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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한계를 넘어 (126/203)


126화 한계를 넘어
2022.02.04.


콰아앙!

몬스터의 본체로부터 손 부위로 짐작되는 거대한 덩어리가 뻗어져 나왔다.

땅을 짚고 완전히 일어난 놈의 신장은 거의 5m를 넘어섰다. 세계수 꼭대기를 내리쬐고 있는 태양 빛과는 대조적으로, 몬스터의 몸은 칠흑 같은 어둠과 액체 질감의 무언가로 뒤덮어져 있었다.

“그어어어억……. 젠장!”

방금 전까지의 여유롭던 말투는 온데간데없었다. 몬스터가 된 사내는 스테치에게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반푼이 녀석의 어디에서 이런 저력이…….”

스테치가 가한 연속 공격은 사내가 뒤집어쓰고 있던 인간의 형상이 견뎌 낼 수 있는 대미지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덕분에 스테치를 상대로 적당히 시간만 끌 생각이었던 사내는, 본의 아니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수밖에 없었다.

탓!

상대가 주절주절 떠들어 대는 걸 전부 들어 줄 생각은 없었다. 높이 튀어 오른 스테치는 상대의 안면으로 왼손을 박아 넣은 뒤 《코어 블라스트》를 발동시켰다.

“우욱!”

큼직한 공처럼 부풀어 오르는 몬스터의 안면. 발로 강하게 걷어차서 손을 뽑아낸 스테치는, 그대로 몸을 회전하며 바닥에 착지한 뒤 곧바로 대시 했다.

‘검이 부담감을 덜어 주고 있다.’

할로우 블레이드는 놀랍게도 스테치의 마력 소모를 크게 감소시켜 주고 있었다. 덕분에 스테치는 싱크로와 검의 힘을 비교적 손쉽게 병용할 수 있었다.

‘이대로 계속 밀어붙이면……!’

촤악-!

몬스터의 방어를 번번이 깨뜨리며 공격의 속도를 높여 가는 스테치. 몬스터는 그런 스테치를 붙잡기 위해 팔과 다리를 휘적거리며 주변의 지형을 완전히 작살내고 있었다.

몬스터로 변한 사내가 뻗친 손아귀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든 스테치는, 검을 앞으로 세워 손과 팔뚝을 양분했다.

그러나 거침없이 몬스터의 살을 베어 가르던 스테치는, 팔뚝 중간에 이르러서는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멈춰 버렸다.

“거기까지다!”

스테치를 반대쪽 손으로 붙잡은 몬스터는 그를 있는 힘껏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어찌 반항해 볼 여지조차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

뿌드득!

지면과 부딪치는 순간, 스테치가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자신의 뼈가 하나도 남김없이 박살 나는 소리였다. 일반인이라면 골백번 죽어도 모자랄 충격에, 스테치는 1초도 버티지 못하고 즉사해 버렸다.

『《리스트레인드 소울》!』

“허어억!”

그러나 메멘토 모템은 스테치의 숨통이 끊어지기가 무섭게 곧바로 되살렸고, 스테치는 마치 인생에서 첫 숨을 들이켜는 사람처럼 쓰러진 자세 그대로 헐떡였다. 뼈와 내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하게 회복되어 있었다.

“내, 내가 그러니까……?!”

『고작 한 번 죽었을 뿐이야! 일어서!』

잠깐 시야가 새하얘지는가 싶더니 그새 또 죽었다니. 실시간으로 마력을 소모 중인 와중에 한 번 죽기까지 한 것은 꽤나 치명적이었다.

스테치가 피로감도 채 가시지 않은 몸을 옆으로 굴리자마자, 그와 동시에 그가 누워 있던 자리가 움푹 가라앉았다.

콰광!

“보기보단 꽤 튼튼하군!”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광신도 사내는 스테치가 한 번 죽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듯싶었다. 스테치가 벌떡 일어나서 뒤로 물러서자, 사내는 그사이 스테치에게 반으로 갈렸던 팔을 원래대로 재생시켰다.

“흡!”

사내의 손바닥 위로 대량의 마력이 모이면서, 그를 노려보는 스테치의 주변으로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뭘 할 생각이지? 어떠한 공격에도 즉시 대응할 수 있도록 스테치가 자세를 낮추던 그때, 거대한 중압감이 스테치의 어깨를 짓눌렀다.

“으으윽-?!”

쿵!

스테치가 선 자리를 중심으로 지면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형성되었다. 도저히 두 다리로 서서 버티기 힘들 정도의 강대한 기운이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스테치는 검을 지팡이처럼 짚어 간신히 버텨 냈지만, 이내 한쪽 무릎마저 꿇고 말았다.

『중력장……! 계속 여기 붙잡혀 있으면 위험해!』

“그걸 내가…… 모르겠냐……?”

쿠구구-.

“그으아아악!”

부릅뜬 스테치의 눈과 콧구멍에서 핏방울이 줄줄 새어 나왔다. 상대의 압박에 정면으로 맞서려 들수록, 몸에 가해지는 부담감도 그에 따라 강해졌다. 스테치는 피로 물들어져 새빨개진 시야로 몬스터를 쳐다보았다.

“으윽……!”

빠지직-!

부들거리는 손으로 검극을 앞으로 향하자, 끄트머리에 집중된 뇌광이 번쩍이면서 뻗어 나가 몬스터를 강타했다. 그것은 스테치가 이상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기에 충분한 틈을 만들어 주었다.

‘됐다!’

빠른 백스텝으로 수 미터 이상 거리를 벌린 스테치가 검을 강하게 휘두르자, 할로우 블레이드의 검극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벼락이 지면을 긁으며 몬스터의 몸으로 쇄도했다.

“~~!!!”

연달아 쏟아지는 번개와 스파크에 몬스터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체내로 파고든 전류는 몸뚱이 전체를 휘젓고 다니며 사지를 마비시켰다.

《액티브 스킬 : 팬텀 바디. 실체와 유사한 형태의 허상을 만들어 조종합니다. 최대 5개까지의 허상을 동시에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원본과 거의 완벽하게 동일한 모습을 갖춘 더미 5체가 허공에서 튀어나왔다. 이런 건 그저 단순한 눈속임에 불과했지만, 그런 걸 알 턱이 없는 몬스터에게는 충분히 먹혀들 만한 전략이었다.

쾅!

원형으로 넓게 펼쳐진 중력장이 주변 일대를 뭉개 버리면서, 3체의 더미가 허무하게 소멸해 버렸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그것을 피한 나머지 2체는 그대로 몬스터에게 뛰어들었다.

“하아!”

더미를 앞세워 자신의 모습을 감춘 스테치는 혼란스러워하는 상대의 눈알 하나를 횡으로 베고 지나갔고, 몬스터는 고통으로 울부짖었다.

“끄아아아악!”

할로우 블레이드의 빛무리가 상처 주변에 남아 반짝이면서, 안구가 재생되는 것을 방해했다. 몬스터는 남은 한쪽 눈을 부라리며 스테치가 밟고 있는 지면 근처에 크고 작은 중력장들을 마구잡이로 전개시켰다.

쿠구궁!

스테치는 움푹움푹 파이는 바닥 사이에서 온전한 틈들을 내디디며 회피 기동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상대도 그런 스테치의 움직임에 점점 익숙해져 가는지, 중력장을 서서히 스테치가 이동하는 경로상에 맞춰 깔아 두기 시작했다.

“끄으윽!”

우직-!

막 앞으로 내디디려던 발끝이 바로 앞에서 펼쳐진 중력장에 눌려 스펀지처럼 뭉개졌다. 부츠가 찢어지고 피가 터져 나왔지만, 스테치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상처는 완전히 회복되어 있었다.

스치기만 해도 치명타. 몬스터로부터 멀리 도망치며 잠시 숨을 돌린 스테치는 크게 U턴 하여 다시 몬스터에게로 달려들었다. 여세를 몰아 단숨에 몰아쳐야만 녀석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단순하긴!”

몬스터가 손을 움켜쥐자, 넓게 펼쳐진 중력장이 수많은 구 형태로 재형성되었다. 파괴되어 있던 세계수의 나무 파편들이 중력 구로 빨려들어 가자 가루가 되어 바스러졌다.

퍼버벙!

날아온 구체들의 속도는 느렸지만, 하나하나의 파괴력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옆으로 몸을 돌려 피해도, 까딱 방심했다간 몸이 그대로 빨려 나갈 지경이었다.

지그재그로 회피 기동을 하며 상대에게 접근하던 스테치는 결국, 몬스터가 연달아서 발사한 중력 구 하나에 기어이 붙잡히고 말았다.

“잡았다.”

몬스터의 안면이 비틀리면서 웃음과 비슷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스테치를 더욱더 확실히 마무리 짓기 위하여, 남는 손으로 두 번째 공격을 준비했다.

파악!

갑자기 날아든 화살 하나가 몬스터가 치켜든 손바닥 위를 스쳐 지나가자, 한 점으로 모이던 마력이 산산이 흩어졌다.

“?”

온 정신을 집중하느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선뜻 알 수 없었던 몬스터는, 어리둥절해 하더니 고개를 돌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쳐다보았다.

“…….”

시위를 떠난 화살이 정확히 마력 집중점을 파괴한 것을 확인한 엘레나. 그와 동시에 그녀의 뺨을 타고 식은땀 한 방울이 또르륵 굴러 내려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울 수 있는 스테치와 달리, 그녀에게 있어서는 몬스터의 기술 하나하나가 즉사기였다. 고작 화살 한 발이었지만, 인간이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진 몬스터에게 날리기 위해선 나름대로 많은 각오가 필요한 한 발이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자신의 주문이 화살 한 방으로 파훼되었다는 것을 인식한 몬스터는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잡것이!”

그는 스테치에게 겨눴던 손을 그대로 꺾어 엘레나와 마르크를 조준했다. 대적자를 죽여야만 한다는 생각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미처 떠올리지 못했지만, 대적자의 동료인 저 두 사람이야말로 그의 약점이나 다름없었다.

크고 작은 중력 구체 수십 개가 날아가자, 스테치가 외쳤다.

“멈춰어어!”

퍼버버벙!

접촉한 지형지물들을 뜯어 삼키는 중력 구체들. 넓게 확산돼서 날아오는 탓에 마르크와 엘레나는 피하는 것도 여의치 않아 보였다.

정신없이 몸을 굴려 가며 죽기 살기로 피하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마지막 남은 구체 하나가 떨어졌다.

“……칫!”

마르크는 방패에 남은 충격 에너지를 약하게 쏘아 보내 엘레나를 옆으로 날려 보냈다. 구체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마르크는 그것을 완전히 피할 여유가 없었다.

꽈드득!

뒤늦게서야 측면으로 회피한 마르크의 다리 한쪽이 기괴한 소리와 함께 으깨졌다. 그 자리에서 기절해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끔찍한 상처였지만, 마르크는 두 눈을 질끈 감고선 터져 나오려는 목소리를 간신히 도로 삼켰다.

“마르크!”

몬스터가 다른 곳에 한눈을 팔고 있는 동안, 스테치는 자신을 구속하던 중력장이 조금 약해진 것을 느꼈다.

몸 전체를 둥글게 감싼 중력 구체를 바깥으로 팔을 끄집어낸 스테치는 《파이어볼》과 《에어 버스트》 등의 마법들을 난사하여, 몬스터를 후드리고 나서야 사방에서 쏟아지는 압박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팔에 두른 폰두스 완갑이 검의 무게를 눈 깜짝할 사이에 수백 킬로그램으로 불려 놓았다. 할로우 블레이드의 보조 덕분에 체감 무게는 한없이 0에 수렴했고, 덕분에 스테치가 휘두르는 검에는 무시무시한 가속도가 붙었다.

써걱!

타오르는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스테치의 검은 가드를 위해 들어 올렸던 몬스터의 강건한 두 팔을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잘라 버렸다. 바라크의 인챈트로 인해 절삭력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였다.

‘이대로 쓰러지고 싶다.’

움직이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팔과 다리의 근육들은 쇳덩이처럼 무겁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끝에 다다른 것은 자기뿐만 아니라 눈앞의 몬스터도 마찬가지였다.

썩둑!

검을 반대편으로 잡아당겨 다시 휘두르자, 이번엔 몬스터의 두 다리가 썰려 나갔다. 거구의 몸뚱이가 쓰러지면서 지면이 울리고, 스테치는 공중으로 높이 떠올라 뒤집어 잡은 검으로 몬스터의 양미간 가운데를 내리찍었다.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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