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화 개소리 집어쳐 (129/203)


129화 개소리 집어쳐
2022.02.07.


“…….”

의식이 돌아온 스테치가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엄청난 허기였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침상에 누운 채로 머리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과,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아침 햇살. 침대 옆 협탁에 놓은 향로에서는 달달한 꽃향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침상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스테치는 이국적인 디자인의 자수가 새겨진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어쩐지 휑한 느낌이 들어 다리를 오므린 그는 발코니 쪽으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았다.

“어…….”

이그젤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아하니, 그가 잠들어 있던 장소는 세계수의 내부였던 모양이다. 스테치가 위쪽을 올려다보니, 이그젤타에 왔을 때만 하더라도 새까맣게 죽어 가던 세계수에 파릇파릇한 생기가 되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도시의 상태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곳곳에 남은 파괴의 흔적과, 그것을 복구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 세계수를 오르느라 지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던 스테치는 그것을 보자 기분이 살짝 울적해졌다.

‘그러고 보니 얘는 왜 아까부터 말이 한마디도 없어? 또 뻗어 있나?’

스테치는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평상시라면 스테치가 깨어나자마자 같이 일어났어야 할 녀석이, 어째서인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스테치가 다시 한번 말을 걸어 보려는 찰나, 누군가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끼익-.

엘레나는 발코니에 서 있던 스테치를 보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에 든 물그릇과 수건을 떨어뜨렸다. 설마 그가 지금 깨어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 못 한 눈치였다.

“다행이다.”

어째선지 살짝 목이 멘 스테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엔 네가 나 때문에 힘들어 보이지 않아서.”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엘레나는 눈물을 참느라 얼굴을 이상하게 찡그렸다. 지금까지 했던 모든 마음고생이 그의 말 한마디로 싹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스테치는 눈가를 훔쳐 내는 엘레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며칠이야? 또 저번처럼 2주일 가까이 뻗어 있었던 건 아니겠지?”

말해 놓고 보니까 살짝 걱정되는 스테치였다. 그러자 천만다행으로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주일.

그것이 스테치 아텔리어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던 시간. 맨 처음 기절했을 때에 비하면 놀라울 만치 짧아진 기간이었다.

“이번엔 제가 할 일이 거의 없었어요. 도와주는 사람도 많았고, 또 아텔리어 씨의 몸 상태가 그렇게까지 나쁘지도 않았거든요.”

세계수 위에서의 싸움 이후로, 셸로어와 그의 동료들은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 지상으로 데려왔다. 레지아 계곡의 던전 때와는 달리, 스테치의 신체는 매우 안정적으로 검은 아티팩트의 기운을 흡수하고 있었다. 때문에 엘레나는 굳이 힘들여 그를 깨울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드레이노어 님, 오늘은 제가 돌…….”

닫힌 문을 열어젖히고 엘프 남성이 들어왔다. 그는 침대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스테치와 엘레나의 모습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깨어나셨네요! 몸은 좀 어떠세요?”

“아, 괜찮아요. 어디 뻐근한 데도 없고.”

스테치는 두 팔을 크게 휘적였다. 일주일 동안 누워 있었던 사람치고는 몸 상태가 아주 좋았다. 그러자 그는 크게 안심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거 다행이군요. 저는 의장님께 이 소식을 전하러 가 봐야겠습니다. 30분 뒤에 대회의소에서 뵙겠습니다.”

방을 빠져나가는 남성의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던 스테치가 엘레나에게 말했다.

“드레이노어라…….”

항상 가명으로 감춰 오던 그녀의 진짜 이름을, 어째서 이그젤타의 엘프가 알고 있는 걸까. 스테치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잠들어 있는 동안 제법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스테치는 깔끔하게 세탁된 케일럼의 정복으로 갈아입은 뒤, 엘레나의 뒤를 따라 세계수 안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길을 걸어 들어갔다. 조금도 길을 헤매지 않고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엘레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새삼 그녀가 이곳에서 뭘 하고 지냈는지가 궁금해졌다.

“궁금한 게 많이 있으시겠죠.”

엘레나가 입을 열었다.

“질문은 저보단 원로원 의장님께 하는 편이 나으실 겁니다. 그분도 마침 아텔리어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다고 하셨거든요.”

“마르크는?”

그러고 보니 마르크 맥도웰이 보이지 않는다. 딱히 그 덩치가 자신의 수발까지 들어 주길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고, 그저 엘레나를 구해 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엘레나가 말했다.

“도시의 복구 작업을 돕고 있습니다. 생각보다는…… 좋은 사람이에요.”

마르크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개선되었는지, 이전이라면 입에 담지도 않을 표현까지 쓰는 엘레나였다.

모퉁이를 두어 번 정도 더 꺾자, 두 사람은 대회의소의 문 앞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전에 방문했을 때와는 달리 문을 지키고 있던 셸로어 둘이 그들을 맞이했는데, 스테치의 얼굴을 보자 신기해하며 공손히 인사했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서자, 원형 테이블을 둘러싸듯 모여 앉은 엘프들. 누가 문을 열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곁눈질로 힐끔거리던 그들은 곧 반가운 표정이 되어 모두 기립했다.

“아아, 드디어 일어났군.”

스테치 일행이 세계수를 오를 수 있도록 안내해 주었던 원로원의 의장이 먼저 악수를 청했다. 이어서 나머지 의원들과도 인사를 마친 스테치는, 그들이 권하는 자리에 착석했다.

“저번에는 바빠서 자기소개를 할 여유가 없었지. 내 이름은 시무스라고 하네. 보다시피 이그젤타 원로원의 의장을 맡고 있고. 그래서, 몸은 좀 어떤가?”

“멀쩡합니다. 배가 조금 고프긴 한데…….”

그러자 시무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거 큰일이군. 나중에 같이 식사나 하러 가세. 일단…… 이야기부터 끝내 둬야겠지.”

시무스의 말에 스테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들어가겠네. 자네가 기절해 있는 사이, 우리들은 세계수 꼭대기에서 붙잡은 어느 상인 하나를 심문했네. 막 일어난 자네를 굳이 부른 이유는 그에 대한 소식을 알려 주고 싶어서였지.”

그제야 스테치는 광신도 사내와 함께 있었던 남자, 실베스틴 그레이스에 대해 떠올렸다. 의장이 직접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까먹었을 정도로 존재감이 적었던 탓이 컸다.

“애초에 그자는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더랍니까?”

“광신도들의 연락망과 이동 수단등을 물밑에서 지원해 줬다는군. 상당히 오랜 시간에 걸쳐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했던 모양이야. 일개 협력자치고는 알고 있는 게 참 많더라고.”

그 순간 시무스가 보인 표정은 스테치조차 움찔할 정도로 무서웠다. 당장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실베스틴을 살려 놓고 정보까지 뽑아낸 그의 초인적인 인내심은 실로 경이로웠다.

“어쨌거나…… 그는 실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많이 하더군. 그중 하나가 자네들이 구해 주었다던 그 카시아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네. 드레이노어, 설명해 주겠나?”

그러자 엘레나가 말했다.

“심문해 본 결과, 광신도들은 실베스틴을 통해 하덴브록 가문의 가주와 그의 여식인 카시아의 암살을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암살? 납치가 아니라?”

“죽이지 않고 납치한 것은 순전히 실베스틴 본인의 독단이었다더라고요. 납치한 그녀를 이용해서 경쟁자인 하덴브록 가문을 통제하고, 북부 상권을 집어삼키는 게 목적이었다는군요. 참고로 이 사실은 이미 통신구를 사용해서 카시아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실베스틴의 이런 독단 행동이 없었더라면, 카시아는 스테치가 환상에서 채 깨어나기도 전에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여정은 물론, 세계수 또한 누구에게도 들키는 일 없이 광신도들의 계획대로 오염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스테치는 정신이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그렇게까지 남부와의 교류를 막는다고 해서 광신도들에게 무슨 이득이 있지?”

“여기서부터는 내가 설명하지.”

시무스가 엘레나에게 손짓하며 바톤을 넘겨받았다.

“사실 우리 원로원에서는 이 소위 ‘광신도’라는 자들의 존재에 대해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네.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아, 알고 있었다고요?”

스테치는 그의 말에 깜짝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수월하게 납득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수가 오염된다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는데도, 한번 상황 파악이 끝난 시무스와 의원들의 거동은 이상할 정도로 침착했다.

“아스트랄 오라를 감지할 수 있는 장치라든가, 늦게나마 우리도 나름대로 대비를 강구해 두었는데……. 설마 그걸 고작 아티팩트 하나로 뚫고 들어오리라곤 생각조차 못 했네.”

‘대비책이 아주 없진 않았구나.’

장치는 완벽했지만, 도린의 강력한 아티팩트가 환상으로 장치 자체를 시야로부터 가려 버리면서 모든 것이 틀어졌다. 유일한 탐지 장비가 무력화되었으니, 인간의 모습을 취한 광신도들을 육안으로 구분해 낸다는 건 불가능했으리라.

“어쨌든, 중요한 건 우리가 그대들의 궁금증을 약간이나마 해소시켜 줄 수 있단 점이라네.”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 거죠?”

“예를 들자면…… 그래, 그 광신도 집단은 스스로를 ‘아치발의 신자’들이라고 부른다네. 그들이 북부에서 활동하게 된 역사는 상상 이상으로 오래되었지.”

아치발의 신자.

케일럼 왕국의 원로원에서 그들의 존재를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최근 본격적으로 활동이 잦아지기 전까진 맞닥뜨리게 된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라고 했다. 셸로어들은 단 몇 번의 접전으로 대응 방법을 찾아냈지만, 그들의 목적이나 본거지까지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한다.

“크로마토스 제국이나 사일라스 왕국에 서신을 보내 본 적은 있으세요? 도움을 청했다면 그쪽에서도 잘 들어줬을 텐데요.”

그러자 시무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찾아냈던 아치발의 신자들 중 하나가 바로 크로마토스 제국의 귀족이었네. 이처럼 누구를 믿어야 할지도 불분명하고, 누구의 귀에 무슨 정보가 들어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너무나도 한정되어 있는 법이지.”

아치발의 신자들에 대한 정보를 공론화하고 이웃국가들의 협조를 구하는 일은 생각 이상으로 어려웠다. 안 그래도 신출귀몰하고 은밀한 집단인데, 자칫 잘못했다간 역으로 그들이 몸을 숨길 기회만 제공하는 꼴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자, 그리고 아까전의 질문에 대해 이어서 대답해 보자면…….”

시무스가 양손을 깍지 꼈다.

“아치발의 신자들이 남부와의 교류를 막으려 한 이유는 간단하네. 그들을 적대하는 세력이 남부로부터 유입해 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지. 혹시 베네지아 왕국이라고 아나?”

그 말을 들은 스테치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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