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예정된 수순
(11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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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예정된 수순
2022.01.19.
‘뭐지?’
처음 리퍼가 느낀 것은 의아함이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온 빛 때문에 잠시 물러서긴 했지만, 그 정도 힘이 리퍼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스테치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터. 이제 와서 저런 저항에 무슨 의미가 있지?
살짝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가만히 서 있던 스테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결과는 리퍼의 기대 이하였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검의 궤도. 힘이 빠져 빈틈이 훤히 보이는 스텝. 어느 것 하나 특별해 보이진 않는다.
푸욱!
리퍼는 낫으로 검을 막아 내는 한편, 남는 손으로는 수도(手刀)를 만들어 스테치의 어깨에 쑤셔 넣었다. 박혀 들어간 손끝으로 끌어모았던 냉기를 전부 때려 박았지만, 스테치는 《리커버리》로 상처를 대충 회복하곤 전투를 지속했다.
리퍼에 대한 공격을 이어 나가는 한편, 스테치는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저 괴물을 상대로?’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검을 쥔 손에서부터 느껴지는 열기를 감지한 순간.
그는 더 이상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탓!
남은 힘을 쥐어짜 지면을 강하게 차고 돌진한 스테치.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힐트와 폼멜, 그리고 풀러로부터 끈적한 액체처럼 흘러나온 황금빛 기운이, 스테치가 착용하고 있던 세 개의 아티팩트들로 스며들어 갔다.
폰두스, 바라크, 메멘토 모템.
각각의 아티팩트들이 동조하면서 공명을 일으키는 모습을 본 리퍼는, 무심코 낫을 들어 올려 방어 자세를 취했다.
“흐아아압!”
바라크의 전기 에너지를 할로우 블레이드에 씌운 스테치는, 리퍼가 있는 쪽으로 검을 크게 휘둘렀다. 검이 닿지도 않는 거리에서부터 공격하는 스테치의 모습에 리퍼는 코웃음을 쳤지만, 그는 곧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콰르르륵-!
난데없이 검으로부터 튀어나온 벼락 한 줄기가 지면을 긁으며 리퍼에게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뭐……!”
당황한 그는 재빨리 몸을 옆으로 움직였지만, 스테치가 날린 번개는 자석처럼 방향을 틀더니 기어이 리퍼의 몸뚱이를 강타했다.
“크아아아아악!”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토해져 나온 비명. 단순한 전격계 마법하고는 궤를 달리하는 수준의 위력이었다. 전신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를 정도로 엄청난 대미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퍼는 쓰러지지 않고 버텨 냈다.
그러나 스테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두 번째 후속타를 날렸다. 한 번도 아니고 연달아서 날아오는 벼락에 기겁한 리퍼는, 영체화로 그것을 간신히 회피했다.
할로우 블레이드가 발하는 빛을 뒤집어쓰느라 전신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따가울 지경이었지만, 저런 공격을 한 번 더 맞을 바에야 이쪽이 훨씬 나았다.
하지만,
“이리 나와아아앗!”
폰두스의 완갑을 장착한 스테치의 손아귀가 쩍 벌어졌다. 어느새 거리를 좁혀 온 그는 허공을 움켜쥐고선 그대로 잡아당겼고, 아스트랄 도메인에 숨어 있던 리퍼는 스테치의 손에 멱살이 잡힌 채 물질계로 끌려 나왔다.
빠악!
“억!”
안면에 꽂힌 주먹에 의해 리퍼는 뒤로 크게 밀려났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공격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그는, 들고 있던 낫을 휘둘러 스테치를 잠시 물러서게 만들었다.
“이놈이!”
무기와 무기가 격돌했다.
그러나 시종일관 우위를 점하던 이전과는 달리, 밀리고 있는 쪽은 다름 아닌 리퍼였다. 벼락 그 자체를 휘감은 스테치의 검은 무기가 맞닿는 것만으로도 리퍼에게 대미지를 주었고, 결국 그의 움직임을 크게 제한시켰다.
‘성가신 놈!’
리퍼가 다른 방식을 써 보려 할 때마다, 스테치는 거기에 귀신처럼 빠른 속도로 대응했다. 리퍼가 접근전을 피하려 들면 손으로 붙잡아 당기고, 기어이 거리를 벌려 놓으면 여지없이 벼락과 마법을 날렸다.
“《파이어볼》!”
평소보다 수 배 이상 크게 부풀어 날아온 화염구에 얻어맞은 리퍼는, 끓어오르는 폭염에 휩싸인 채 고통을 삭이며 생각했다.
‘대체…….’
상대는 아직 각성도 제대로 못 한 반푼이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뭐지? 긴 시간 동안 수많은 대적자들의 목을 베어 온 그가, 한낱 그 위상에 발끝만큼도 못 미치는 애송이에게 탈탈 털리고 있다고?
캉!
자루로 어렵사리 칼을 흘려 낸 리퍼와 한참 공격을 퍼붓던 스테치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잠시간의 적막이 흐른 뒤, 리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냐?”
“뭐가?”
스테치가 퉁명스레 대꾸하자, 그는 재차 물었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공격을 피하거나 막느라 급급했던 네가, 어째서 지금은 나와 대등하게 싸우고 있느냔 말이다!”
『말은 똑바로 하셔야지. 우린 지금 말 그대로 널 영혼까지 탈탈 털어 주고 있구만은.』
메멘토 모템의 비아냥 어린 목소리에 리퍼는 입을 콱 다물었다.
스테치도 내심 통쾌했는지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사실 그도 거의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할로우 블레이드는 스테치가 바라는 대로 힘을 제공해 주었지만, 세 개의 아티팩트를 동시에 다뤄야 하는 만큼 체력 소모가 만만찮았다.
“대답해라!”
“지랄, 그런 걸 알고 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고생했겠냐?”
스테치가 말했다.
『시간이 거의 다 됐으니, 이제 슬슬 끝을 내자.』
“그래.”
스테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일격이 될 것이기에, 남아 있는 모든 힘을 쏟아부을 생각이었다. 메멘토 모템을 포함한 세 개의 아티팩트, 그리고 할로우 블레이드로부터 발산되는 에너지가 서서히 그 열기를 더해 나갔다.
“좋다!”
리퍼는 이를 갈며 낫을 들었다. 그는 엘레나를 기절시켰던 검은 파동과 아스트랄체 특유의 냉기를 낫에 집중시켰다. 그러자 금속날의 표면 위로, 예리한 검은 얼음 결정이 코팅되었다.
“그쪽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전력으로 맞받아쳐 주마!”
“덤벼라!”
폰두스와 할로우 블레이드의 공명이 최대 수준까지 도달한 순간, 리퍼에게 달려든 스테치는 검을 그대로 내리그었다.
빛과 어둠.
상반된 두 힘이 충돌한 그때, 리퍼는 보았다. 물리 법칙을 초월한 1t짜리 초중량 검이, 리퍼와 그의 낫을 일섬에 절단 내는 광경을.
얼음과 검은 에너지는, 열과 빛에 닿자마자 깡그리 날아가 버렸다. 낫을 그렇게 박살 낸 검은, 그 뒤에 있던 리퍼의 몸을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리퍼는 그렇게 자신의 무기와 몸뚱이가 스테치의 검 앞에서 두부처럼 뭉개지고 썰리는 꼴을, 그저 무력하게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콰과광!
적을 양분한 할로우 블레이드가 지면과 충돌하자, 대공동 전체를 뒤흔드는 지진이 일었다. 천장까지 치솟은 파편과 흙더미가 지면으로 다시 내려앉으면서, 대공동 안은 자욱하게 낀 먼지구름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처참하게 썰려 나간 리퍼는 대공동 저편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두 토막 난 채 수십 미터를 날아간 그의 몸뚱이는 이윽고 지면으로 추락했다. 그가 떨어지고 구른 길을 따라서 기다란 먼지 꼬리가 뒤이었다.
“…….”
어떻게든 절단면을 이어붙여 보려 했지만, 할로우 블레이드의 빛이 상처 부위에 남아 재생을 방해하고 있었다. 몸도 더 이상 영체화 되질 않는다.
지금 그의 목숨이 끊어지지 않고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것은, 그저 순수한 운 덕분이었다.
“진 건가…….”
기나긴 세월을 살면서 피로라는 걸 느껴 본 적이 없는 리퍼였으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이제껏 쌓여 온 피곤함이 몰려왔다.
터벅- 터벅-.
스테치는 떨어져 있던 리퍼의 상반신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스르륵-.
리퍼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검은 입자들이 안개처럼 주변으로 흩어지면서, 인간 남성의 몸으로 되돌아갔다. 그의 일부가 되었던 부하들의 모습은 더 이상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살아 있냐? 잘됐군. 안 그래도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말이야.”
스테치가 말했다. 그러자 남성은 클클 대며 웃었다.
“……죽어 가는 인간한테 너무한 거 아닌가?”
『주둥이는 잘만 살아 있으면서 뭘 그래? 그리고 이제 와서 아닌 척하지 마라. 이렇게 역겨운 기운을 풀풀 풍기는 인간은 이 세상에 너밖에 없으니까. 질문만 끝나면 바로 씹어먹어 주마.』
메멘토 모템이 으르렁거리는 걸 무시한 스테치는 남자에게 물었다.
“넌 누구냐? 아니, 그건 일단 됐어. 대적자라는 게 무슨 의미냐?”
이 남자는 메멘토 모템의 존재에 대해 스테치 본인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는 스테치를 대적자라고 칭했다. 대적(對敵)이라니, 대체 뭐에 맞선단 말인가?
그러자 남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차피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것인데, 이제 와서 해답을 조금 앞당겨 본들 무슨 상관이지? 그냥 평소 하던 대로 너희는 너희들의 일을 하면 된다. 계속 노력하면 언젠가는 우리 모두를 박멸할 날이 올지도…….”
“두루뭉술하게 넘기지 말고, 이 새꺄!”
답답해진 스테치는 검을 그의 목 밑으로 들이밀고서 위협했지만, 남자는 그에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한번 반지를 낀 이상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들은 이제 너의 운명 그 자체다. 거부하면 죽을 것이고, 순응한다면 진실을 직접 목도할 수 있을 테지.”
말을 마친 그는 태연하게 하품을 내뱉었다.
“슬슬 말하는 것도 피곤하군. 그냥 곱게 죽여 줘라.”
“야! 임마!”
조용히 눈을 감은 남자는 어떠한 부름에도 응답하지 않았다. 죽기 전에 조금이라도 유용한 정보를 캐 볼 생각이었지만, 남자는 끝까지 이상한 소리만 나불대고 가 버린 것이다.
“이런 X발!”
스테치는 애꿎은 시체를 걷어차며 분노를 토해 냈다. 하지만 이미 죽은 놈한테 욕을 해 봤자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는 짜증스런 얼굴로 남자의 시체가 사라지기 전에, 머리통으로 반지를 가져다 댔다.
“《커스 이팅》”
슈오오오-.
푸른 마력으로 녹아내린 남자의 몸뚱이는 모조리 메멘토 모템으로 빨려들어 갔다. 대량의 마력을 회수한 스테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검을 살펴보았다.
“…….”
할로우 블레이드를 쥐어 봤지만 역시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리퍼를 상대로 생각지도 못한 능력을 발휘하긴 했지만, 솔직히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는 검을 사용한 당사자인 스테치도 알지 못했다.
『주변을 살펴보자. 적이 이 장소를 아지트처럼 사용했다면, 어딘가에는 흔적이 남아 있을 거야.』
메멘토 모템의 말에 스테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절한 엘레나를 찾아 등에 업은 채 던전의 더 깊숙한 곳 안으로 들어간 스테치는, 이상한 구조물로 둘러싸인 아티팩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뭐야, 이건?”
아티팩트를 중심으로 주위를 둘러싼 기둥들은, 나무나 금속 덩어리들을 가져다 붙인 듯 조잡하고 엉성했다. 기둥 끝으로부터 뻗어져 나온 쇠사슬들은 던전의 아티팩트와 단단히 묶여 있었다.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린 스테치는 미심쩍은 눈길로 그것을 흘겨보았다.
“……설마?”
『검은 아티팩트는 아니야. 안심해.』
그 말에 스테치는 시선을 구조물 옆에 널린 탁자들 쪽으로 돌렸다. 다양한 색상의 수정구, 광물 조각, 스크롤들이 탁자마다 한가득 쌓여 있었다. 엘레나를 의자에 앉혀 놓은 스테치는 주변을 탐색했다.
“야.”
스크롤을 뒤적이던 스테치는 메멘토 모템에게 말을 걸었다. 대답은 없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물었다.
“내가 예전에 검은 아티팩트에 관한 문제로 질문했을 때, 넌 아직 때가 아니라고 대답했지.”
『…….』
“그게 지금은 아닌 거냐?”
또 말을 흐릴 거라고 생각한 스테치였지만, 메멘토 모템의 말은 생각보다 간단히 튀어나왔다.
『내가 너에게 아무런 해답도 주지 않는 이유는, 나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야.』
“어?”
『그때 이후로 무언가가…… 조금씩 떠오르고 있어. 그게 단순한 꿈인지, 실재했던 일인지는 나도 몰라. 조각조각 나누어져 있어서 무엇 하나 이렇다고 단정 짓긴 힘들지만…….』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아까 그 자식의 말대로야. 계속 돌아다니다 보면, 머지않아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알게 될 거란 예감이 들어.』
거기까지 들은 스테치는 더 이상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최소한 지금은.
“……쓸 만한 게 없군. 나머지는 얼마 안 되니까 가져가서 읽어 보도록 할까.”
스테치는 남은 스크롤들을 배낭에 쑤셔 넣은 뒤, 엘레나를 다시 둘러맸다. 쇠사슬에 동여맨 아티팩트를 흡수한 그는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던전에서 탈출 스크롤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