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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세계수의 끝에서 (124/203)


124화 세계수의 끝에서
2022.02.02.


몬스터로 변이된 도린을 해치우고 세계수의 꼭대기를 향해 다시 이동하기 시작한 스테치 일행이었으나,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세계수를 오르는 유일한 방법은 영양공급관의 상승 기류를 타는 것뿐이었지만, 특정 시간대가 되면 역으로 하강 기류가 발생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때문에 스테치 일행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그 자리에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위쪽 층계로 올라갈수록, 원로원 의장이 얘기했던 면역 시스템이 나타나 그들을 공격해 댔다. 세계수가 오염된 탓인지, 상당수가 도린처럼 기괴한 형태의 몬스터로 변이한 상태였다.

“크어어억!”

우락부락하게 성장한 와일드 바인이 입에서 괴성을 토해 내고는 쓰러졌다. 막 검을 휘두른 자세로 서 있던 스테치는 한쪽 무릎을 꿇었고, 그사이 메멘토 모템은 몬스터를 흡수하여 마력으로 환원시켰다.

“이쪽도 전부 처리했다.”

마르크가 스테치에게 걸어오면서 입을 열었다. 엘레나는 상당히 어둑어둑해진 바깥을 내다보더니 고개를 가로젓고는 말했다.

“시간이 다 됐어요. 하룻밤 자서 체력을 보충했다가 이동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앞으로 몇 시간 동안은 위로 올라갈 수 없으므로, 잠깐 눈을 붙이기 좋은 타이밍이다. 스테치는 물론이고, 나머지 두 사람 모두 온종일 상승과 몬스터 죽이기를 반복하다 보니 피로가 상당히 누적되어 있었다.

스테치가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조금만 쉬었다가……. 다시 올라가자.”

그다지 휴식을 취하기 좋은 환경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스테치가 입 안에서 곱씹은 말이었다. 세계수의 상층부에 가까워지면서, 병에 찌든 세계수의 내피 곳곳에서 참아 주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썩은 내가 풍겨 나왔다.

일단은 나무 안에 있다 보니, 모닥불을 피우기엔 영 찝찝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엘레나가 가지고 다니는 유령불 랜턴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낮에 뭔가 줍지 않았던가요?"

엘레나의 말을 들은 스테치는 그제야 비로소 낮에 습득했었던 도린의 소지품을 떠올렸다. 바쁘게 움직이느라 완전히 까먹고 있던 스테치였다.

“내용물은 나도 아직 안 봤어. 잠깐만…….”

스테치는 작은 배낭을 하나 꺼내 안을 뒤져 보았다. 지도 하나, 거기에 별거 아닌 잡동사니들이 약간. 다른 곳을 뒤져 보던 스테치는 구겨진 종이 두어 개를 찾아냈다.

그곳에는 그레이 스컬쉽의 선장으로서 활동하던 도린의 개인 메모가 조금씩 남아 있었는데, 덕분에 스테치는 미처 알아내지 못한 도린의 신원에 대해 약간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거야 뭐,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내용들이니까.”

종이를 다시 쑤셔 넣은 스테치가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하다못해 도린이 마지막 순간에 먹었던 약이 남아 있진 않을까 하고 기대했지만, 그런 건 역시 없었다.

“지친다, 지쳐.”

스테치는 자기 배낭에서 육포와 견과류 등을 꺼내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지금까지 세계수를 오르면서 싸웠던 적들은 모두 강력하긴 했지만, 핀드가 된 도린만큼은 아니었다. 덕분에 스테치는 소모했던 마력들을 어느 정도 회복시킬 수 있었다.

“응?”

유령불을 멍하니 응시하던 스테치가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마르크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스테치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던 거지? 스테치가 그에게 물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다면, 지금 말해.”

“……딱히. 그저 생각을 좀 하고 있었을 뿐이다.”

마르크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딘지 모르게 답답해 보이는 그런 느낌. 잠시 스테치를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세계수는 평화와 안정의 심볼이자, 자연을 수호하는 신성한 나무다. 그걸 망가뜨리는 건…… 일반인의 머리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발상이지. 난 이 위에서 무엇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지 도저히 상상이 되질 않는다.”

옆에서 듣고 있던 엘레나가 흘끔 마르크를 쳐다보았다.

“너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브라이언 아텔리어.”

“뭐?”

이상한 호칭에 어리둥절해하던 스테치가 엘레나를 되돌아보았다. 스테치가 능력을 사용하고 쓰러진 직후 너무 놀란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성을 불렀다는 점을 그제야 깨달은 엘레나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양미간 사이를 꼬집었다.

“너는 처음에 이렇게 설명했다. 단순히 누군가의 부탁으로 조사와 추적을 진행 중일 뿐이라고. 하지만 가면 갈수록 지금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너 개인과 더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 말이 틀리나?”

스테치는 낮 동안 탑을 오르면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세계수의 각 층계에는 스테치 일행을 막기 위해 남은 광신도들로 즐비했다. 그들 모두 스테치를 볼 때마다 남다른 적개심을 표출해댔으니, 마르크가 이상하다고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이놈이고 저놈이고 죄다 아는 척을 하는데, 나도 몰라. 모른다고.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좀 접고 넘어가면 안 될까?”

두 번씩이나 거듭 강조해서 대꾸하는 스테치의 얼굴은 짜증으로 가득했다. 당사자가 단호하게 대화를 거부하자, 마르크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젠장, 사람 기분 나쁘게시리.”

스테치는 유령불 랜턴을 등진 채로 잠을 청했다.

* * *

다음 날.

통로의 상승 기류가 다시 불어오기 시작하면서, 스테치 일행도 이동을 재개했다. 몬스터들과 광신도들을 차례로 해치우며 수월하게 나아간 세 사람이었지만, 다른 문제도 있었다.

“헉…… 헉…….”

콱!

지면에 검을 꽂아 넣고 지팡이처럼 짚은 스테치는, 이상해질 정도로 숨이 가빠진 것을 느끼며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들이 서 있는 장소는 세계수의 끝자락. 일반적인 사람은 절대 도달할 수가 없는 고도인 것이다.

『산소 부족이군. 세계수가 아니었다면 진작 싸우는 도중에 쓰러졌을 거다.』

메멘토 모템의 충고에 스테치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이제 꼭대기까지 고작 몇백 미터만 남긴 상태. 그래서 그런지 세계수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단단한 내피와 나무껍질들이 새까맣게 물들어 바스러지고 있었다.

“가 보자.”

스테치는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마지막 상승 기류에 몸을 실었다. 꼭대기에 다다르는 데에 걸린 시간은 고작 1분에 불과했다.

부웅-.

“으옷!?”

스테치와 엘레나는 영양공급관을 통과하자마자, 천장이 없이 훤히 드러난 세계수의 모습을 보고 기겁했다. 다행스럽게도 무사히 지면에 착지한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푸른 하늘이 남색으로 짙어지고,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반짝이는 별들이 보이는 위치. 마치 공중에 설치된 거대한 무대 위로 올라온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스테치의 시야에 누군가의 모습이 들어왔다.

로브를 뒤집어쓴 광신도 둘이, 세계수 꼭대기 한가운데에 선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평범해 보였지만, 다른 하나는 거의 마르크에 비견될 정도로 엄청난 거구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도착한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일까? 여차하면 기습을 걸기 용이하도록, 스테치는 천천히 할로우 블레이드를 뽑아 들고선 몸을 바짝 낮추고 걸어갔다.

“……결국 와 버렸군.”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에 스테치는 김이 팍 새는 것을 느끼며 일어섰다. 어차피 기습도 실패했겠다, 이제 더 시간 끌 이유는 없었다.

“속전속결!”

『싱크로!』

스파크처럼 짜릿한 감각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타고 퍼져 내려갔다. 메멘토 모템과의 동조율이 한계치를 넘는 수준까지 상승하며, 평소엔 사용조차 할 수 없는 제3의 스킬들이 차례대로 해금됐다.

“《라이트닝 스피드》!”

타앗!

찍어 밟은 지면이 박살 나면서 포탄처럼 튀어나간 스테치가 검을 뽑아 들었다. 지금 이 순간, 할로우 블레이드는 리퍼와의 첫 싸움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맹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카아앙-!

거구의 남자가 한쪽 팔을 들어 팔뚝으로 스테치의 검을 막아 냈다. 생각지도 않았던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지고, 스테치는 상대의 상반신을 힘껏 걷어차면서 뒤로 빠졌다.

스테치는 첫 일격을 가하자마자 눈앞의 상대가 범상찮음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싸워 온 광신도들은 죄다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인간의 형태를 버림으로써 전투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저자는…….

“혹시나 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대적자가 이 땅에 발을 들여놓은 지도 벌써 오래전 일이라서 말이지. 설마 이런 기막힌 타이밍에 다시 한번 나타날 줄은…….”

“잡담은,”

말을 들어 줄 시간도 아깝다. 스테치가 공중으로 높이 뛰어올라 할로우 블레이드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집어쳐라!”

콰캉-!

이번엔 팔뚝도 아니고, 내려치는 검을 손으로 붙잡은 남자. 스테치는 그대로 검을 놓고선 지면에 착지한 뒤, 그대로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며 오른 주먹에 낀 너클을 휘둘렀다.

뻐어억!

턱밑에서부터 작렬하는 강력한 라이트 어퍼. 너클 끝에서 터져 나온 플라즈마 제트가 남자의 후드 밑 맨얼굴을 날름거렸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다만 검을 잡고 있던 손아귀에는 힘이 좀 풀렸는지, 할로우 블레이드는 곧 땅으로 떨어졌다.

“백업!”

스테치의 지시와 동시에 날아온 화살이 남자의 머리에 박혔다. 그러나 꿰뚫은 것은 후드뿐이었는지, 뽑아낸 화살 끝에는 피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다.

“……성질도 급한 친구들이로군.”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비교적 왜소한 체격의 사내가 경박한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스테치 일행을 조롱했다.

“으핫! 살짝 걱정했는데 결국 별거 아니었잖아?”

스테치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거구의 남자는 그런 사내를 팔로 가로막으며 나무랐다.

“상대는 저렇게 보여도 대적자다. 한순간의 방심이 우리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넣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방해되니 뒤로 빠져 있어라, 실베스틴.”

“하지만 주인님!”

불만을 터뜨리는 사내. 그러나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 중이던 스테치의 귀에는 무슨 내용인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스테치가 사내에게 물었다.

“네놈이 실베스틴 그레이스냐?”

“누구길래 날 알고 있는 거지?”

후드 아래에서 슬쩍 드러난 얼굴에 호기심이 엿보이자, 스테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 네가 적인지 아군인지 확실히 해 두지 않으면, 죽여야 할지 살려야 할지도 판단이 안 서서 물어본 것뿐이니까.”

늘어뜨린 할로우 블레이드의 풀러를 따라 황금빛 에너지가 대량으로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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