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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동석하기엔 불편한 남자 (118/203)


118화 동석하기엔 불편한 남자
2022.01.27.


밝고 커다란 초승달이 떠오른 늦은 새벽, 벌레 우는 소리조차 크게 들릴 정도로 고요한 평원 한가운데. 자그마한 모닥불 앞에 빙 둘러앉은 세 사람의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어딘지 불편한 침묵을 깨고, 한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병 주고 약 주자는 거냐?”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던 스테치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모닥불 건너편의 마르크를 노려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텅 빈 병을 휙 던졌다.

탁!

마르크는 안면으로 날아드는 병을 한 손으로 잡아낸 뒤, 말없이 배낭으로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본 스테치는 ‘칫’ 하고 짜증을 부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테치가 예상했던 2차전은 없었다.

마르크 맥도웰은 텅 빈 스테치의 뒤통수에 칼침을 꽂기는커녕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스테치에게 손수 만든 기력 회복제를 건네주었고, 더 나아가서는 엘레나의 상처 회복을 도왔다.

물론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스테치가 아니었지만, 문제는 스테치도 많이 지쳤다는 점이었다. 마력은 차고 넘쳤지만, 기력은 거의 한계에 도달했다. 다수의 아티팩트를 동시에 다루면서 마법까지 사용한 탓에, 탐험가로서 기본이 탄탄한 스테치조차 기력이 바닥을 길 정도였다.

“…….”

엘레나가 눈짓을 보냈지만, 스테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 상태에서 마르크 맥도웰 같은 상대와 치고받았다간 틀림없이 도중 탈진해 버릴 것이 뻔했다.

그에 반해 엘레나는 아직 움직일 여력이 남아 있긴 했지만, 방어에 특화된 마르크를 상대하기엔 조금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렇다 보니 이렇듯 애매하면서도 어색한 대치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다.

“우리를 어떻게 찾아냈지?”

결국 참다못한 엘레나가 먼저 말을 시작했고, 마르크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았다. 평소의 정중하던 것과는 달리, 지금의 말투는 공격적이었다.

마르크 맥도웰이 스테치 일행의 뒤를 쫓아온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어떻게?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이군.”

마르크가 말했다.

당연했다. 스테치와 엘레나는 감비니 요새의 전투 이후로 철저하게 행적을 숨기면서 이동했다. 심지어 버든베어를 직접 다스리는 이드릴 헨리에타조차 두 사람의 도망 여부를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인데, 왜 생각지도 않았던 마르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걸까.

“짐작이다.”

“뭐?”

어처구니없어하는 스테치의 반응을 무시하고 마르크는 말을 이어 나갔다.

“남부연합의 수장국인 베네지아를 적으로 돌린 이상, 남부의 땅 전체가 가시밭길이다. 그렇다면 너희가 어디로 도망쳐야 이치에 맞을지 정도는 쉽게 예상되지 않겠나?”

마르크의 짐작은 반문의 여지없이 타당하다. 남부의 어느 누가 미쳤다고 베네지아의 제1 순위 타깃이 된 스테치 일행을 도와줄 리 만무했다.

하지만 북부는 베네지아의 영향력이 거의 닿지 않는 유일한 장소. 뱃삯이나 기타 여러 문제점을 제외하면 범죄자가 몸을 숨기기엔 안성맞춤인 곳이다.

"북부 땅에 막 발을 디뎠을 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갑갑했다. 하지만 그러던 차에 한 소문이 들려오더군. 난생처음 보는 A급 탐험가가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고…… 그 이후부턴,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흔적을 따라갔을 뿐이다."

그가 말하는 소문이란 아마도 마차 호위에 관한 이야기일 터.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스테치는 그제야 물었다.

“……아니, 그게 말이 돼? 여기가 어디 피크닉 가는 기분으로 놀러 올 만한 장소인 줄 알아?”

스테치는 북부에 온 이후로 최대한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마르크처럼 처음부터 스테치를 노리고 정보를 수집한 경우를 제외하면, 누구도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을 터. 그러므로 북부에 도착하고 난 이후 어떻게 추적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그닥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마르크가 어림짐작만으로 북부에 오기엔 감수해야 할 문제점이나 난관들이 많다는 점. 그것이야말로 스테치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었다.

북부와 남부가 아무리 물밑에서 교류의 물꼬를 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규모는 여전히 작다.

일반적인 도주 수단으로써 떠올릴 만한 루트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죽하면 베네지아 왕가조차 끝까지 스테치의 행방에 대해 갈피를 못 잡았겠는가.

하물며 마르크는 어엿한 베네지아의 귀족이자, 동방 장군이라는 직책까지 가지고 있다. 그런 그가 모든 걸 벗어던지고, 뚜렷한 증거 하나 없이 가설 하나만 세워서 무작정 북부까지 온다는 게 말이 되나? 그것도 홀몸으로?

“너희들은 큰 착각을 하고 있군.”

마르크가 말했다.

“나는 원래 북부 출신이다. 대륙 전체를 다 뒤져 봐도 나만큼이나 남부에 대한 미련이 적은 사람도 없을 거다.”

“……어?”

그의 발언에 스테치는 물론이고, 옆에 앉아 있던 엘레나조차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남부 왕국을 수호하는 남자가 사실 북부 사람이라니?

스테치는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마르크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확실히 이전에 봤을 때부터 남부 사람치고는 은근히 이국적인 생김새다 싶었지만, 설마 진짜로 출신부터가 다를 줄은…….

“말하지 않았나?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북부의 인맥을 총동원하지 않았더라면 널 만나기는커녕 흔적을 알아보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거다.”

『……북부 태생이면 얌전히 북부에서나 살 것이지, 왜 남부까지 와서 지랄을 하시고…….』

멍하니 중얼거리는 메멘토 모템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려 넘긴 스테치가 마르크에게 물었다.

“미련이 적다는 건?”

마르크 맥도웰은 분명 첫째 왕자인 랍토레스의 두 심복 중 하나. 그런 그가 과연 정말 베네지아 왕가를 그렇게 쉽게 벗어날 수 있을까?

“북부 사람인 내가 대륙 남부로 넘어온 것, 그리고 그곳에서 장군으로까지 활약했던 것은 전부 순전한 흥미 본위일 뿐. 나를 부리시는 랍토레스 왕자님도 그 점을 잘 이해하고 계시지.”

마르크가 답했다.

“랍토레스 왕자님은 틀림없이 좋은 분이시지. 하지만 설령 그분이라 할지라도 나를 한 곳에 얽어맬 수는 없다. 서로 목적이 일치했기 때문에 함께 행동한 것에 불과하다.”

딱딱하던 그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 같은 무언가가 떠올랐다.

“혹시 베네지아의 추적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면, 안심해도 좋다. 왕자님을 포함한 왕가의 어느 누구도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니까. 언제 어디로 떠나든 그건 오롯이 내 마음이니, 누구에게 통보할 의무 또한 없지.”

『이 자식, 제정신인가?』

메멘토 모템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마르크의 발언은 즉, 자신의 신변에 이상이 생겨도 도와줄 이조차 하나 없다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근데 하필 그런 말을 자기 적들 앞에서 한다고?

이만큼이나 무모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그의 ‘흥미’란 뭘까? 문득 궁금해진 스테치가 물었다.

“그래서, 이 먼 곳까지 직접 행차하신 이유는 뭐지?”

“내가 지금껏 왜 이 모든 질문에 순순히 답해 주고 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나?”

질문에 질문으로 받아친 마르크를 보며, 스테치가 되물었다.

“……글쎄? 왜?”

“그렇게 해야만 네가 내 요구를 들어줄 거란 생각이 들어서다.”

마르크의 눈이 스테치에게 향했다.

“이전에 못다 한 승부의 결판을 내도록 하자. 내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다.”

“승부라니? 설마 감비니 요새에서 싸웠던 거?”

정말 그까짓 이유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자기를 찾아왔다고? 어처구니없다 못해 힘이 빠질 지경이다. 얼굴을 짝 소리가 나도록 손바닥으로 덮은 스테치는, 끄으윽- 하고 신음했다.

“……진짜 생긴 것처럼 머릿속도 한결같은 놈이네, 이거.”

마르크의 얼굴은 스테치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시종일관 진지했다. 그는 도리어 말했다.

“한 개인이 왕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그렇게나 치밀한 계획을 짜서 실행으로 옮긴다니.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쯤이라면 누구나 해 보겠지만, 그걸 실제로 행하는 이는 없지. 게다가 젊은 나이로 성취했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강대한 무력…… 대륙 어느 곳에서도 네 녀석만큼이나 내 흥미를 돋우게 만드는 놈은 없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튀어나올 때마다 입술 끝이 어색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스테치. 듣는 것만으로도 오그라들 지경이다. 함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레나는 어이가 없었는지 고개를 살짝 가로젓다가, 스테치의 얼굴을 보더니 도끼눈을 뜨며 손바닥으로 등짝을 내리쳤다.

짝!

“악!”

그제야 정신을 차린 스테치는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한 뒤, 마르크가 했던 말들을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마르크 맥도웰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다른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있을까?

『없어.』

메멘토 모템이 단언했다.

『만약 널 죽이는 게 목적이었다면, 널 데스나이트에게 던져 놓고 도망갔을걸.』

‘내 생각이랑 똑같구먼.’

스테치는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마르크 자식하고 싸우는 건 둘째치고 엮이는 것조차 싫어. 그런데 내가 꺼지라고 해 봤자 저놈이 순순히 들어먹을 놈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제아무리 마르크가 베네지아 왕국에 대한 충성심이 희박하다곤 해도, 그는 스테치가 복수하는 것을 방해한 결정적인 인물이다. 게다가 지금의 스테치에게는 지체할 수 없는 일정이 있다.

마르크를 상대하지 않을 이유는 충분히 차고 넘치는 셈이다.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넌 오늘 있었던 싸움에서 승리했어.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제법 힘들게 쟁취해 낸 승리이기도 했지. 사정상 커스드 클록이나 다른 어빌리티들을 쓸 수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뭐 어쨌든.』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저놈 데려가.』

‘……너 진짜 뒤질래?’

스테치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아무 말도 없이 변화하는 그의 표정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르크였지만,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엘레나를 본 그는 팔짱을 낀 채 스테치의 대답을 기다렸다.

『앞으로 데스나이트, 혹은 그보다 더 강한 놈들이 얼마나 튀어나올지 또 누가 알아? 슬슬 이쯤에서 전력을 늘려 놓는 선택지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어.』

‘나는 그런 생각 안 해 본 줄 알아? 하지만…….’

『정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나도 그걸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하지만 명심해. 지금 네 눈앞에 있는 남자는 상당히 우직하고 단순한 녀석이야. 누군가의 뒤통수를 칠 위인은 못 돼. 간단한 미끼 정도만 던져 줘도 강아지처럼 네 뒤를 졸졸 따라올걸? 이렇게 굴리기 편하면서도 능력 있는 놈을 또 어디서 구하겠냐?』

메멘토 모템이 하는 말은 스테치가 전부 떠올려 본 내용들이었다. 지금도 제법 많이 성장하긴 했지만, 메멘토 모템의 힘은 아직 반절도 채 개방되지 않았다.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전력 증강을 위해 마르크를 어떻게든 꼬셔서 일행으로 삼는 편이 낫겠지만…….

한참을 고민하던 스테치가 결국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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