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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코그니테 (111/203)


111화 코그니테
2022.01.20.


“잘 가라! 인연이 있으면 또 보자!”

스테치와 엘레나가 손을 흔들어 주자, 토드는 썰매견들을 몰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어거스틴을 죽인 자들을 추적하러 나섰다가 리퍼를 처치한 지 벌써 닷새가 지났다. 그 배후에 검은 아티팩트와 웬 정신 나간 컬트 집단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후로, 스테치는 초조하게 카시아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굳이 먼저 연락을 취하지 않는 것은 그저 수정구의 사용 횟수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연락이 오면 사실대로 말씀하실 건가요?”

오늘도 어김없이 수정구를 만지작거리는 스테치의 모습에, 엘레나가 물었다. 기절해 있는 동안 리퍼와 스테치가 나눴던 이야기들을 전해 들은 것이다. 그러나 스테치는 한사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미쳤어? 내가 본 걸 전부 설명했다간 나도 그놈들이랑 한 패거리로 엮일걸. 제대로 이해시킬 방법이 떠오를 때까진 적당히 둘러대야지.”

군데군데 얼어붙은 거대한 호수와 눈 덮인 침엽수들이 빼곡한 숲. 거기에 끝없이 이어진 산맥 등등, 두 사람을 둘러싼 주변 모든 것들이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스테치는 눈이 녹아 드러난 길을 따라가며 배낭에 수정구를 집어넣다가, 한편에 쑤셔 넣어져 있던 스크롤 뭉치들에 눈이 갔다.

던전에서 가져온 스크롤들의 내용은 대부분이 무슨 의미로 적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가장 자주 언급되던 장소는 다름 아닌 어느 도시의 이름. 덕분에 스테치는 북쪽으로 가려던 계획을 말끔히 접곤 방향을 틀었다.

“거의 다 왔어요.”

엘레나가 가리키는 방향을 본 스테치는 감탄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나무들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거대한 수차들이, 산에서 흘러내려 오는 물을 받아 돌아가고 있었다.

아이젠에 들어갈 때와 비슷한 대형 승강 플랫폼이 수차 옆에 있는 것을 본 스테치는, 엘레나와 함께 위로 올라선 뒤 레버를 당겼다.

그것이 바로, 기술자들의 도시 코그니테로 진입하는 입구였다.

* * *

“와……. 뭐야?”

코그니테의 전경은 이전의 도시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지열 때문에 기온이 따뜻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펄펄 끓는 쇳물로 뜨겁게 달아오르던 아이젠과 달리 코그니테는 조명이나 분위기가 좀 더 차분한 느낌이었다. 시끄럽게 모루를 두들기던 망치 소리도 거의 없어서 훨씬 조용했다.

“여기 꽤 괜찮네요. 남부에서도 이렇게 평온한 느낌의 도시를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말이에요.”

콰광!

“……아닐 수도 있고요…….”

타이밍 좋게 울려 퍼지는 폭발음에 스테치와 엘레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도시 입구 너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경비를 서던 짜리몽땅한 드워프 병사들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저기, 안에 무슨 일이죠?”

“신분증.”

드워프들의 반응에 스테치는 말없이 라이선스를 꺼내 보여 주었다. 신분을 확인한 드워프는 그제야 말했다.

“이 도시는 처음인가 보구나? 여기 원래 자주 이래.”

“자주 그런다고요?”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어. 워낙 미친놈들 천지라 하루에도 몇 번씩 사건 사고가 터지는 곳이거든. 신경 쓰지 말고 볼일 보도록 해.”

태연하기 짝이 없는 반응이다. 대충 고개를 끄덕인 스테치는 엘레나와 함께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 있다면, 대장간보다는 개인 공방의 성격을 띤 곳이 많았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하루 종일 자기가 원하는 것만 만지작거릴 수 있는 공간으로 가득한 것이다.

콰광!

“이런 옘병!”

“내가 말했지! 불과 전기의 비율은 1:4로 맞춰야 한다고!”

“꼬우면 X발 네가 하든가!”

폭발 현장 근처에서는 치고받는 소리가 한창이다. 스테치는 서로를 쥐어뜯으며 바닥을 나뒹구는 드워프와 엘프들의 모습에 어처구니없어하며, 숙소를 구하기 위해 골목으로 들어섰다.

“보기엔 그냥 평범한데……. 대체 그 광신도 놈들이랑 이 도시는 무슨 연관성이 있는 거지?”

스테치가 중얼거렸다.

“고민하고만 있어도 소용없어요. 일단 자리를 잡고 그 스크롤을 다시 한번 정독하도록 하죠. 새로운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엘레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스테치는 외부인 전용 숙소에 돈을 내고 짐을 풀어놓았다. 한 방에 모인 두 사람은 작은 등불 앞에 앉아, 스크롤을 훑어 내려갔다.

토드의 썰매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은 스크롤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스테치는 처음으로 스크롤 안에 적힌 전문을 전부 읽어 낼 수 있었다.

“이거 보세요. 여기 이쪽 줄…….”

엘레나가 가리킨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토 타입을 코그니테에서…… 조립하고 운송…….’

“……용케 그걸 봤네.”

구석탱이에 주석처럼 달린 적혀 있는 글귀인데, 하마터면 지나칠 뻔했을 정도로 작고 희미했다.

“그래, 이 도시의 이름들은 다른 스크롤에서도 진작 봐 왔어. 그런데 조립한다니, 뭘? 운송한다는 건 또 어디로?”

의미불명이다. 저 내용 이외의 것들은 이상한 숫자와 도표, 그리고 들어 본 적도 없는 온갖 물질의 이름이다. 이래서는 마치…….

‘무언가를 연구하고 있었던 것 같은…….’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서 눈을 치켜뜨고 뒷부분을 조금 더 읽어 보자, 주석 말미에 첨언이 쓰여 있었다.

‘……주문은 찰리의 공방으로. 납기일은 10월 말일까지.’

새로운 단서다. 스테치가 회심의 미소를 지은 순간, 바깥에서 또 다른 폭발음이 들려왔다. 이번 것은 꽤나 크기가 커서,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는 스테치 쪽의 숙소까지도 살짝 흔들릴 지경이었다.

“으악!”

깜짝 놀란 스테치와 엘레나는 그제야 스크롤을 들여다본 이후로 시간이 꽤 흘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뻐근해진 몸을 이리저리 꺾어 가며 스테치는 엘레나에게 말했다.

“밥이라도 먹자. 단서는 찾았으니, 나중에 가서 한번 살펴보자고.”

두 사람이 숙소 건너편의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는 동안, 수십 번이 넘는 폭발음이 건물 너머로부터 터져 나왔다. 스테치가 질려 버린 표정으로 바깥을 내다보자, 음식을 가져온 엘프 하나가 물었다.

“저 소리가 신경 쓰이는 거야?”

“아, 네. 이 도시는 처음이라서……. 원래 이렇게나 많이 터지는 건가 싶어서요.”

“하긴 오늘은 좀 유별날 만도 하지. 그만큼 특별한 날이거든.”

“특별한 날이라뇨?”

콰과광!

폭발음이 멎을 때까지 입을 다문 엘프는, 잠깐 뜸을 들인 후 말을 이어 갔다.

“앞으로 이틀 뒤면 기술 시연회가 열리게 되거든. 도시에 있는 모든 기술자나 연구자들이,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사람들 앞에서 선보이는 거야. 마감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미친 듯이 공방을 돌리고 있는 거지.”

엘프는 빵과 수프, 그리고 드워프들이 즐겨 먹기로 유명한 면 요리 등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너희들도 심심하면 구경하러 가 봐. 신기한 물건들이 많이 나와서 꽤 볼만해.”

스테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여유가 생긴다면 보러 가겠지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역시 스크롤에 언급된 공방에 가 보는 것이다.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폭발음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싸움 소리에 한숨을 내쉰 스테치는 마지막 빵조각 하나를 입에 밀어 넣은 뒤 얼른 바깥으로 나갔다.

“혹시 찰리라는 사람의 공방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길을 걸어가다 가장 먼저 보이는 공방에 들른 스테치는, 한창 바쁘게 무언가를 만들고 있던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도시에 거주 중인 사람 대부분이 개인 공방을 운영하는 만큼, 동업자에게 말을 걸면 의외로 대답이 간단히 나올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엉? 찰리의?”

수정을 깎아 만든 고글로 눈을 가리고 있던 공방의 주인이 수염을 매만졌다. 스테치를 쳐다보는 그의 시선은 어째 미묘하긴 했지만, 군말하지 않고 방향을 알려 주었다.

“대충 저쪽에서 꺾어져 들어가면 될 거야. 그런데 용건이 뭐지?”

“예? 그게…… 그러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스테치가 더듬거리자, 공방 주인이 말했다.

“뭔가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편이 좋을걸.”

“시연회 준비로 바쁘니까요?”

엘레나가 묻자 공방 주인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니, 공방이 망했거든. 공방 자체는 아직 남아 있지만, 한 달 전에 문을 닫아 버렸어.”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스테치와 엘레나는 당황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한번 쳐다본 뒤, 후다닥 공방을 빠져나갔다.

‘큰일이다.’라는 생각이 먼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공방이 망했다는 것은 곧, 그 안에 있는 도구나 여러 잡다한 물건들을 처분한다는 뜻. 어쩌면 다음 단서로 이어지는 귀중한 자료가 그 과정에서 유실되었을지도 모른다.

공방이 몇 주 전에 문을 닫았다고 했으니,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젠장, 왜 하필 지금……!”

“먼저 가 보겠습니다!”

엘레나는 쭉쭉 속도를 내더니 스테치를 앞질러서 가 버렸다. 20분 정도를 쉬지 않고 내달려서 도착한 곳은 어느 자그마한 공방.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 숨을 헐떡이면서 걸어가는데, 마침 공방 앞에서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던 엘레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봐, 어떻게 된 거야?”

“아…….”

엘레나는 스테치가 뒤늦게 나타난 것을 보더니, 방금까지 대화하고 있던 드워프에게 말했다.

“이쪽은 제 동료입니다. 이름은…… 브라이언이라고 하고요.”

드워프가 청한 악수를 받은 스테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찰리인가요? 여기가 그 공방이고?”

다행히도 공방의 물건들은 모두 멀쩡해 보였다. 아니, 몇 주 전에 문을 닫은 공방치고는 기재나 연장들이 모두 과할 정도로 잘 손질되어 있었다.

“사실, 찰리는 저희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드워프가 말했다.

“제 이름은 채드입니다. 아쉽지만 보다시피 공방은 문을 닫은 지 오래라서요, 현재는 아무런 제작 의뢰도 받고 있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스테치의 말에 채드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저희 집안 사정에 대해서는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은데요. 볼일이 끝났다면 이만 가 주시죠.”

하기사, 자기 일터가 망했다는데 굳이 입 밖으로 꺼내고 싶을 리가 없다. 채드의 반응을 보고 있던 메멘토 모템이 물었다.

『내가 들어가서 파헤쳐 볼까? 단숨에 주둥이를 깃털보다도 가볍게 만들어 줄 자신이 있는데.』

‘안 돼. 그런 짓을 했는데 만약 상대가 아무것도 모르면 귀중한 찬스를 날려 버리게 되는 꼴이잖아. 조금만 더 기다려 봐.’

조금이라도 그를 설득할 만한 재료가 필요했다. 스테치는 반지에게 핀잔을 준 뒤 배낭을 뒤적여 스크롤을 꺼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캐묻게 되어 죄송합니다. 사실 저희는 비밀리에 무언가를 추적 중이라서요. 아버님이 뭔가 안 좋은 일에 휘말린 게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그런 걸 다른 사람한테 함부로 털어놓아도 되는 건가? 엘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괜히 끼어들었다가 일을 망칠 것을 우려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스테치도 아무런 생각 없이 꺼낸 말은 아니었다.

문을 닫은 공방은 ‘아버지’인 찰리의 것.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코빼기도 안 보이는 데다, 손님에 대한 대응은 그의 아들 채드가 맡고 있다. 거기다 공방이 문을 닫은 한 달 전이면, 스크롤의 주석에 적혀 있던 날짜로부터 고작 하루 이틀 뒤다. 그것들을 조합해 보면…….

“뭔가 알고 계십니까?!”

채드는 스테치의 말을 듣고선 외쳤다.

툭-.

스크롤이 바닥을 굴렀다.

“저희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부디 찾아주십쇼!”

옳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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