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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변화 (130/203)


130화 변화
2022.02.08.


당장 급한 불도 껐겠다, 스테치는 다음 목적지를 정하기 전까지 당분간 이그젤타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처음 북부 항구에 도착하고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거의 쉴 틈 없이 달려온 탓인지, 알게 모르게 피로가 상당히 누적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휴우…….”

잠에서 깨어난 지도 오늘로 벌써 사흘이나 지났건만, 여느 때와 달리 메멘토 모템은 묵묵부답이었다. 반지는 평소 은은하게 뿜어내던 청록빛을 잃어버린 상태였지만, 스테치는 본능적으로 메멘토 모템이 그저 잠들어 있을 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긴 세계수 안에 들어차 있던 그 많은 사기를 단번에 빨아들였으니, 뭔가 이상이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닌가?’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스테치는 답답함에 못 이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문밖으로 나서자, 그는 완전무장을 갖춘 채 기다리고 있던 마르크와 마주치게 되었다.

“이런 썅, 깜짝이야!”

“오늘도 대련은 무리인가?”

스테치가 말없이 반지 낀 손을 절레절레 흔들어 보이자, 마르크는 실망한 기색조차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는 돌아가 버렸다.

약속한 대련을 위해 매일같이 스테치를 찾아오던 그는 반지가 먹통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이제는 매일같이 반지의 상태가 원래대로 되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괜한 걸 약속했나…….’

그의 끈기에 혀를 내두른 스테치는 이그젤타의 거리로 나갔다. 수많은 사람이 복구 작업에 자원해 준 덕분에, 도시의 경제 활동도 하나둘씩 재개되고 있었다.

‘젠장.’

의장의 말을 떠올린 스테치는 밀려오는 불쾌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설마 북부 대륙에서도 최북단에 위치한 케일럼 왕국에서까지 베네지아 왕국의 이름을 듣게 되리라곤 생각조차 못 했다.

“여기 이……‘배고픈 와일드 보어’ 세트 하나 주세요.”

식당에 들어선 스테치는 음식을 주문한 뒤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잠시 후, 테이블 맞은편의 의자를 당기더니 누군가가 멋대로 앉는 것이 아닌가. 스테치가 흘끗 쳐다보자, 시무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의장님? 어째서 여기에…….”

“며칠 전에 식사 한번 같이하자고 그러지 않았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스테치를 진정시키며, 시무스는 다른 음식을 주문하곤 말했다.

“며칠 전 이야기를 나눈 이후로 굉장히 신경 쓰였거든. 그렇게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내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네.”

“개인적인 일이 얽혀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때의 스테치는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베네지아 왕국에 대해 말해 주는 시무스의 말투는, 흡사 정의의 세력이라도 묘사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놀랐어요. 설마 엘레나가 의장님이랑 먼 친척 관계일 줄은…….”

뒤늦게 엘레나의 입으로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시무스는 초면부터 그녀가 엘프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고 한다.

원로원의 의장과 셸로어를 겸직할 정도로 고명하고 능력 있던 그는, 페이스 페인팅 정도 수준의 인식 장애술은 간단히 꿰뚫어 보는 것이 가능했다.

갑자기 난입한 스테치의 말을 잘 들어주었던 것도 어느 정도는 엘레나의 덕택이기도 했다.

일이 어느 정도 진정된 직후, 그는 엘레나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여러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엘레나가 속한 드레이노어의 혈족의 뿌리가 시무스의 혈족과 이어진다는 것. 이그젤타 기록 보관소에 남겨진 가계도를 통해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뭐, 친척치고는 아주 먼 관계지만 말일세.”

시무스의 안색이 안 좋아지는 것을 본 스테치는 입맛을 쩝 다셨다. 남부에 대한 소식을 거의 접할 수 없던 그는, 카델트 대사막 형성 이후 인종 차별적 분위기가 가장 팽배한 왕국이 베네지아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종종 저런 표정을 짓곤 했다.

“……아치발의 신자들은 이제 완전히 없어진 걸까요?”

계속 이렇게 있다간 입맛까지 싹 달아나게 생겼군. 그렇게 생각한 스테치는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글쎄? 자네가 노력해 준 덕분에 아치발의 신자들의 핵심 구성원이 제거된 건 맞지만, 규모가 확실히 판명되지 않은 탓에 이걸로 끝인지는…… 그러니까 내 대답은 ‘아니다’ 일세.”

시무스는 막 나온 야채 스프를 먹으며 말했다.

“그래도 걱정 말게. 이번 사건으로 녀석들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건 확실하니까. 거기다 대비도 더더욱 철저해질 테니, 최소한 똑같은 수로 두 번 당하는 일은 없겠지.”

스테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시무스가 말했다.

“솔직히 가장 큰 문제는 신자들보다도 그들이 몬스터로 만든 사람들이나 생물들일세.”

오염된 세계수의 영향은 이그젤타의 장벽 너머, 케일럼 왕국 영역 전체에 퍼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타 도시나 마을에서는 사람이나 가축들의 망령화로 인한 피해 소식이 간혹 들어오고 있었다.

발 빠른 조치로 대처법에 대한 통보를 해 두었지만, 사태가 완전히 진정될 때까지는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자네가 막아 주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군. 다시 한번, 고맙네.”

스테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향후의 일정은 어떻게 되는가?”

“딱히 정해 둔 곳은 없습니다. 워낙 여기로 오는 데만 서두르고 있어서…… 앞으로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죠.”

“이쪽은 모레부터 손님이 올 예정이라 바빠질 것 같네. 하지만 자네 이야기라면 항상 귀를 열어 두고 있을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말해 주게.”

“무슨 일이신데요?”

“크로마토스, 그리고 사일라스의 수장들이 대담을 요청해 왔거든. 그 정도 규모의 일이 벌어졌기도 하니, 더 이상 대화를 피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어.”

오염된 세계수의 흉흉해진 모습은, 케일럼의 땅 바깥의 두 왕국에서조차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평소와 달리 심상찮은 분위기에 놀란 두 나라는, 직통 연락망을 통해 앞다투어 상황 설명을 요구했다.

몬스터화 된 사람들이 자칫 다른 나라로 건너갔다간 문제가 훨씬 심각해질 우려가 있어서, 시무스는 하는 수 없이 그동안 미뤄 온 뒷사정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말했다시피 아치발의 신자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긴 어렵네. 다른 왕국에서도 이에 대해 알아 둘 필요가 있겠지.”

그렇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스테치는, 시무스와 헤어지고 나선 주머니에 꼬깃꼬깃 접혀 있던 공방으로 향했다. 시무스와의 대화는 일정 외의 일이었을 뿐, 사실 그의 본 목적은 따로 있었다.

“어디 보자…….”

미리 그려둔 삐뚤삐뚤한 약도를 보고 골목을 몇 번씩이나 돌아간 그는, 양지바른 곳에 우뚝 선 커다란 건물 하나를 발견했다. 이그젤타에는 크고 작은 공방들이 많았지만, 몬스터의 공격을 피해 간 건물은 이곳이 유일했다.

“실례합니다.”

“아, 오셨어요?”

먼저 와서 일을 보던 엘레나가 그를 맞이했다. 손을 들어 응답한 스테치는, 그녀의 옆에 선 채 심각한 얼굴로 테이블을 내려다보던 엘프 한 명을 발견했다. 그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엘레나에게 말했다.

“아가씨, 이건 아무리 봐도 무리입니다. 저 말고 그 어떤 뛰어난 장인을 데려와도 이걸 복원하는 일은 불가능할 겁니다.”

시무스와의 혈연관계가 드러났기 때문인지, 그녀를 대하는 이그젤타 엘프들의 태도는 매우 정중했다. 그 말을 들은 엘레나의 얼굴에는 실망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가요…….”

뒤에서 다가온 스테치가 테이블 위를 살펴보자, 아치발의 신도와 싸우는 과정에서 처참하게 망가진 만티코어의 갑옷 하나가 놓여 있었다. 강력한 중력장에 으스러지다시피 한 그의 갑옷은 이리저리 갈라지고 찢겨 있었다.

“역시 안 되나요?”

스테치의 질문에 엘프 장인이 대꾸했다.

“이 갑옷은 복원 한계점을 훌쩍 뛰어넘었어. 억지로 수리하면 못할 건 없겠지만, 같은 소재를 쓰지 않는 이상 원본의 방어 능력이 돌아오진 않겠지.”

장인의 말에 스테치는 그간 겪어 왔던 싸움들을 떠올렸다. 철갑옷도 견디기 힘든 공격들을 몇 번이고 받아 냈으니, 박살 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 그래도 막상 잘 써먹던 갑옷을 폐기 처분하게 생기자 아쉬워지는 스테치였다.

“그럼 갑옷은 됐어요. 나중에 적당히 다른 녀석으로 골라 입으면 되겠죠. 활은 어떻게 됐죠?”

스테치의 질문에 장인은 난색을 보였다. 엘레나가 공방에 방문했던 이유는 자신의 활을 개조하기 위해서였다. 활대와 시위를 마력으로 생성할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이었다. 파괴력도, 편의성도 출중하다.

하지만 역으로 그 탓에 전투를 벌이는 동안 실시간으로 마력이 소모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다.

“이쪽도 어떻게 해 보기 어렵습니다. 무언가를 덧붙이면 기존의 장점들이 사라져 버리고 마니까요. 이쪽도 당장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엘레나가 한숨을 내쉬자 장인은 머쓱해졌는지 뒤통수만 긁적였다.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공방을 나선 스테치와 엘레나는 얄짤없이 다시 숙소로 돌아가야만 했다.

“무기도 내려놓고 이렇게 편히 돌아다녀 본 것도 오래간만이네요.”

거리를 돌아다니던 도중, 갑작스러운 엘레나의 말에 스테치가 동의를 표했다.

“그렇지, 불과 최근까지도 정신없이 싸웠으니까.”

심지어 난 또 한 번 죽기까지 했지. 목구멍까지 튀어나오려던 말을 도로 삼킨 스테치였다. 한창 옆에서 스테치와 함께 나란히 걸어가던 엘레나가 그에게 물었다.

“……그쪽은 어때요?”

그녀가 가리킨 것은 다름 아닌 반지. 메멘토 모템이 의식을 잃었다는 이야기에 그녀도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여전히 무반응. 이러다가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살짝 들어.”

“그런 말 마세요…… 무사히 깨어나면 좋으련만.”

* * *

이후, 스테치는 엘레나의 손에 이끌려 그간 누적된 스트레스를 푼다는 목적하에 주변 구경을 다녔다. 복수에 대한 생각도 잠시 지워 둘 정도로 즐겁고 편안한 시간이었다.

결국, 함께 저녁까지 배불리 먹고 숙소 앞에서 헤어진 스테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침대 위에 쓰러졌다.

“어이구, 힘들다…….”

엘레나의 배려로 간신히 정신이 맑아진 기분이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오만가지 잡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치발의 신자들과 엮이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일도 없었을 텐데.

‘응?’

눈을 감고 그대로 곯아떨어지려던 스테치는 반지로부터 흘러나오는 희미한 빛에 시선을 돌렸다. 지금껏 쥐 죽은 듯 조용하던 메멘토 모템으로부터 나온 첫 신호였다.

멀어지던 의식을 도로 부여잡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스테치가 반지를 들여다보자, 익숙한 이미지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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