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두 번째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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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두 번째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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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두 번째 꿈
2022.02.06.
“그렇겐 못 해.”
두 번 들어 볼 필요조차 없는 명확한 거부 의사 표시에, 사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등에 찬 대검을 뽑아 들었다. 통짜 금속으로 된 대검의 날에는 불꽃처럼 일렁이는 푸른 예기가 둘러져 있었다.
“잘 알겠습니다.”
쾅!
사내가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남자는 이미 몸을 날리고 있었다. 쇠약해진 신체로 행했다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 재빠른 동작이었다. 사내가 바닥에 찍힌 날을 비틀어 뽑을 때 즈음엔, 남자는 이미 저 멀리 도망친 이후였다.
“카인…….”
데스트라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수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대검을 깃털처럼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가, 병약해진 아버지를 상대로 공격을 빗맞힐 리가 없었다. 일부러 봐준 것이 아닌 이상에야…….
“……가자. 멀리 도망가시진 못하셨을 거야.”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그를 망설이게 만든 것일까. 데스트라는 검을 쥔 카인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막 돌아선 카인을 부르려다 말고 엑스턴을 돌아보자, 데스트라의 옷단을 붙잡은 엑스턴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잠시 시선을 교환한 두 사람은 카인의 뒤를 따라 활활 타오르는 숲의 깊숙한 곳으로 걸어갔다.
남자를 다시 찾아내는 것은 의외로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화마에 뒤덮인 숲은 매연 때문에 시계가 안 좋아진 데다, 이동할 수 있는 길까지 한정된 상황. 옛날이라면 모를까, 병약해진 지금의 남자로선 불길을 헤쳐 나가는 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세 사람은 흔적을 따라 숲으로 들어간 지 고작 30분 만에 남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우으읍, 콜록! 콜록!”
연기를 뚫고 남자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카인이 검을 크게 휘두르자, 짙게 낀 매연이 바람에 밀려 싹 걷혀 버렸다.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남자는 갑작스런 돌풍에 얼굴을 가리느라 한쪽 팔을 들고 있었다.
“…….”
살짝 기울인 팔뚝 뒤에서 카인을 노려보는 남자. 남자의 시선을 본 카인은 순간 멈칫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아버지는 어째서 자신을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가.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 놨던 감정들이 다시 표면 위로 떠오르려는 것을 억지로 삼킨 뒤, 카인이 입을 열었다.
“순순히 투항할 기회를 드렸는 데도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
“투항?”
남자가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내 각오가 고작 그런 말 한마디에 무너질 만큼 우습게 보이더냐?”
카인이 입을 다물자 남자는 양팔을 벌려 가며 설토했다.
“모든 것은 너희 셋을 위해서였다! 내가 여태껏 계획해 온 일들이 뭘 의미하는지 진정으로 이해했다면…… 이렇게까지 상황이 악화되지는 않았을 텐데.”
“이해요?”
카인이 자기 몸뚱이만 한 사이즈의 검을 들더니, 검극을 남자에게로 향했다.
“먼저 선을 넘은 건 아버지시잖아요.”
막 세상에 태어나던 때조차도 어른스러웠던 그가, 처음으로 어린아이처럼 남자에게 따지고 들었다.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찬 목소리. 때마침 카인의 어깨너머로 도착한 데스트라와 막 눈이 마주친 남자에게, 카인이 말했다.
“수십억 명의 무고한 이들이 아버지의 정신 나간 계획을 위해 희생됐습니다. 대체 우리들이 그 사실을 알고 어떤 반응을 보이길 기대하신 겁니까? 동정이요? 아니면 공감?”
저벅.
카인이 한 발짝 앞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그에 맞춰 뒤로 물러섰다.
“어떤 변명을 대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의 일이 아닙니다. 모든 걸 안 이상, 아버지가 하는 일을 좌시하고만 있진 않을 겁니다.”
남자가 움켜쥔 주먹의 손가락 사이로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나왔다.
자식들에게마저 거부당하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카인이 말했던 바와 같이, 이제 와서 포기하기엔 걸어 둔 판돈이 너무나도 컸다.
“네가 진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남자는 손에 쥐고 있던 검은 물체를 꺼내 보였다. 그의 마력, 그리고 지금까지 모아 온 모든 사기가 그 안에 모두 담겨 있었다. 한번 축적된 힘을 풀어내면 되돌리는 건 불가능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나도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빠지직!
검은 물체로부터 끌어낸 힘을 사용해 전격을 쏘아 보낸 남자. 카인은 피뢰침처럼 전기 에너지를 대검에 흡수시킨 다음, 그대로 빙 휘둘러 다시 남자에게 되돌려 보냈다.
남자는 카인이 생성했던 것과 같은 타입의 방벽을 전개하여 그것을 막아 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겁니까? 피를 나눈 가족들끼리?!”
안타깝다는 듯 탄식하는 엑스턴이었지만, 그런 그조차 눈앞의 싸움으로부터 도망치진 않았다. 양손에 낀 기계식 건틀릿의 주먹을 마주 대자, 주황빛 아우라가 이음매 사이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남자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자, 엑스턴은 드워프의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높이 뛰어오르며 주먹을 휘둘렀다.
콰과광!
건틀릿이 방벽을 후드리면서 발생한 충격파가 숲 전체로 퍼져 나갔다. 숲의 나무란 나무는 죄다 삼켜 버리며 커진 불길이 그 풍압에 밀려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그런 가공할 여파에도 불구하고 카인과 데스트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
데스트라가 스태프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리자, 나선형으로 얽힌 스태프의 뿌리 틈새에서 황금색 기운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떨어지던 빗방울들이 스태프 끝에 모이더니, 하얗게 굳어서 수정처럼 맑은 얼음 결정을 만들어 냈다.
쿠구구-!
연기처럼 새하얀 한기를 흘려 대는 결정. 데스트라는 얼음 결정을 매개체로 푸른빛의 광선을 남자에게 쏴 날렸다.
광선은 큼직한 얼음 덩어리들을 피워 올리며 방벽을 깎아 먹기 시작했고, 그것을 올려다보던 카인도 곧 행동에 나섰다.
“흠!”
푸른 검기에 휘감긴 대검으로 종베기를 시전하자, 방벽과 맞닿은 접촉면으로부터 불똥이 튀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방벽은 조용히 세 사람을 남자로부터 갈라놓고 있을 뿐이었다.
휙!
남자가 손을 하늘로 뻗어 올리자, 먹구름을 뚫고 내리친 번개가 그의 손바닥 안에 모였다. 10억 볼트 이상의 힘이 주먹만 한 사이즈로 압축되자, 사방으로 잉여 스파크를 발산해 댔다.
세 사람에게 탄환처럼 에너지를 나눠서 쏘아 보내는 남자. 그러나 그들은 방벽도 펼치지 않은 맨몸으로 번개를 옆으로 쳐 날려 버린 뒤, 방벽 위에 엄청난 맹공을 퍼부었다.
콰르릉!
지형 따위는 간단히 갈아엎을 정도로 강력한 힘의 격돌이 벌어졌다. 검은 물체의 마력을 뽑아 쓰는 남자의 능력도 결코 약한 것은 아니었지만, 세 사람의 협공을 막아 내기엔 아주 조금 부족했다.
“데스트라! 엑스턴!”
한창 공방을 주고받던 네 사람.
카인의 부름에 남은 두 사람이 다시금 방벽으로 돌진했다. 엑스턴의 건틀릿이 견고하던 방벽에 거미줄처럼 넓게 퍼진 균열을 만들어 놓았고, 데스트라는 그 위로 스태프의 얼음 결정을 탄환처럼 발사했다.
투콱!
유리창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방벽이 완전히 박살 나 버리고 말았다. 카인은 남자가 방벽을 채 재생성하기도 전에, 허공을 박차고 달려들어 거리를 좁혔다.
카인의 손안에서 대검이 반원을 그리는 순간, 남자의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춤까지 기다란 흉터가 만들어졌다. 쩍 벌어진 균열로부터 새빨간 피를 분수처럼 뿜어낸 남자는, 허공에 뜬 상태로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것도 아주 잠시.
빠악!
남자의 손에 얻어맞은 카인이 지면에 추락하더니, 물수제비처럼 연달아 튕겨져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엄연한 인외의 존재. 진흙이 좀 묻고 갑옷이 찌그러지긴 했지만, 카인은 멀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도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는지 그런 카인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상처는 이미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회복되어 있었다.
저마다 생각하고 있는 바가 미묘하게 다르긴 했지만, 크게는 동일했다.
‘힘을 얼마나 더 써야 하나?’
남자도, 세 사람도 모두 이렇게까지 싸워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특히 카인을 포함한 나머지 둘은 이런 상황 자체를 상정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가급적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남자를 저지하기에 적당한 힘이 얼마만큼인지 가늠해 보는 중이었다.
“제법이긴 하지만, 그래도 날 막기엔 아직…….”
남자는 갑자기 말하던 것을 중단하더니 입을 틀어막았다. 그것을 보고 있던 카인이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몸을 크게 움찔거린 남자가 결국 입을 벌렸다.
“우웁…… 브웨에엑!”
알 수 없는 액체를 게워 낸 남자. 철퍽거리는 지저분한 소리를 일으키며 떨어진 액체를, 가까이 서 있던 카인이 다가가 내려다보았다. 처음엔 피인 줄 알았던 그것은, 제대로 확인해 보니 성분을 알 수 없는 검은 액체였다.
‘큰일 났다.’
남자는 카인을 내려다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본디 그의 몸에 담겨 있어야 할 마력은 하나도 남김없이 검은 물체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계획을 진행하느라 그 상태를 너무나 오래 지속한 탓에, 갑작스럽게 끌어다 쓸 수 있는 마력량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굶은 사람이 갑작스럽게 많은 음식을 섭취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슬슬 끝이 보이는군요.”
남자의 몸 상태를 알아챈 카인이 중얼거렸다.
“……넌 옛날부터 눈치가 아주 좋았지.”
상대는 그의 자식들이며, 동시에 분신들이기도 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언제까지고 싸움을 이어 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아무리 버텨 봤자 제압은 고사하고, 결국은 도망치는 길밖에 남지 않은 건가.’
남자는 속으로 한탄했다. 계획의 핵심이자 목표나 다름없는 세 자식과 적대 관계가 된 지금, 이미 그가 하는 행동의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사실상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휘이익!
카인으로부터 등을 돌린 남자는 어딘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데스트라를 필두로 하여 두 사람도 황급히 공중으로 날아올라, 그의 뒤를 추적했다.
“거기 서세요!”
데스트라가 외쳤지만, 남자가 그걸 순순히 들을 리는 없었다. 그러자 그녀를 바짝 따라오던 엑스턴이 외쳤다.
“틀렸어. 아버지를 멈춰 세우기 위해선…….”
뒷말을 삼키긴 했지만, 그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짐작해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죽일 각오로 공격해야 돼.
데스트라가 이를 악물었다. 과연 내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아버지를 내 손으로? 그러자 그런 고민을 듣기라도 한 듯, 카인은 그녀보다 쑥쑥 앞질러 나가며 말했다.
“내가 할게.”
파아앗!
검에 두른 예기가 카인의 몸 전체를 감싸자, 유성처럼 변한 그는 한층 더 빠르게 날아갔다. 마력을 제대로 뽑아내지도 못한 탓에 흐느적거리며 속도가 줄어든 남자에 반해, 카인은 육안으로 포착하기 힘들 정도로 가속했다.
뒤를 돌아본 남자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거리를 좁혀 오는 카인을 보고선 눈을 감았다.
스르륵-.
그는 검은 물체를 양손으로 붙잡고선, 천천히 가슴팍으로 밀어 넣었다. 검은 물체가 말끔하게 체내로 흡수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카인의 대검이 그의 등을 관통했다. 그 순간, 엄청난 폭발이 일며 주변 일대를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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