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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악마의 제안 (114/203)


114화 악마의 제안
2022.01.23.


찰리와 채드의 합작품은 기술 시연회에서 사람들로부터 큰 관심을 이끌었다. 그렇게 힘든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밀린 프로젝트를 마무리 지은 데다, 성공까지 시킨 찰리의 능력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비록 시연회에 참석한 것은 채드 한 명뿐이었지만, 찰리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 후 찰리는 스테치 일행이 출발 준비를 하는 동안 체력을 완전히 회복하여, 스테치에게 줄 물건을 만드는 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아들인 채드의 도움을 받으니 작업은 수월하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스테치와 엘레나가 떠나는 날, 그는 왼손에 꼭 맞는 너클을 선물해 주었다.

“이게 뭐예요?”

너클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않은 물건을 받은 스테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생각과 관계없이 품질은 상당히 괜찮았다. 폰두스와 간섭하지 않으면서, 오른손 너클 파트를 딱 맞게 가려 주는 적당한 크기. 심지어 너클을 손에 낀 채로 검을 쥐어도 걸리적거리지 않았다.

찰리가 스테치에게 말했다.

“그 무기, 페네트레이터라고 했던가? 꽤나 독창적이더군. 이쪽은 시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그렇게까지 거창한 물건은 무리지만, 하지만 이 정도 사이즈면 나라도 충분히 만들지.”

너클을 빼앗아 자기 손에 낀 찰리는 주변에 적당히 널린 바윗덩이를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그 순간 너클에서 펑 하고 작은 불꽃이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버렸다.

“오…….”

“이번에 기술 시연회에 내놓았던 물건을 자네가 쓰기 편한 버전으로 리파인 한 거라네. 너클이라기보단 소형 파워 피스트라고나 할까? 타깃을 때리면 장전되어 있던 화약탄이 격발되고, 밀려 나간 금속판이 타깃에 2차 타격을 먹인다. 거기다 화약이 뿜어낸 플라즈마 제트가 전방으로 나가서, 타격한 위치를 태워 버리지. 한 번 때렸으면,”

찰리가 너클 낀 손을 쥐락펴락하자, 손등을 덮은 뚜껑이 벌어지면서 뜨겁게 달궈진 탄피 두 개가 땅에 떨어졌다. 이 녀석은 페네트레이터보다 훨씬 작은 주제에, 주먹질 한 번으로 탄을 두 개씩 잡아먹는 것이다.

하지만 그 위력은 상당히 마음에 드는 데다, 충격 흡수 장치가 되어있어 뼈 부러질 걱정도 없었다.

“탄피를 뽑아내고 재장전하게. 어때? 모티브가 된 페네트레이터만큼의 위력을 내는 건 무리지만, 그래도 여러모로 쓸 만할 거다.”

처음엔 별로였지만, 설명을 듣고 사용하는 것을 보니 제법 만족스러웠다. 스테치는 너클을 받아 손에 끼우고선 말했다.

“고맙습니다. 잘 쓸게요.”

스테치는 새로 구한 말 위에 올라탔다. 안장 옆에는 각종 장비, 식량들이 담긴 배낭이나 자루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두 분은 이제 하덴브록 상회에 가서 도움을 요청하세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미리 말해 두었으니 잘 대해 줄 겁니다.”

이제는 정말 갈 시간이었다. 스테치는 승강기 앞까지 따라 나온 채드와 찰리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작별 인사를 남겼다.

“다들 건강히 계십쇼!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오겠습니다!”

덜그럭-.

묵직한 쇳소리를 흘리며 올라가기 시작한 승강 플랫폼. 말없이 승강기가 지상에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는 동안, 엘레나가 스테치에게 말을 걸었다.

“케일럼은 엘프들의 왕국이라고 했죠?”

“응, 그게 왜……?”

엘레나를 돌아본 스테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뭐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해 보였다. 스테치의 시선을 눈치챈 엘레나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저는 남부 엘프잖아요? 대륙 유일의 세계수를 보러 간다고 생각하니까 새삼 긴장돼서요.”

“아……. 그러고 보니 세계수가 있었지.”

세계수.

엘프들의 여신, 데스트라가 건네준 종자로부터 발아하고 자란 생명의 나무. 존재 자체만으로 주변 일대의 생태계를 안정화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파괴된 자연을 회복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전해진다.

“음? 그러고 보니…….”

스테치가 물었다.

“어둠의 숲에도 세계수의 종자가 있지 않았어?”

그는 어둠의 숲에서 상대했던 어느 던전 키퍼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다. 메멘토 모템은 스테치가 어보미네이션이라고 즉석에서 명명했던 그 키퍼를, 세계수의 아종이라고 불렀었다. 엘레나는 스테치의 말에 깜짝 놀랐다.

“잘 알고 계시네요? 옛날에 대륙이 분단되기 전에, 세계수의 씨앗을 챙긴 저희 선조님이 어둠의 숲에 정착하면서 심으셨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아신 거예요?”

“반지가 알려 줬거든.”

스테치가 반지 낀 왼손을 흔들어 보이자, 엘레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뭐, 도중에 나무가 사기에 오염되어 버릴 줄은 그분들도 예상 못 하셨겠지만요. 어쨌든…….”

엘레나가 말했다.

“남부 태생인 제가 이렇게 먼 북부 땅까지 와서 세계수를 보게 되다니, 지금도 믿기지가 않아요. 이런 거 가지고 좋아하기엔 상황이 적절치 못하다는 거 잘 알지만, 그래도 너무 기뻐서…….”

감정이 북받쳤는지, 입을 꾹 다무는 엘레나의 모습에 스테치는 당황했다. 인간의 입장에서야 고작 거대한 나무일 뿐이지만, 남부 엘프들에게 있어 세계수가 뿌리내린 북부는 그야말로 잃어버린 고향인 셈이다.

“이번 일이 끝나면 한번 차분히 왕국을 돌면서 구경해 보자. 운이 좋다면, 남부에 새롭게 심을 세계수 종자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스테치의 말에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왕자님! 제발, 한 번만 나와서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발스톡 님. 환자의 심신 안정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젠장!”

한창 제라드의 방 앞에서 난동을 피워 대던 발스톡은 다른 병사들이 붙잡고 늘어지자, 울분을 터뜨렸다.

베네지아의 제3 왕자, 제라드 메서가 의식을 회복한 이후로 긴 시간이 흘렀다. 팔도 잃고, 모든 사태의 책임까지 전부 뒤집어쓴 제라드 메서는 절망에 빠진 탓에, 삶의 의욕을 모두 잃고선 방 안에 틀어박혀 버렸다.

그것이 벌써 몇 주째. 이제는 왕자의 얼굴조차 가물가물하다.

“무슨 소란이냐?”

그때, 모퉁이를 막 돌아섰다가 발스톡을 발견한 둘째 왕자가 다가왔다.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소리를 지른 것이 발스톡인 것을 알아보고 살짝 놀란 눈치였다. 병사들의 구속에서 풀려난 발스톡은 무릎을 꿇고 알프레드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왕자님! 저는…….”

“일단 일어나라.”

알프레드의 말에 발스톡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왕성에서 소동을 벌인 그의 행태는 예법에 어긋나는 추태였음이 틀림없었지만, 발스톡을 쳐다보는 알프레드의 시선에는 왜인지 모를 희미한 동정심이 엿보이고 있었다.

왕자라는 신분으로 태어난 이상, 형제들끼리의 우애는 사실상 장식에 가깝다. 궁극적으로는 왕위를 노리고 경쟁하는 관계. 하지만 지금의 제라드는 알프레드가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상태가 엉망이었다.

“자신의 주군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거다. 하지만 지금은 참아라.”

알프레드는 말했다.

“사실, 안 그래도 제3 왕자의 향후 처우에 관한 이야기를 폐하와 나누고 온 참이다. 한 왕국을 대표하는 왕자로서 하루빨리 책무에 복귀시키라는 말씀을 하셨다.”

‘……어?’

그 말을 들은 발스톡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제라드 왕자의 행보로 왕국이 입은 피해를 고려해 보자면, 왕이 내린 벌은 정당하다 못해 관대할 지경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단시간 내에 왕자를 용서하겠단 의지를 표명한다니?

너무 지나친 편애 아닌가?

발스톡이 흘끔 알프레드에게 시선을 보내자, 그것을 눈치챈 알프레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즉, 그도 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른다는 소리였다. 알프레드는 발스톡을 문 앞에 세워 둔 뒤, 제라드의 방으로 들어갔다.

끼익-.

활짝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온 시원한 바람이 알프레드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침상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제라드.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환상통으로 고생하던 그였으나, 지금은 외팔 생활에 나름대로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오랜만이군, 발스톡.”

“왕자님……!”

오래간만에 듣는 제라드의 목소리에 발스톡은 이를 악물었다. 사포로 갈아낸 듯한 그 메마르고 거친 목소리는, 그간의 제라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형님.”

알프레드는 자신을 흘겨보며 성의 없이 고개를 까딱이는 제라드에게 핀잔을 주었다.

“쯧, 잠깐 쉬었다고 사람 몰골이 아니게 되었군. 제대로 준비를 갖춰서 알현실로 오너라. 폐하께서 네게 할 말이 있으시단다.”

“……무슨?”

영문을 모르겠다. 아티팩트도 잃고, 팔조차 잃은 그는 더 이상 왕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 정략결혼의 신랑감으로도 못 써먹을 모습에, 무위는 이미 바닥을 기게 된 지 오래지 않은가? 그러나 왕의 부름을 받은 이상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제라드는 빠른 속도로 하인들의 도움을 받아 그동안 미뤄 뒀던 일들을 해결해 나갔다. 몸을 씻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정돈하는 것부터, 옷을 입는 것까지. 모든 작업을 마친 그는 방을 나서기 직전 멈춰 섰다.

“……큭.”

속이 텅 빈 왼팔 옷자락이 축 늘어져 있는 게 유달리 눈에 띄었다. 꼴도 보기 싫은 자기 모습에 짜증이 난 제라드는 심호흡을 한 뒤 발스톡과 함께 방문을 나섰다.

무려 2개월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이후로 첫 외출이었던지라, 캐슬 브랜든을 거닐던 사람들 모두가 제라드를 보곤 하나같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땅으로 떨어진 위상 때문인지, 몇몇 이들은 왕자인 제라드를 면전에 두고 뒷담화까지 벌일 지경이었다.

크게 분노한 발스톡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칼부림이라도 벌일 기세였지만, 무덤덤한 제라드의 반응을 보고선 끓는 속을 식혀야만 했다.

끼익-.

“베네지아의 제11대 국왕이신 신체루스 전하의 셋째 아들이자 제3 왕자-”

소개가 채 끝나기도 전에 성큼성큼 왕이 앉은 옥좌를 향해 걸어가는 제라드. 대신들이 그의 무례한 모습을 보고 혀를 찼지만, 제라드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아버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신체루스 메서.

옥좌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는 왕의 시선을 마주한 제라드였지만, 그는 심연처럼 깊고 어두운 아버지의 동공에서 아무런 감정도 읽어 낼 수 없었다.

“……몸은 어떤가?”

지극히 사무적이고 기계적인 목소리. 침묵을 고수하던 제라드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폐하의 보살핌 덕택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수염을 만지던 신체루스의 시선이 제라드의 사라진 왼팔이 있던 자리로 꽂혔다. 한참을 그렇게 응시하던 신체루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팔을 되찾고 싶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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