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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대적자 (108/203)


108화 대적자
2022.01.17.


스테치는 메멘토 모템의 안내를 따라 눈길을 헤치고 나아갔다.

엘레나는 혹여 레이스가 자신이나 스테치의 몸을 강탈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살짝 내비치긴 했지만, 스테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계의 존재는 아티팩트 소유자의 몸으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이는 아티팩트가 소유자와 형성하는 독특한 정신적 연결 때문이다. 이러한 법칙이 적용되는 것은 메멘토 모템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것만 됐으면 진작에 제라드 모가지부터 그어 버리고 모든 걸 끝낼 텐데 말야.’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스테치의 설명에 엘레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심해라. 그건 최소한의 방어일 뿐, 완전한 보호는 아니야. 아스트랄체가 공격하는 방식은 빙의만 있는 게 아니야.』

눈으로 쌓인 비탈길을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가고도 한참 더 이동하자, 그들은 이름도 없는 어느 작은 숲 하나를 발견했다. 혹한의 추위에도 꿋꿋이 자라난 나무들과 덩어리져서 굳은 얼음들. 겉으로 보기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숲이었다.

“이 이상 네놈을 선지자님의 앞으로 가게 만들 수는 없다.”

눈보라 너머에서도 똑똑히 들리는 상대의 목소리. 나무들 사이로 천천히 걸어 나오며 모습을 드러낸 괴한은, 로브와 후드로 전신을 가리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인 스테치조차 눈앞의 인물이 범상찮음을 알아챌 수 있었기에, 그는 곧바로 할로우 블레이드를 뽑아 들었다.

“네가 이 소란의 주동자냐?”

“…….”

그러나 그 질문에 상대가 대답하는 일은 없었다.

『엉?!』

슈화아악-.

눈 깜짝할 사이에 상대가 사라지고, 그가 있던 자리에는 주인을 잃은 로브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스테치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어느 곳에서도 괴한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차가운 공기가 스테치의 전신을 관통했다.

“으헉!”

눈이 내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한기가, 뼈와 혈관을 따라 몸 이곳저곳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단단히 껴입은 털 외투가 무색하게 스테치의 피부는 빠른 속도로 창백하게 변했다.

다행히도 증상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두 번 이상 당해 주고 싶지는 않은 공격이었다. 엘레나는 갑자기 주저앉는 스테치를 보곤 놀라 손을 뻗었다.

“괜찮으세…… 으윽?!”

엘레나는 스테치와 마찬가지로 바닥에 쓰러졌다. 피부가 통째로 얼어붙는 감각에 사지가 마비되고, 곧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해질 지경이었다.

이때, 놀란 것은 메멘토 모템도 마찬가지였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앞에 서 있던 괴한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스스로 인두겁을 벗어 던지고 이계의 존재가 되는 것도 모자라서, 이성까지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젠장, 오늘은 이상한 일투성이구만.』

스테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상대는 일반적인 무기나 마법이 통하지 않는 레이스. 하지만 운이 좋게도 지금의 스테치에게는 할로우 블레이드가 있었다.

“어디, 너도 한번 당해 봐라!”

스테치는 쥐고 있던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토드에게 들러붙은 레이스를 소멸시켰던 그 빛이, 할로우 블레이드로부터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캬아아악!”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괴한의 목소리가 숲의 나무들 사이로 메아리치며 울려 퍼졌다. 상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던 스테치는 주변을 둘러보다 중얼거렸다.

“쫄보같이 굴기는…… 혹시 죽었나?”

『거의. 죽기 전에 도망쳤어.』

스테치는 힘겹게 자리에서 눈을 털고 일어났다. 간신히 움직일 수 있게 된 엘레나도 붙잡아 일으킨 그는, 메멘토 모템이 알려 주는 길을 따라 숲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레이스가 된 괴한은 메멘토 모템의 도움으로 추적할 수 있었는데, 그 흔적은 숲 중앙쯤에 자리 잡은 거대한 동굴 입구로 연결되어 있었다.

“잠깐…… 여긴 그냥 동굴이 아니라 던전이잖아.”

던전 특유의 양식과 생성될 때 함께 발견되곤 하는 첨탑형 구조물들. 탐험가인 스테치는 그것들을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괴한이 던전 안으로부터 나왔단 말인가?

이렇게 던전의 입구가 버젓이 서 있는 것을 알았다면 토드 같은 사냥꾼들이 근처에 야영지를 잡을 리가 없었다. 그런 스테치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이 장소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은 이 주변에 펼쳐진 인식 장애의 마법의 덕택이야. 하지만 너나 엘프는 처음부터 나한테 ‘안내’를 받고 온 덕분에 효과를 받지 않았던 거지.』

던전에 가까워진 지금, 할로우 블레이드의 진동과 빛은 최고조로 높아진 상태였다. 스테치는 안개처럼 황금색 빛무리를 흩뿌리는 검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이 검이 없었다면 레이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겠지.”

설마 할로우 블레이드에 그런 힘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스테치는 멜키오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용자를 보좌한다는 능력에 걸맞게, 검은 어려운 순간을 타파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해 주었다.

『가자. 아스트랄체 특유의 썩은 내가 던전 밑바닥에서부터 풍겨 오고 있어.』

스테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던전에 발을 들여놓았다.

레이스의 영향 탓인지는 몰라도, 던전 안에서는 몬스터는커녕 그 자취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스테치는 안심하지 않고 더더욱 긴장하며 앞으로 내밀고 있던 할로우 블레이드를 바짝 품으로 끌어당겼다.

“아까 그 사람이,“

정신을 한창 집중하고 있던 스테치의 뒤에서, 침묵을 유지하던 엘레나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스테치가 시선을 돌려 보니, 유령불의 랜턴을 들고 있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가 쫓고 있던 타깃이었을까요?”

“잘 모르겠어. 노벨리아가 제대로 조사했다면 네 생각이 맞겠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어거스틴을 살해한 집단은 마침 이 부근에 거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걸 안 상태에서 습격까지 당하게 되니, 너무나도 절묘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정 짓기엔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조금…… 꺼림칙하지 않나요?”

어거스틴은 대체 어쩌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집단이랑 엮였단 말인가? 단순히 상인들 간 암투에 연루된 이들치고는 지나치게 이질적이고 위협적이었다.

“생각은 나중에 하자고. 이 집단의 수장이 여기 있다면, 대가리를 박살 내는 한이 있더라도 정보를 뽑아낼 테니까…… 모든 비밀은 그때 풀리겠지.”

스테치는 메멘토 모템의 빛을 앞으로 비췄다. 록포드 산맥의 경우와 달리 그들이 들어온 던전은 바닥에 잘 정돈된 포석이 깔려 있었다. 던전이라기보단 흡사 거대한 지하 시설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쪽에…….”

엘레나가 가리킨 방향으로, 진한 핏방울이 떨어져 있었다. 혈흔을 따라 모퉁이를 돌아가던 두 사람은, 벌거벗은 채 바닥에 쓰러져 죽어 있는 한 남성을 발견했다. 죽기 전까지 꽤나 고통스러웠나 본지, 그 얼굴은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피부는 불구덩이에 몸을 던진 것처럼 새까맣게 타 버려 희끗희끗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주변에는 텅 빈 플라스크와 병들이 한가득 굴러다녔다. 남자의 상태를 살핀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우리가 쫓던 그놈이다. 인간형으로 되돌아온 거야.』

“왜 이렇게 된 거죠?”

엘레나는 병 입구 쪽으로 코를 가까이 댔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달콤한 냄새는 그녀도 기억하고 있는 익숙한 것이었다.

“회복 물약……?”

『한심하긴.』

메멘토 모템은 코웃음 쳤다. 남성이 입은 화상은 분명 할로우 블레이드에 의한 것. 영혼에 직접 가해진 피해를 약으로 다스려 보겠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시체에 할애해 줄 시간은 없다고 판단한 스테치는 남자의 몸뚱이를 뒤로하고선 계속 나아갔다. 그러나 스테치와 엘레나의 경계가 무색하게도, 대공동으로 나아가는 길 내내 몬스터를 포함한 사람의 흔적은 눈 씻고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아니야…….』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아주 쫙 깔려 있구먼.』

스르륵.

갑자기, 대공동의 입구 반대편에 짙게 깔린 어둠을 뚫고 후드와 로브를 두른 이들이 나타났다. 얼핏 봐서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어느새 스테치 일행을 둥글게 포위하고 있었다.

대체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다가 나온 거지? 스테치는 식은땀을 흘리며 할로우 블레이드의 자루를 붙잡았다. 전방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괴한들이 좌우로 비켜섰고, 뒤쪽에 서 있던 거구의 남자가 스테치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왔다.

“어서 오게, 대적자여.”

뱀이 쉭쉭 대는 듯한, 알아듣기 어려우면서도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남들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그 모습에 스테치는 반지를 상대에게 겨누며 말했다.

“어차피 너도 순순히 내가 원하는 말을 들려줄 생각은 없을 거 아냐? 닥치고 이거나 처먹어.”

스테치의 반지로부터 가느다란 황금색 빛줄기 하나가 쏘아져 나가, 남자의 양미간을 꿰뚫었다.

팟!

“…….”

뒤쪽으로 한두 발자국 정도 주춤거린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스테치는 상대에게서 무슨 반응이 나올지 지켜보고 있었지만, 곧 상대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흥미로운 묘기였다.”

『젠장.』

메멘토 모템의 정신은 남자의 몸을 장악하기도 전에 튕겨져 나와 버렸다. 노벨리아를 노리던 암살자와 마찬가지로 눈앞의 남자 또한 나름의 방어책을 갖춰 두고 있었다.

남자는 스테치의 위협에 아랑곳 않고, 그가 뽑아 들고 있던 검을 흥미 깊은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대공동에 들어올 때 즈음부터 할로우 블레이드는 거의 등대의 불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파사(破邪)의 빛? 아니, 조금 달라. 과연, 신께서 직접 우리의 적이라고 지명할 만큼의 힘은 있는가?”

“무슨 괴상한 소릴 하는 거야?”

할로우 블레이드는 스테치의 적의에 감응하여 진동했다. 그러자 남자가 말했다.

“지나친 자신감은 좋지 않네. 설마 우리가 일부러 이곳까지 유인했다는 사실조차 눈치 못 챌 정도로 어리석은 건 아니겠지?”

그 말과 동시에 두 사람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던 괴한들이 한 발짝 크게 다가왔다. 스테치의 손에 부하가 둘이나 죽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데도 자신만만한 것을 보아하니,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갑작스런 기습에 대비할 수 있도록 자세를 살짝 낮춘 스테치는 검극을 남성에게로 향했고,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피차 각오는 된 모양이군.”

슈오오-!

로브를 쓴 괴한들이 허공으로 녹아들었다. 새까만 연기로 화한 그들은 남자에게로 모여들더니, 이윽고 거대한 몬스터의 모습으로 변했다. 펄럭거릴 정도로 커다란 로브와 낫, 그리고 그 밑으로 드문드문 드러나는 썩어 문드러진 손.

스테치의 앞에 선 사신, 리퍼가 입을 열었다.

“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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