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찰리
(112/203)
112화 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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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찰리
2022.01.21.
결국 채드는 스테치와 엘레나를 공방 안으로 들였다. 안쪽에는 자그마한 방이 하나 있었는데, 침대랑 원탁이 있어서 차분히 대화할 수가 있었다.
“아버지가 사라지셨다고요?”
스테치의 물음에 채드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한 달이나 지났습니다. 이제는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르겠군요.”
채드의 아버지, 찰리는 기계 공학의 대가였다.
매년 새로운 개발 과제를 선정해서, 기술 시연회가 올 때마다 놀라운 기술들을 선보이곤 했다. 물론 출품작들 대부분은 기술 검증이 주된 목적인 만큼 효율은 엉망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찰리는 드워프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었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특출 난 사람이었다.
“하루는 검은 로브를 걸친 사람들이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구상과 도안을 가져오더니 다짜고짜 만들 수 있냐고 묻더군요.”
찰리는 의뢰를 흔쾌히 수락하고, 선금으로 막대한 양의 금화를 지불받았다. 하지만 즐거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처음엔 완전히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신이 나셔서 철야 작업에 임하셨죠. 하지만…….”
찰리는 날이 갈수록 수척해져 갔다.
끼니를 거르고, 하루에도 몇 번이고 물건 만들기를 그만둔 채 무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때때로 그는 자신이 건네받았던 도안과 직접 작성한 설계도를 내려다보면서 한숨을 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만들던 물건과 함께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아들인 채드는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아버지의 행방을 쫓았지만, 한 달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는 거의 손을 놓은 상태였다.
“도대체 아버님께서는 뭘 만들고 계셨던 겁니까?”
스테치의 질문에 채드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저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공방 일을 하면서 가끔씩 보긴 했지만, 아버지께서도 그쪽 일은 저에게도 비밀로 하시고 진행하셔서요. 무슨 이상하게 생긴 장치였다는 말밖에는…….”
잠시 후, 채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저는 볼일이 있으니 옆방에 있겠습니다. 필요하신 만큼 둘러보세요.”
“볼일?”
“시연회가 내일모레라서 조금 급하거든요.”
아버지가 사라졌는데 지금 그런 게 중요한가? 스테치가 미묘한 시선을 채드에게 보내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어쩔 수 없어요. 아무런 결과물도 내놓지 못한 시연회 참석자는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 하는데, 그걸 그냥 놔뒀다간 공방이랑 집을 전부 몰수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일단 급한 대로 아버지랑 함께하던 프로젝트를 저 혼자서 진행해 보는 중입니다만…….”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무언가를 보여 주었다. 금속으로 된 무언가가 호스를 통해 다른 기계 장치와 연결되어 있었고, 옆에는 나사나 드라이버 같은 잡동사니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제 능력으로는 아버지의 기술을 마무리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최소한 시간이라도 더 있었더라면…….”
잠시 후, 스테치와 엘레나는 내일 다시 방문하겠다고 약속하고선 공방을 나섰다. 결국 이렇게 단서가 끊기는 건가? 스테치가 고민하는 동안,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 스테치. 흔적은 남아 있어. 희미하긴 하지만.』
“……? 그럴 리가. 설마 그 광신도 놈들이 흔적을 순순히 남기고 갈 정도로 어설픈 놈들이겠어?”
그러자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광신도 자식들이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내가 이 도시에 있다는 점이야. 나는 검은 아티팩트는 물론 그 추종자들이 풍겨 대는 특유의 냄새가 어떤지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거든.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한번 검은 아티팩트와 접촉해 본 경험이 있다면 그 감각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스테치는 그 끈적하고 어두운 느낌을 다시 떠올리며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이 광신도 놈들은 어차피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는지, 마음 푹 놓고선 기운을 풀풀 날려 대고 돌아다닌 모양이야. 그 증거로…….』
메멘토 모템의 말을 들은 스테치가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로브와 후드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서 있었다. 입을 다문 스테치의 머릿속에서 메멘토 모템이 킬킬대며 말했다.
『저것 봐. 지금도 자기 흔적을 가릴 생각은 추호도 안 하고, 얼빵하게 어슬렁거리면서 나타났잖아?』
얼굴도, 체형도 알아볼 수 없는 복장. 스테치를 뒤따라오던 엘레나도 그제야 상황을 알아채곤 번개같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상대는 둘. 그중 하나가 거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평소하곤 다르게 꺼림칙한 기운이 느껴져서 와 봤더니 상상도 못 한 월척이 낚여 있었군그래, 노턴.”
“그래 봤자 반푼이지. 계획을 방해하기 전에 죽여 버리자, 사우즈.”
멋대로 지껄이는 두 사람.
괴한들의 정체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스테치가 검을 뽑아 들자, 그들은 몸을 영체화 시켜 순식간에 공기 중으로 녹아들었다. 엘레나는 자신으로선 적들을 상대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짜증을 내며 활을 다시 늘어뜨렸다.
『겁먹을 필요 없어. 저번에 싸웠던 놈에 비하면 조무래기야!』
“……그래, 그래 보여.”
스테치가 할로우 블레이드를 꺼내 들자, 풀러를 따라 황금색 빛이 흘러나왔다. 물론 이전처럼 무지막지한 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아스트랄체를 상대하기엔 이 정도 힘이면 충분했다.
“멜키오르에게 감사를 표해야겠구먼!”
스테치가 검을 번쩍 들어 올리자, 찬란한 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왔다. 상대를 과소평가하고 정면에서 달려들던 레이스들은 예상치도 못한 스테치의 반격에, 온몸으로 쏟아지는 빛을 얄짤 없이 전부 받아 내야만 했다.
“캬아아아악-!”
희미한 비명을 남기고 사라진 레이스들. 남은 것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두 사람분의 로브였다.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것들을 쳐다본 스테치는, 검을 소드벨트에 걸어 갈무리했다.
“……되게 싱겁게 끝났네요.”
“그러게. 하지만 이걸로 확실해졌어.”
스테치가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찰리 씨가 아들까지 두고 어디론가 도망쳤을 것 같지는 않아. 그런 걸 보고 놔둘 정도로 광신도 놈들이 만만한 것도 아니고. 아마 물건은 제때 만들어서 납품했겠지.”
또한 광신도 놈들 중 하나는 ‘평소하곤 다르게’라고 말했다.
그 말은 즉, 찰리가 사라진 이후에도 평소 공방 근처에 자주 와 봤다는 뜻. 엘레나는 스테치의 추측에 대해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혹시 이미 죽였다거나…….”
“설마. 이놈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물건을 만들어 줄 사람으로 찰리 씨를 특별히 지목했잖아. 뒤집어 말하면 그만한 수준의 사람이 아니고서야 맡길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인데, 그런 기술자를 함부로 죽였겠어? 나 같으면 절대 그러지 않아.”
스테치의 말에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엘레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찰리 씨는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겠군요. 채드는 자기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인질로 쓰였던 거고요.”
* * *
빠르게 상황 파악을 끝낸 스테치와 엘레나는 쪽지에 적혀 있던 좌표를 향해 달려갔다. 거의 도시 끝에서 끝으로 가로지르는 만큼, 그만한 거리를 뛰어가는 스테치는 죽을 맛이었다.
“헉…… 헉……. X발!”
끝끝내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가며 길을 찾아 도시의 어느 한 구역에 도착한 스테치. 한적한 도시 외곽과 중심지 사이에 교묘하게 자리 잡은 장소였다. 한창 실험과 개발로 바쁜 곳과는 달리, 주소 번호 근처의 집들은 어쩐지 후줄근하고, 불 하나 없이 어두컴컴했다.
“정말 이런 곳에 뭔가 있는 건가……?”
스테치와 엘레나가 갈팡질팡하자, 메멘토 모템은 레이스들의 기운을 추적하여 길을 안내해 주었다. 두 사람을 이끌고 들어간 곳은 더 이상 아무도 살지 않는 낡은 건물. 안에는 실험 도구도, 기재도 없다.
그러나 반지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남들은 다 속여도 내 눈은 못 피해 간다 이거야. 저쪽 벽에 걸려 있는 타륜(舵輪)을 돌려 봐.』
건물은 사람이 살던 시절엔 술집으로 쓰였는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온갖 장식물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스테치는 벽에 장식으로 걸려 있는 조타륜 끝에 손가락을 대고 힘을 주어 돌렸다.
그러자…….
쿠르르-.
거짓말처럼 바 테이블이 옆으로 밀려나며, 숨겨져 있던 비밀 계단이 드러났다. 스테치는 닭살이 돋는 피부를 쓸어내며 중얼거렸다.
“우왓, 기분 나빠. 누가 이런 구시대적 감각의 비밀 출입구를 디자인한 거야?”
눈을 새까맣게 물들인 엘레나가 계단을 흘끔 내려다보며 말했다.
“덕분에 이쪽을 눈치챘나 봅니다. 안에서 기척이 느껴져요. 최대한 빨리 내려가서 격파하도록 하죠.”
그러더니 손짓으로 스테치에게 먼저 들어가란 사인을 보내는 엘레나. 하기사 적들이 죄다 레이스라면 엘레나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긴 하다. 스테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뽑아 들곤 계단을 내려갔다.
어두워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시커먼 어둠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스테치와 엘레나는 주변에 적이 가까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열로 따뜻해야 할 공기가 부쩍 차가워졌기 때문이었다.
“너희들.”
선두에서 나아가던 스테치가 말했다.
“생각이 박혀 있는 놈들이라면 멍청한 판단은 하지 않길 바란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인질로 잡는다거나 하는 짓거리 말야.”
그에 동조하듯 할로우 블레이드가 진동했다. 과연 상대가 이 친절한 조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줄지 의문이었지만, 답은 생각보다 빠르게 밝혀졌다.
지하로 내려간 지 10분 뒤. 기나긴 통로를 지나 도시의 하수 시스템과 연결된 듯한 넓은 공간에 도착한 스테치와 엘레나. 그리고 그 안에는 입에 재갈이 물린 드워프 하나가 바닥에 쓰러진 채 끙끙대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나타난 다섯의 광신도들. 스테치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아주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어먹는구먼?”
“……대적자?!”
“드디어 새로운 대적자가 나타난 건가?”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광신도들을 향해, 스테치는 할로우 블레이드를 위협적으로 들이밀며 윽박질렀다.
“조용히 안 해? 여기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제 다 끝이다. 순순히 내 손에 뒈지시지.”
“우리도 대적자를 상대로 무의미한 저항을 하고픈 생각은 없네.”
“오호?”
광신도들 중 한 명이 대표로 나서서 입을 열자, 스테치는 조금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나 그런 스테치의 기대가 무색하게, 광신도가 말했다.
“……하지만 위대하신 신의 의지 앞에서 우리들의 의견 따위는 더더욱 무의미하지.”
슈화아악!
스테치는 광신도 다섯이 일제히 레이스로 변화하자, 이를 갈며 할로우 블레이드를 사용했다. 빛으로 뒤덮인 공간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죽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