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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분쟁의 씨앗 (127/203)


127화 분쟁의 씨앗
2022.02.05.


팔다리가 잘려 나가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몬스터. 그러나 스테치의 검에 의해 머리통이 쪼개지자, 검날이 박혀 들어간 틈으로부터 안개 같은 느낌의 검은 안개를 피처럼 뿜어냈다.

푸화아악!

“!”

재빨리 고개를 돌린 스테치였지만 이미 온몸으로 검은 기운을 받아 낸 이후였다. 마구 경련을 일으키며 부들거리던 몬스터는 이내 축 늘어지더니, 더 이상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거구의 신체는 천천히 어둡고 찐득한 액체가 되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크으…….”

스테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려 보았다. 다리 한쪽을 절뚝거리는 마르크와 그런 그를 낑낑대며 부축하고 있는 엘레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르크의 다리는 엘레나가 마법으로 응급 처치를 해 두었는지 외견상으로는 비교적 멀쩡해 보였다.

“죽었나?”

그렇게 묻는 마르크의 반대쪽 손에는 기절한 실베스틴의 옷깃이 쥐어져 있었다. 오는 도중에 때려잡은 모양이었다.

“그런 것 같은데.”

스테치는 세계수에 박혀 있는 기계 장치를 바라보았다. 광신도 사내가 씌워 놓았던 방어막은 그가 죽은 직후 사라진 상태였다. 스테치의 말에 엘레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슈오오!

상승 기류를 뱉어 내고 있던 영양공급관으로부터 사람들이 하나둘씩 튀어나왔다. 로브 위에 갑옷을 걸친 그들은 바닥에 내려앉자마자 스태프를 겨누며 주변을 경계했다.

“모두 돌격…… 으음?”

그러나 한창 난전이 벌어지고 있을 거란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세계수의 꼭대기는 신기할 정도로 고요했다. 남아 있는 것은 웬 검은 웅덩이와 세 사람, 그리고 기계 장치 하나뿐.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누가 설명 좀 해 주겠나? 우린 여기에 지원을 하러 왔는데…….”

그들은 원로원 의장이 보낸 셸로어들이었다.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스테치 일행의 뒤를 쫓아왔지만, 출발이 늦은 탓에 좀처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나름 서둘러 와 봤더니, 이미 상황은 종료된 지 오래였다.

『스테치.』

셸로어와 대화하는 마르크와 엘레나. 그 와중에 메멘토 모템이 말을 걸어왔다.

『승리를 자축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장치를 파괴하기 전엔 끝난 게 아냐. 광신도 녀석 시체부터 흡수하자.』

“이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고개를 끄덕인 스테치는 바닥에 고인 검은 액체를 향해 반지가 끼워진 왼손을 뻗었다.

“커스 이팅!”

뽀그륵-.

그러나 검은 액체가 되어 고여 있던 몬스터의 사체는 흡수되지 않았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보기도 전에, 희미한 거품을 일으키던 액체는 갑자기 맹렬한 기세로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엘레나와 다른 엘프들도 이변을 눈치챘는지 잔뜩 긴장한 눈으로 그것을 응시했다. 검은 액체는 갑자기 안개처럼 대기 중으로 녹아들더니, 세계수에 무언가를 주입하던 기계 장치 주위를 에워쌌다.

스르르-!

기계가 뚫어 놓은 틈으로 스며들어 가는 기체. 그와 동시에 세계수가 크게 진동하더니, 수분기 하나 없이 말라비틀어진 대지처럼 쩍쩍 갈라졌다.

“뭐야……?! 《에어 불렛》!”

스테치의 손에서 발사된 공기의 탄환이 기계 장치를 완전히 박살 내 버렸고, 미처 세계수 안으로 주입되지 않은 액체들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더니 곧 증발했다. 하지만 이미 내피 안으로 침투한 몬스터의 잔재가 세계수의 부패를 가속시키고 있었다.

“기계를 파괴하는 정도로는 안 되는 건가?”

스테치가 이를 악물었다.

『아니, 할 수 있어.』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세계수를 좀먹고 있는 기운의 대부분은 사기야. 싱크로를 사용해서 동조율을 높인 다음, 주입 장치가 뚫어놓은 구멍을 통해 커스 이팅으로 사기를 빨아들이면…….』

아무렇게나 뚫은 구멍 따위로는 세계수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었다. 주입 장치가 설치된 장소는 사기를 가장 효율적으로 퍼뜨리면서 적의 방해를 피하기 위해 세심하게 계산된 위치였다. 커스 이팅을 사용하면 그 구멍을 통해서 뿌리까지 타고 내려간 사기를 도로 끌어 올리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조심해야 돼. 세계수 안에 축적된 사기는…… 지금까지 우리가 흡수해 온 사기의 양을 아득히 뛰어넘는 양이야. 솔직히 나조차도 이걸 해낼 수 있을지 걱정되는군.』

스테치는 삐걱거리는 팔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주입 장치가 세팅되어 있었던 자리까지 걸어갔다.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온 사람들은, 자그맣게 뚫린 구멍 틈으로 넘실거리며 새어 나오는 강렬한 사기에 놀라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싱크로!』

“커스 이팅!”

슈오오!

마지막 남은 마력을 사용하여 어빌리티의 효율을 끌어올린 스테치는 커스 이팅으로 세계수의 사기를 끌어당겼다. 마치 빨대로 지저(地底) 깊숙이 파묻힌 지하수를 빨아올리듯, 그 과정은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다, 단장님! 보세요!”

주위를 살피던 셸로어 하나가 외쳤다. 검게 물들어 있던 세계수의 내·외피에 생기가 되돌아왔다.

타고 남은 재처럼 까맣게 변색된 가지의 잎사귀들도 다시금 푸른 기운을 머금었다. 죽은 생명이 되살아나는 듯한 비현실적인 광경에 셸로어는 물론이고, 엘레나와 마르크도 놀라워했다.

“세상에.”

“으그극!”

세계수 곳곳에 퍼진 사기가 구멍을 통해 빠져나왔다. 왼손바닥 아래로 모인 사기가 정사각형의 큐브 모양으로 굳혀지자, 그것이 무엇인지 퍼뜩 눈치챈 스테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검은 아티팩트가 뿜어내는 한기에 손이 닿은 순간, 영혼마저 얼어붙게 만들 정도의 추위와 함께 스테치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어두워지는 세상 속에서 스테치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의 이름을 부르짖는 엘레나의 모습이었다.

‘……또 이건가…….’

스테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후…… 후…….”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들쑥날쑥하게 자란 수염. 거기에 비쩍 말라 초췌해진 얼굴. 숲속을 내달리던 남자는 수시로 주위를 살피면서도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늦은 밤인 데다 먹구름까지 낀 탓에, 그의 앞길을 밝혀 주는 것은 손에 들고 있는 랜턴 하나뿐이었다.

콰르릉!

결국 쏟아지는 빗방울. 가느다란 빗줄기가 굵직한 소나기로 되기까지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진한 풀 내음이 코를 찌르는 가운데, 남자는 갑자기 내리친 벼락에 놀라 발을 헛디뎠다.

“어어, 어엇!”

그대로 쓰러졌다면 우스꽝스런 꼴이 될 뻔했지만, 남자는 어떻게든 균형을 잡아 쉬지 않고 계속 나아갔다. 그러는 도중,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헉!”

거리는 상당했지만, 남자는 본능적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쫓아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미 숨은 턱밑까지 차오른 데다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지만, 뛰는 걸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콰광!

그 순간,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이 바로 코앞에서 떨어졌다. 남자는 시야를 새하얗게 채우는 섬광에 눈을 질끈 감았고, 결국 손에 든 랜턴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

화르륵-.

망가진 랜턴으로부터 기름과 불이 줄줄 새어 나오더니, 널려 있던 잡초로 옮겨붙어 순식간에 거대한 화염으로 변했다. 바람까지 불어닥치자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젠장.

남자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흠뻑 젖어 피부 위로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붙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스스슥-!

수풀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자 남자는 고개를 홱 돌렸다. 흔들거리는 나뭇가지와 풀을 헤치고, 누군가의 모습이 드러났다.

“…….”

남자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이로부터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러자 그것을 보던 상대가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아버지.”

남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이는 다름 아닌 그의 드워프였다. 마치 전시 상황이라도 된 듯 두꺼운 갑옷을 걸친 그는 남자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엑스턴.”

엑스턴은 천천히 시선을 옮겨 남자가 한쪽 손으로 감싸 안고 있던 어느 물건을 쳐다보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걸 가지고 있다는 건, 역시……!”

“아니야!”

남자는 물건을 뒤로 숨기며 외쳤다.

“이건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물건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탓!

남자는 엑스턴이 더 말을 이어 나가기도 전에 뒤로 돌아서더니, 자신의 키만큼이나 커진 화염을 뚫고 도망쳤다. 뒤에서 엑스턴의 외침이 들려오긴 했지만,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아직은 도망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헛되고 무의미한 희망이었는지 깨닫게 되는 건 불과 5분 뒤의 일이었다.

촤아악!

급하게 멈춰선 남자가 지면을 살짝 미끄러졌다. 빗물로 질척해진 바닥에서 진흙이 튀어 오르고, 남자는 그의 앞을 가로막은 이를 노려보았다.

“비켜라.”

“이제 그만두세요.”

고급스러운 무늬의 전통 복장을 입은 엘프 여성이 나타났다. 오른손에는 고목의 뿌리로 만든 스태프를 잡고 있는 그녀는, 슬픈 눈으로 남자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도 사실은 알고 계시잖아요.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잘못?”

그녀의 말을 들은 남자는 뱃속에서 뜨겁고 불쾌한 감각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후에 터져 나온 것은 그가 생전 입에 담아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폭언이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잘못이라면…….”

그는 엘프 여성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날 막으려는 너희들이 저지르고 있는 거겠지!”

남자의 손끝에서 작은 스파크가 터져 나왔다. 보잘것없지만, 지금의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발버둥이었다. 그러나 여성은 스태프를 한 번 슥 휘두르는 간단한 동작으로, 남자가 쏘아 보낸 스파크를 지워 버렸다.

“……이익!”

남자는 그 틈을 타 방향을 꺾어 왼쪽으로 달음박질쳤다. 숲을 벗어나서, 안전한 곳에 몸을 숨겨야만 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자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어왔다.

“그만.”

쾅!

난데없이 나타난 푸른 빛의 장벽이 남자의 앞을 막아섰다. 지금의 남자가 가진 힘으로는 절대 뚫을 수 없는, 사실상 파괴 불가능의 방벽.

남자는 방벽 표면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더니,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손으로 가려진 반투명한 방벽 너머에서, 번쩍이는 금속 갑옷을 걸친 건장한 사내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사이 남자의 뒤를 쫓아온 여성을 본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다친 데는 없나, 데스트라?”

“지금 내 걱정할 때야?”

데스트라가 울먹였다. 그러자 사내는 남자의 앞에 펼쳐진 방벽을 거둬들였다. 이윽고 데스트라에 뒤이어 엑스턴까지 나타나자, 남자는 도망갈 틈 하나 없이 그대로 포위되고 말았다.

“두 번 말하지 않겠습니다, 아버지.”

콰르릉!

푸른 벼락을 등진 채 남자를 응시하던 사내의 눈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남자가 품에 끌어안은 물건에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불길을 받아 반짝이는 그 물건은 밤하늘보다도 더욱 깊은 어둠을 발하고 있었다.

“그걸 저희에게 넘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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