프를 건드릴 수 없어서 대신 저 드워프의 몸으로 들어간 모양이군.』
“유령?!”
메멘토 모템이 한 말의 의미를 제대로 곱씹어 보기도 전에 깜짝 놀란 스테치가 육성으로 되묻자, 옆에 있던 엘레나도 덩달아 놀라 토드를 바라보았다.
『저건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통상의 무기로는 아스트랄체인 저 녀석을 대적할 수 없어. 하지만…… 나라면 가능해.』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어빌리티 시져를 사용해 저 드워프의 몸으로 들어가면, 레이스가 더 이상 나돌아다니지 못하도록 완전히 제거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신중하게 생각해.』
“왜?!”
캉!
스테치는 팔을 들어 완갑으로 토드의 도끼를 받아 냈다. 뒤쪽에서는 묶여 있던 썰매견들이 잔뜩 흥분하여 짖어 대고 있었다.
『사람의 몸은 동시에 그렇게나 많은 영혼을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많아야 두 개인데, 하물며 세 개가 동시에 들어가면…….』
뒷말을 흐리긴 했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똑똑히 알아들었다. 스테치는 토드를 강하게 밀어내며 말했다.
“그게 그냥 죽이자는 거랑 뭐가 달라?!”
“어떻게 하죠?”
엘레나의 질문에 스테치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무고한 토드를 죽일 수는 없었다. 제압해서 묶어 두는 편이 나으려나? 그러나 빙의당한 토드의 피부는 체내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에 의해 서리가 끼고 있었다. 가만히 놔둬도 토드의 생명이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우우웅-.
더더욱 강하게 진동하는 할로우 블레이드. 토드를 노려보던 스테치가 무심코 손을 뻗어 검의 자루를 붙잡으니, 진동이 멎
고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검을 뽑아 토드에게로 겨누고 있었다. 스스로도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미 몸은 움직인 뒤였다. 토드를 향해 뻗어진 할로우 블레이드의 풀러로부터, 스테치가 처음 검을 받았을 때와 같은 황금색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건…….』
“캬아아악!”
이성을 잃은 토드가 스테치를 달려드는 찰나, 할로우 블레이드의 빛이 동굴 전체를 밝힐 정도로 강렬해졌다.
“윽!”
너무나도 밝은 섬광에 아예 고개를 돌려 버린 스테치와 엘레나. 잠시 후 빛이 사그라들 때 즈음, 스테치는 천천히 시선을 앞으로 되돌렸다.
당장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널브러진 토드. 쥐고 있던 도끼는 어느새 땅에 떨어져 있었고, 창백하게 질려 있던 피부색도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반응은 없었지만 숨은 쉬고 있는 걸 보니 잠깐 정신을 잃은 듯했다.
“뭐였지, 지금 그건?”
“그, 글쎄요.”
어리둥절해진 스테치는 검과 토드를 번갈아 살펴보느라 여념이 없었지만, 메멘토 모템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할로우 블레이드의 빛을 받은 레이스는 토드로부터 말끔히 떨어져 나간 것도 모자라, 완전히 이 세상에서 소멸해 버렸다.
『최소한 방금 것으로 레이스는 사라졌어. 상황이 일단락된 것 같기는 한데…….』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경계를 늦추지 마, 스테치. 바깥에서 똑같은 기운이 더 많이 느껴지고 있으니까.』
그의 말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스테치는 곧 의기양양하게 검을 흔들며 말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 검 굉장하잖아? 이것만 있으면 전부 물리칠 수 있는 거 아냐?”
하지만 그런 스테치의 기대와는 달리, 좀 전까지만 해도 밝게 빛나던 할로우 블레이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빛은커녕 진동조차도 없자 스테치는 뻘쭘한 표정으로 검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뒤통수를 긁어 댔다.
“불안하게 또 왜 이래…….”
“아텔리어 씨, 토드 씨는 괜찮은 건가요?”
“응. 레이스는 깔끔하게 제거된 모양이야. 그런데 이 녀석 말로는 근처에 비슷한 기운이 또 느껴진대.”
엘레나에게 설명하던 스테치는 얼굴을 찡그렸다. 애초에 왜 이런 곳에서 레이스 같은 초자연적 존재가 나타나서 그들을 덮친단 말인가?
“그렇다면 큰일이잖아요. 빨리 이곳에서 빠져나가…….”
엘레나는 문득 완전히 뻗어 버린 토드를 응시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썰매견들에게 차례로 시선을 옮긴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는 건 불가능하겠군요.”
아무리 썰매를 몰고 나서도 저렇게 눈보라가 거세면 길을 잃고 헤매다 얼어붙게 될 것이다. 스테치도 똑같은 걱정을 하느라 입을 다물었는데, 고민하는 두 사람의 침묵을 깬 것은 메멘토 모템이었다.
『고민할 게 뭐 있어? 직접 가서 해치우면 될 거 아냐. 말해 두겠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레이스는 분명 너를 노리고 온 게 틀림없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드워프의 몸에 빙의한 이후론 너만 집요하게 공격했잖아. 뻔하지.』
메멘토 모템이 코웃음 쳤다.
『녀석들이 오는 방향이 어딘지는 내가 안내해 줄 수 있어. 네가 직접 소굴로 걸어 들어가면 저 드워프에게 또 다른 레이스가 빙의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스테치는 검의 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 * *
“결과는?”
“실패했습니다.”
부하의 보고를 들은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몸짓에서는 희미하게 실망한 기색이 느껴졌다. 기껏 목숨 하나를 소모해서 만든 레이스로 공격을 감행했건만, 그걸 우습게 저지하다니 상대는 여간 보통내기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역으로 그의 마음에 어떠한 확신을 서게 만들었다.
“틀림없다. 녀석이야말로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우리들의 오랜 숙적. 기나긴 기다림 끝에 또다시 나타났구나.”
이윽고 입을 연 그의 목소리는 마치 거친 모래나 쇠처럼 거칠고 날카로웠다.
“습격에 대비하라. 놈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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