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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사후 처리 (132/203)


132화 사후 처리
2022.02.10.


의장의 부름에 맞춰 서둘러 대회의소로 향한 스테치와 엘레나. 대회의소로 들어가 보니 평소 분위기 잡고 앉아 있던 의원들은 온데간데없고, 의장인 시무스 한 명만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부르셨나요?”

시무스의 얼굴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두 왕국의 정상이 직접 온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그는 이그젤타의 경제를 다시 원활히 돌아가게 만들기 위해 수많은 문서들을 처리하고 지시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두 나라에서 이그젤타까지의 거리는 상당하다. 아직 손님이 도착하려면 한참 남았는데도 벌써부터 바삐 움직일 필요가 있나? 스테치는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시무스를 쳐다보았다.

“와 줘서 고맙네. 실은 자네들한테 부탁할 것이 있어서 말이지.”

시무스는 테이블 위에 정리되어 있던 종이 뭉치를 한 손으로 뒤적이더니, 그중에서 한 장을 꺼내 스테치에게 건네주었다. 엘프 특유의 복잡하면서도 화려한 양식이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스테치는 어렵지 않게 그것이 무엇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이거…… 고용 계약서 아닙니까?”

길드에서 발행하는 전용 계약서와 형식이 완전히 똑같았다. 그러자 시무스가 말했다.

“자네들하고 우리, 양쪽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제안을 하려고 하네.”

시무스의 말에 스테치는 살짝 초조해졌다. 안 그래도 목적지만 정하면 바로 떠나려던 참인데 하필 지금? 대놓고 싫은 티를 낼 수 없어서 끙끙대는 스테치의 속내를 읽어 냈는지, 시무스가 얼른 말을 꺼냈다.

“듣자 하니 자네들은 다음 목적지로 삼을 던전을 찾고 있다고 하던데.”

“어떻게 아셨어요?”

“드레이노어가 알려 주었지.”

사실 본래 목적은 던전 자체보다도 그 안에 있는 아티팩트였지만…… 뺨만 긁적이는 스테치에게 시무스가 말했다.

“실망할까 봐 미리 말해 두지만, 케일럼의 땅에서 던전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네. 세계수가 자신의 영역 안에서 발생하는 사기의 농도를 낮춰 주기 때문이지. 그런데…….”

시무스가 둘둘 말린 편지들을 보여 주었다.

“어젯밤 늦게 마법으로 날아온 편지들이야. 전부 케일럼의 서로 다른 도시나 마을로부터 온 거다.”

엘레나와 함께 편지에 쓰인 글귀들을 훑어보니, 하나같이 갑작스런 던전의 출현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한탄글이었다.

아치발의 신자들에 의해 오염되어가는 동안, 세계수는 사기를 억제한다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해 버렸다. 그러자 통제받지 않은 사기들이 뭉쳐 던전을 형성해 버린 것.

“게다가 케일럼 왕국은 세계수 덕분에 대기 중의 마력도 풍부한 편이지. 그래서 그런가, 이번에 새로 나타난 던전들의 몬스터들은 통상에 비해 훨씬 더 강력하다더군. 지역 경비대들의 힘으로는 놈들의 공세를 막아 내는 것조차도 힘들다는 모양이야.”

던전의 위험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시간이 아닌, 바로 생성 과정 중에 투입된 대기 중의 마력량이었다.

재료가 적으면 만들어 낼 수 있는 결과물도 미약한 법. 때문에 제아무리 오래된 던전이라 할지라도 몬스터나 키퍼가 강하리란 보장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저희에게 도움을 요청하시려고요?”

엘레나의 물음에 시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면 던전을 파괴해 줬으면 하네. 필요하다면 최대한 지원해 주겠지만, 이쪽은 보다시피 각 지역으로 셸로어들을 파견 보내야 할 판이라 가용 인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하거든.”

도시의 복구와, 갑작스럽게 생겨난 던전들의 파괴 작업. 어느 것 하나 많은 일손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게다가 스테치 일행은 대륙 내에서 몇 안 되는, 단독으로 던전을 정리할 수 있는 이들이다. 시무스에게 있어서는 스테치가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물론 공짜로 해 달라는 건 아니야. 사례는 부족하지 않게 치르겠네. 던전에서 얻은 물건들은 당연히 모두 가져가도 좋네. 어차피 주인도 없는 보물들이니까.”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저렇게까지 굽히고 나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아무런 방해도 없이 협조까지 받고 돈까지 벌면서 던전을 돌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최상의 조건 아니겠는가.

스테치는 탁자 위에 놓인 펜을 들어 자신의 가명을 공란에 적어 넣었다. 서명을 확인한 시무스는 스테치와 힘찬 악수를 주고받은 다음, 그에게 말했다.

“좋아. 그래서 언제쯤 출발할 계획인가? 아, 재촉하는 건 아니고…….”

“일단 엘레나의 무기를 손본 뒤에 움직일 생각입니다.”

시무스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큼지막한 지도를 넘겼다. 둥근 원 형태의 케일럼 왕국의 영역 위에는, 던전의 위치를 표시한 것으로 보이는 X자 표시가 여럿 찍혀 있었다.

“다시 한번, 도와줘서 고맙군.”

스테치는 시무스에게 인사를 한 뒤, 대회의소를 나섰다. 일단 목표가 정해졌으니, 오늘 밤 내로 지도를 보면서 최적의 일정을 짤 예정이었다.

게다가 비록 시무스가 재촉은 하지 않았지만, 던전들에 의해 고통받는 지역들을 고려해 보자면 한시라도 빨리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흠?”

도중에 엘레나와 다른 길로 찢어진 스테치는, 평소보다 조금 빠른 발걸음으로 방까지 돌아가는 도중에 마르크와 마주쳤다. 싸움으로 인해 상처로 뒤덮였던 그의 몸은 회복 물약이라도 마셨는지 말끔하게 치유된 상태였다.

“브라이언.”

고개를 까딱이는 그의 모습에 스테치는 슬며시 눈길을 피했다. 자신이 두들겨 패 놓은 사람을 쳐다보며 떨떠름해하는 스테치와 달리, 마르크는 싸움의 결과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미안하지만, 지금 좀 바빠서.”

마르크를 무시하고 지나치려던 그는 우뚝 멈춰 섰다. 머릿속에서 줄곧 맴돌던 어느 생각. 그것을 떠올린 스테치는 천천히 뒤로 돌아서서, 목석처럼 벽에 기대어 선 채 자신을 쳐다보던 마르크에게 말을 걸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뭐지?”

“지금 내 힘으로, 제라드를 죽이는 게 가능할까?”

마르크 맥도웰을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른 스테치는,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품고 있었다. 아직도 메멘토 모템의 몇몇 능력들은 봉인된 상태였지만, 고작 싱크로 하나로 동방장군을 이겼다는 사실은 스테치가 그런 자문을 해 보기에 충분했다.

그러자 마르크는 답했다.

“이전의 너는 제3 왕자를 제거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 내는 데에 성공했다. 보급 차단, 적의 고립 유도. 하지만 베네지아가 또다시 그런 상황이 만들어지도록 놔둘 리가 없다.”

휴우. 예상대로의 대답이 튀어나오자 스테치는 한숨부터 쉬었다.

“베네지아 왕가가 그런 꼴을 당한 왕자를 어디에 무방비 상태로 내놓지는 않겠지. 때문에 너는 이제부터 왕자 개인이 아니라, 왕국 전체를 상대할 각오로 계획을 짜야 할 것이다. 그러니…… 만일에 대비해 준비를 더욱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

“……너 진짜 매정한 놈이구나?”

스테치가 쓴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꽤 오랜 시간 베네지아를 섬겨 왔던 동방장군이, 왕자 살해를 꿈꾸는 이에게 이렇게까지 냉철하고 적절한 조언을 해 주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저번에도 말하지 않았나? 나는 나 스스로의 힘을 단련하고 휘둘러 볼 기회를 마련해 준 첫째 왕자의 은덕에 감사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도 지금껏 그의 오른팔로서 힘을 보태 줘 왔지. 서로 간의 빚은 없는 셈이다. 아마 내가 너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해도 그분께선 신경도 안 쓰시겠지.”

마르크는 첫째 왕자인 랍토레스를 떠올렸다.

그의 성정은 얼핏 보면 온화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남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광인의 기질을 품고 있었다. 이제 와서 마르크가 적으로 돌아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를 베어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랍토레스였다.

“그나저나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는 거지?”

“대략적인 목적지들이 정해져서 계획을 짜려고. 너는 어쩔 건데?”

“나도 따라가는 거 아니었나?”

뻔뻔한 건지, 아니면 단순한 건지. 마르크의 대답을 들은 스테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오늘 나한테 그렇게 박살이 났으면서도, 여전히 날 따라오겠다 그 말이야? 승부는 이미 났다고.”

“맞다. 결과는 이미 나왔지. 그렇다면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나를 이긴 널 따라다니면서 보고, 배우고, 스스로를 갈고닦는 것이다.”

“……그런 행동에 의미가 있나?”

너무 어처구니가 없던 나머지, 스테치는 자기도 모르게 상대방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도 서슴지 않고 내뱉고 말았다. 하지만 마르크는 오히려 그의 말에 씩 웃으며 말했다.

“사람이 외모를 가꾸고, 지식을 쌓는 데에 있어 별다른 이유가 있던가? 결국은 전부 자기만족이다. 어차피 나도 내가 남들에게 이해받기 힘든 성격이라는 건 잘 알고 있으니,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의 말에 스테치가 말했다.

“뭐, 솔직히 넌 꽤 쓸 만한 편이야. 데리고 다녀도 나쁠 건 없겠지. 하지만 네가 내 뒤통수를 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잖아? 네 말대로라면 넌 나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자마자 바로 뒤통수를 칠 놈으로 보이는데.”

“최소한 지금은 별로 그럴 생각이 없다만…….”

최소한 지금은? 스테치는 눈살을 찌푸렸고, 잠시 고민하던 마르크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지. 오늘과 같은 싸움을 내가 다시 요청하기 전까진 너를 배신하지 않겠다. 약속을 지키지 않을 놈으로 보인다면 언제든지 그 검으로 내 목을 베라. 지금의 너라면 그 정도는 간단하잖나?”

“……진짜 어찌 돼먹은 놈이냐, 넌. 마음대로 해.”

밑도 끝도 없이 밀어붙이는 마르크의 억지에 못 이긴 스테치는 하는 수 없이 그렇게 대꾸했다.

* * *

“왜 이렇게 늦는 거야?”

며칠 뒤.

짐가방을 등에 걸친 스테치는 마르크와 함께 시내를 걸어가고 있었다. 출발할 준비는 이미 마쳐 둔 지 오래인데, 정작 엘레나는 장인에게 맡겨 둔 무기를 확인하겠다며 나간 이후로 좀처럼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가며 엘프 장인의 공방을 찾아가려던 스테치는, 때마침 맞은편에서 터덜터덜 걸어오던 엘레나와 마주쳤다.

“뭐야, 끝났어?”

“네. 마력으로 생성하는 무기의 특성상, 경도나 절삭력 등을 높이려면 그만큼의 마력을 더 투입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근본적으로 마력 소모율을 줄일 수는 없었어요. 대신,”

엘레나는 레코르다치오를 꺼내 보였다.

“대기 중의 마력을 끌어당길 수 있도록 세계수의 나무 조각을 덧붙였대요. 이러면 동일한 마력을 투입하고도 무기의 성능을 끌어올리기 용이해질 거라고 하네요. 그리고…….”

손잡이밖에 없는 레코르다치오에 마력을 불어넣자, 활이 아닌 기다란 장검이 나타났다. 푸른 마력으로 된 검은 그 이후로도 방패나 창과 같은 형태로 모습을 바꾸었다. 활밖에 만들어 낼 수 없었던 무기치고는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렇게 개조해 주셨어요. 물론 활 이외의 무기를 만들려면 조금 더 힘이 들지만요……. 그런데 이 사람도 결국 함께 가나요?”

“응.”

스테치의 확답까지 들은 엘레나는, 눈썹을 치켜뜨며 마르크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손을 뻗었다. 물끄러미 쳐다보던 마르크도 곧 자신의 손을 내밀어 악수하며 그에 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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