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뜻밖의 인물 (116/203)


116화 뜻밖의 인물
2022.01.25.


남루하기 짝이 없는 망토와 때와 먼지로 색이 바랜 금속 갑옷. 안대로 가린 오른쪽 눈. 스테치가 기억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차림이었지만, 눈앞의 사나이는 틀림없는 마르크 맥도웰이었다.

“왜……?!”

그저 왜? 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동방 장군의 등장은 스테치의 예상을 까마득히 뛰어넘는 해프닝이었으니까.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마르크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는 마치 이런 상황이 오길 기대했다는 듯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뭐야, 저놈은?”

“한 패거리인가?”

리퍼들이 흙과 먼지가 묻은 무기를 탁탁 털어 내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난입해 온 마르크는 몬스터인 그들의 눈에도 범상찮은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너!”

엘레나는 당장 미간을 뚫어 버릴 기세로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고, 스테치는 뒤로 훌쩍 물러섰다. 두 사람 모두 싸움에 집중하느라 주변에 누가 있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 그 타이밍에 나타난 게 하필 저 남자라니?

“맥도웨에엘!”

혼란이 가시고 분노가 치밀어 오른 스테치는 마르크에게 돌진했다. 단순히 왕자의 편임을 제외하더라도, 그는 스테치의 복수를 방해한 결정적인 인물.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그도 원수에 버금가는 자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스테치의 검과 엘레나의 화살이 마르크에게 닿기 직전, 그는 리퍼들에게 향하고 있던 방패를 돌려 두 사람의 합격을 막아 냈다. 도무지 거대한 방패를 다루고 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부드러운 움직임이다.

“그까짓 거!”

스테치가 남는 손으로 방패를 쥐려고 하는 순간, 사자 주둥이로부터 터져 나온 사자후가 그를 밀어냈다. 상대가 싸우는 방식조차 까먹을 정도로 지나치게 흥분한 스테치의 실책이었다.

“칫!”

스테치는 기다란 흙먼지를 흩뿌리며 뒤쪽으로 미끄러졌다. 다행히 몸 어디에도 눈에 띌 정도의 큰 상처는 나지 않았다.

……아니, 그게 아니야.

스테치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마르크 맥도웰의 방패가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 몸소 체험해 본 적이 있다. 만약 스테치가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하다면, 그건 틀림없이 마르크가 적당히 봐주었기 때문이다.

마르크는 스테치에게 말했다.

“제대로 싸울 맘이 들기 전까진 이쪽도 전력을 다하지 않겠다. 그나저나, 위를 조심해라.”

어느새 공중으로 날아든 리퍼가 스테치의 정수리를 단숨에 쪼개 버릴 기세로 대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들어 올린 검으로 대검을 받아 내자, 할로우 블레이드를 통해 전해지는 무게감에 압도된 스테치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리퍼가 소리쳤다.

“여유 부리긴!”

피융!

엘레나의 화살이 리퍼의 안면을 강타했고, 그 충격으로 리퍼는 대검을 놓치고 말았다. 장정도 들기 어려워하는 리퍼의 대검을 한 손으로 낚아챈 스테치는, 들고 있던 할로우 블레이드와 함께 열십자를 그으며 리퍼를 베어 넘겼다.

촤악!

무게를 줄여서 그런가, 대검 본래의 파괴력이 나오질 않는다. 하지만 방심한 리퍼에게 한 방 먹이기엔 충분한 위력이었다.

“!”

간신히 리퍼를 떨쳐 내기가 무섭게, 이번엔 망치 리퍼의 마크에서 벗어난 마르크 맥도웰이 달려들었다. 방패를 전면에 내세우고 들소처럼 달려오는 그의 모습을 본 스테치는 분노를 토해 냈다.

“이 새끼가아아!”

스테치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아크》의 전격이 마르크에게로 날아갔다. 그러나 방패와 통째로 감전당할 거라 생각한 마르크는, 방패를 살짝 휘저어 전격을 없애 버린 뒤 그대로 스테치에게 곧장 돌진해 왔다.

‘디스펠륨!’

스테치가 방패 표면을 얇게 뒤덮은 디스펠륨 코팅을 확인하자마자, 양손에 각각 나눠 든 대검과 할로우 블레이드를 바라크의 전기가 휘감기 시작했다.

상대는 베네지아의 동방을 수호하는 장군. 정면으로 맞부딪쳤다간 전신의 뼈가 으스러질 것이다. 스테치는 《아크로바트》와 《오토매틱 리플렉스》를 사용하여 마르크의 돌진을 옆으로 피했다.

“하아앗-!”

앞만 보고 달려가던 마르크의 시선이 뒤늦게 측면으로 돌아간 스테치를 쫒았다. 텅 빈 옆구리와 뒤통수를 향해, 스테치는 두 개의 무기를 든 채 회전베기를 걸었다.

그러나 스테치가 든 두 개의 검이 마르크를 3등분 내기도 전에, 마르크는 그대로 방패에 축적된 에너지를 개방했다.

퍼엉!

반동을 이용하여 순식간에 달려오던 방향의 반대편으로 후퇴한 마르크.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잽싼 동작으로 바닥을 굴러 충격을 완화시킨 그는, 천천히 일어나더니 목과 팔 관절을 위협적으로 꺾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랑 하나도 변한 게 없네. 뭐 저딴 놈이 다 있어?』

메멘토 모템조차 황당해할 정도의 센스. 앙다문 스테치의 이빨에서 빠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시종일관 심각한 스테치의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마르크 맥도웰의 입꼬리는 기분 좋은 듯이 올라갔다.

감비니 요새에서 2:1로도 고전하고 자폭 공격까지 감행했던 과거의 상대가, 이제는 단독으로 대등하게 승부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에 마르크는 만족하고 있었다.

그때, 스테치의 손에 들려 있던 대검이 검은 안개로 화하여 공기 중으로 녹아들어 갔다. 사라진 대검은 눈 깜짝할 사이에 본래 주인인 리퍼의 손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이런……!”

스테치와 마르크가 싸우는 동안 두 리퍼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화살을 쏴 대던 엘레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녀의 화살은 리퍼가 전개한 검은 파동에 가로막혀 공중에 떠 있었다.

“이대로라면 끝이 나지 않을 것 같군.”

대검을 든 리퍼가 중얼거렸다.

갑자기 끼어든 마르크의 존재가 리퍼들의 신경을 몹시 거슬리게 만들고 있었다. 수월하게 대적자를 끝장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삼파전이 되어 버린 싸움은 이제 누구도 승리를 점칠 수 없는 난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둘 다 죽여 버리겠다.”

두 리퍼는 각자의 무기를 바닥에 쾅 소리 나도록 내리찍었다. 신기루처럼 일렁거리던 그들의 신체는, 돌연 생겨난 피어오른 검은 돌풍에 휩싸여 버렸다. 스테치의 뺨과 손등을 핥고 지나가는 바람은 끈적한 타르처럼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슈오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끓어오르던 대기가 잔잔해질 무렵, 두 리퍼가 있던 장소에는 검은 구체가 떠 있었다. 어둠을 그대로 빚어 올린 듯한 외형의 그 물체는, 액체처럼 끈적하게 흘러내려 웅덩이처럼 고였다.

“…….”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이런 상황해서 마르크를 공격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한 스테치는 조용히 검을 들어 전신의 감각을 바짝 곤두세웠다. 마르크도 말없이 방패를 스테치에게서 검은 구체에게로 돌렸다.

그림자처럼 퍼져 있던 검은 구체는, 이윽고 팔과 다리를 지닌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재질을 파악할 수 없는 검은 갑옷으로 뒤덮인 사람의 형상. 투구의 슬릿 사이에서 간간히 엿보이는 푸른 안광에 스테치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다.

검은 망토를 펄럭이는 상대의 모습은 영락없는 암흑의 기사, 데스나이트였다.

“흠.”

갑자기 튀어나온 마르크 맥도웰의 말에 스테치가 그를 쳐다보았다.

“이건 좀 위험하군.”

데스나이트가 천천히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자, 그의 손아귀 안에서 기다란 장검 하나가 생성되었다. 그가 하늘 높이 치켜든 검을 짙게 깔린 자신의 그림자로 찍어 넣는 순간, 스테치와 엘레나, 그리고 마르크의 그림자가 꿈틀댔다.

상대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던 마르크는, 즉시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러자 그와 동시에 발밑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장검이 그의 몸을 꿰뚫을 기세로 뻗어져 나갔다.

투쾅!

방패 표면을 긁고 불똥을 튀기며 꺾여 나가는 그림자 검과, 흡수한 충격을 즉시 되돌려주는 마르크. 무사히 착지한 그는 스테치와 엘레나의 상태를 살폈다.

“큭…….”

뒤로 제꼈던 스테치의 턱 끝에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데스나이트의 공격은 미리 알고서도 피하기 힘들 정도로 재빨랐다. 하지만 리퍼가 데스나이트로 융합한 순간부터 뭔가를 벌일 것은 예상할 수 있었기에, 엘레나를 포함한 두 사람 모두 데스나이트의 검을 피하는 데에 성공했다.

스킬에 의해 가속된 스테치의 정신이 원상태로 되돌아올 무렵, 데스나이트는 손에 쥔 검을 채찍으로 바꾸어 마르크에게 휘둘렀다.

뱀처럼 기묘한 움직임을 선보이던 채찍이 그대로 마르크를 방패째 휘감자, 데스나이트는 채찍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

마르크의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예상치 못한 완력에 잡아끌린 그의 몸뚱이는 그대로 데스나이트의 머리 위를 넘어 바닥에 처박혔다.

쿠당탕!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흙먼지. 마르크의 찢어진 이마에서는 피가 왈칵 쏟아져 나오고 있었지만, 특유의 맷집 탓인지 표정만큼은 멀쩡해 보였다. 팔과 어깨를 조금씩 비틀어 보았지만, 그를 묶은 채찍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데스나이트도 그 정도로 끝낼 생각은 없었는지, 다시 한번 채찍을 잡아당겼다. 무게감이라곤 전혀 없는 가벼운 동작으로 마르크를 훌쩍 하늘로 날려 보낸 데스나이트는, 몇 번이고 마르크를 바닥에 메쳤다.

쿵! 쾅!

점점 보고 있기가 안쓰러워질 정도로 무자비하게, 마르크는 수차례가 넘도록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어딘지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지는 그 광경에 넋을 잃은 스테치. 그런 그에게 데스나이트는 채찍에 묶인 마르크를 던져 버렸다.

휘이익-!

“!”

스테치는 몸을 바짝 낮춰 날아오는 마르크를 피했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에게 달려오는 데스나이트였다.

“《테슬라》!”

두 개의 에너지 구체가 스테치의 머리 위로 떠오르더니, 연달아 데스나이트에게 전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데스나이트는 채찍으로 에너지 구체를 가볍게 쳐 없애 버린 뒤, 무기를 철퇴로 바꾸어 스테치의 머리 쪽에 휘둘렀다.

캉!

자루 쪽을 검으로 막아 낸 스테치. 하지만 그러기가 무섭게 상대는 무기를 날이 짧은 한손검과 방패로 변형시켜 접근전을 걸어왔다.

‘이 새끼가?’

할로우 블레이드가 발하는 빛의 영향으로, 데스나이트의 힘은 마르크를 상대할 때보다 다소 약해져 있었다. 그러나 데스나이트는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무기를 사용하여 온갖 변칙적인 공격을 해 댔다.

낫, 장검, 할버드, 활, 망치, 프레일, 채찍.

접전이 길어질수록, 스테치의 몸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상처가 새겨져 갔다. 거기다 데스나이트는 한번 포착한 빈틈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스테치가 마법을 사용할 틈을 주지 않았다.

『……어떡하지?』

스테치의 상처를 회복시켜 준 메멘토 모템이 넌지시 물었다.

위기의 상황이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스테치에게는 아직 사용하지 않은 수단이 남아 있었다. 할로우 블레이드의 힘에 오롯이 의지할 수 없는 지금, 새로 얻은 어빌리티인 ‘싱크로’를 사용한다면 데스나이트를 압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테치는 데스나이트의 검을 튕겨 내며 말했다.

“안 돼!”

강력한 능력인 만큼 시져보다 제한 시간이 짧은 건 물론이고, 그 리스크 또한 월등히 높다. 만약 상대의 전력을 오판해서 타이밍을 잘못 맞춘다면, 최악의 경우 힘이 빠진 상태에서 홀로 마르크를 상대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피융!

그런 고민을 하는 동안, 대포처럼 날아온 육중한 화살 하나가 데스나이트의 등짝을 후드렸다. 강력한 일격으로 잠시 공격을 멈추고 휘청거리던 데스나이트와 스테치의 시선이 동시에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하아앗!”

바로 옆까지 접근해 온 마르크 맥도웰이 방패의 힘을 개방했다. 사자 머리에서 터져 나온 충격파가 전방으로 발사되면서, 한창 스테치와 치고받던 데스나이트를 날려 버렸다.

콰과광!

그간 축적된 충격 에너지가 한꺼번에 방출된 덕분에 그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족히 30m 정도를 날아가고도 땅을 굴러가는 데스나이트를 본 스테치는, 마르크 맥도웰의 뒤에서 걸어오던 엘레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잠깐 손을 잡기로 합의를 봤습니다.”

엘레나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대는 보다시피 괴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힘을 합치지 않으면 결국엔 각개 격파당할 뿐이에요.”

협력이라고? 이놈이랑? 스테치는 휙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돌려 마르크를 노려보았다. 당장 찢어 죽여도 모자랄 판에 이건 또 무슨 전개란 말인가. 스테치가 뭐라 항변하려 들자, 엘레나는 손가락을 들어 그의 입을 막고선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전력을 내실 수 없는 거죠?”

“…….”

엘레나는 스테치가 리퍼를 어떻게 쓰러뜨렸는지에 대해 전해 들었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스테치는 너무나도 약했다. 이 사실을 눈치챈 엘레나는 마르크에게 협력을 제안했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엘레나는 마르크를 곁눈질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 남자를 쳐 죽이는 건 나중에 하게요. 일단은 몬스터를 쓰러뜨리는 데에 집중합시다.”

16564299615485.png

16564299615494.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