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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구원자들 (133/203)


133화 구원자들
2022.02.11.


“후우…….”

망루 끝에 걸터앉아 밤하늘을 구경하던 드워프 하나가, 기다란 한숨을 내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마을 주위를 둥글게 에워싸고 있는 급조된 목책과 곳곳에 세워진 횃대. 거기다 창이나 검 따위를 들고 교대로 경비를 서는 사람들. 불과 10일 전까지만 해도 평화로운 분위기가 가득하던 마을이었는데, 이제는 누가 봐도 영락없는 전시 체제다.

“리누아. 저녁거리 가져왔다.”

사다리를 기어 올라온 남자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가지고 온 피크닉 바구니를 열자, 안에 들어 있던 고기와 빵, 그리고 과일 주스가 눈에 들어왔다. 리누아는 쌍날 도끼를 내려놓은 뒤 바구니 앞에 앉아 손바닥을 비볐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구먼.”

“바깥 상황은 어떻지?”

“직접 보는 건 어때?”

남자는 리누아의 스파이 글래스를 사용하여 마을 바깥을 내다보았다. 짙게 깔린 안개 너머로 보이는 구조물이, 마을로부터 불과 1km도 채 안 되는 거리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거대한 던전이 돌연 마을 앞에 나타난 지도 벌써 20일째.

처음엔 모두가 마을을 버리고 도망가려고 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몇몇 젊은이들이 가장 가까운 이웃 마을로 지원을 부탁하기 위해 안개 속으로 사라졌지만, 바로 다음 날에 마을 입구 근처에서 토막 난 시체가 되어 발견되었다.

“이런.”

남자는 마을을 향해 접근해 오는 페일 라이더를 발견했다. 미끈한 비늘로 뒤덮인 몸뚱이, 그리고 세로로 찢어진 동공. 지면에 바짝 엎드린 녀석은 기다란 목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마을 주변을 탐색하고 있었다.

“어디…….”

남자는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 시위에 걸고 조준했다. 마을의 빈틈을 찾아내기 위해 기웃거리기 바빴던 페일 라이더는, 자신이 노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피융!

공기를 가르고 날아간 화살이 정확히 페일 라이더의 머리통을 꿰뚫었고, 녀석은 그대로 고꾸라져 버렸다. 리누아는 태연하게 빵과 고기를 뜯으며 물었다.

“잡았냐?”

“당연하지. 젠장, 잠시도 쉴 틈을 안 준다니까.”

몬스터들은 던전의 양식이 될 희생양을 구하기 위해 매일같이 마을을 습격해 왔다. 그러나 그것을 막아 낸 자는 다름 아닌 리누아와 그의 친구들이었다.

잠시 쉬러 고향에 온 리누아는 갑작스런 던전의 출현과 동시에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자, 용병으로서의 경험을 살려 몬스터가 쉽사리 접근할 수 없도록 방벽을 보강했다.

현역 모험가인 그들의 친구들도 공격해 오는 몬스터들을 특성별로 분류하여, 대응 방법들을 강구해 내는 데에 큰 보탬이 되었다.

“유르네스.”

리누아의 부름에 막 빵덩이 하나를 우악스럽게 찢어 먹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던 리누아의 얼굴은 수심으로 가득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먹을 거라면 차고 넘쳐. 문제는 방벽이랑 다른 것들이지.”

유르네스는 며칠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떼거리로 몰려들어 온 몬스터들을 막아 내기 위해 마을 문을 걸어 잠갔는데, 몸으로 밀어붙이는 녀석들의 공세에 이기지 못하고 방벽 일부가 그대로 쓰러져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기 중이던 모험가들이 발 빠르게 나서 준 덕분에, 마을로 유입된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방벽까지 보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임시로 수리한 방벽으로 버틸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거기다 화살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화살이 떨어지면 필연적으로 접근전이 발생하고, 그렇게 되면 사상자가 나오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수비 인력을 재배치해 두었으니 적들이 온다면 방벽으로 오기 전에 더 빨리 발견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자, 무력감과 스트레스에 지쳐 나가떨어지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무리도 아니었다. 일반인 중 이런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지금 당장은 리누아와 유르네스가 직접 나서서 적극적으로 움직인 덕분에 조금은 불안감이 가라앉긴 했지만, 그것도 얼마나 갈지는 알 수 없었다.

뒷말을 흐린 유르네스가 리누아에게 말했다.

“넌 이제 내려가. 슬슬 교대 시간이니까.”

“알았어.”

대충 자기 몫의 음식을 먹어 치운 리누아는 사다리를 타고 망루에서 내려갔다. 막 지면을 딛는 것과 동시에, 그는 희미한 진동이 발가락 끝을 타고 오르는 것을 느꼈다.

‘뭐지?’

진동은 잦아드는 일 없이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감각이 예민한 리누아 이외에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감지했는지, 불안한 얼굴로 각자 들고 있던 무기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 순간, 망루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이들의 외침이 마을 전체로 울려 퍼졌다.

“적습이다! 북서쪽 방향!”

올 것이 왔구나. 리누아는 도끼를 뽑아 들고 지정된 장소로 달려갔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몸을 쓸 수 있는 이들은 모두가 마을을 지키기 위해 방책 가까이에서 대기했다.

몬스터의 습격을 벌써 여러 번 겪은 탓인지, 마을 사람들의 움직임에는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리누아의 물음에 다른 누군가가 대신 대답했다.

“오르고녹스가 떼거리로 몰려오고 있어! 잘못하면 방책 따위는 그냥 무너져 내리고 말 거야!”

방책에 난 감시용 구멍으로 얼굴을 들이밀어 보니, 어둠 속에서도 번쩍이는 흉흉한 눈빛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오늘 손님은 저 녀석들인가.’

황소와 비슷한 모습에, 강철을 두른듯한 머리통과 더불어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뿔. 저런 놈들이 방책을 들이받았다간 마을이 쑥대밭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마법사!”

지시가 떨어지자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이들이 방책 위로 올라갔다. 그들이 들어 올린 손바닥들 위에는 어느새 자그마한 화염구가 떠올라 있었다.

“《파이어볼》!”

팍!

발사된 화염구가 멀리서부터 돌진해 오던 오르고녹스의 머리통을 두들겼다. 몇몇 놈들은 눈에 불똥이라도 들어갔는지 그대로 고꾸라졌지만, 대부분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큭!”

고작 불덩이 따위에 겁먹고 설 놈들이 아닌 것쯤은 예상했지만, 생각 외로 너무 많은 수의 오르고녹스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자 이번엔 대기 중이던 사수들이 나섰다.

“화살은 아껴서 쏴! 최대한 정확히 명중시키는 것만 생각해라!”

피융!

일제히 발사된 화살들이 오르고녹스 무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대부분은 강철 같은 뿔과 머리에 튕겨 나갔지만, 등허리를 제대로 맞은 오르고녹스들은 묵직한 소리와 함께 쓰러져 나갔다. 하지만 아직 돌진은 끝나지 않았다.

그동안 마법사들은 준비 중이던 다음 주문을 외웠다.

“《드래그》!”

“《아이스 웨이브》!”

쩌저적!

지면을 얼어붙게 만들던 냉기가 큼지막한 얼음 장벽을 만들어 냈다. 감속 주문으로 속도가 느려진 일부 오르고녹스들은 방벽을 채 뚫지 못하고 마을 바로 코앞에서 저지되었다.

하지만 기어이 모든 장애물을 돌파한 오르고녹스 한 마리가 마을의 굳게 닫힌 문을 들이받았다.

콰지직!

“썅!”

나무로 된 문을 뚫고 들어오는 뿔에 기겁한 모험가와 용병들이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이 마을은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있어서도 최후의 보루. 무슨 일이 있더라도 몬스터들의 침입을 막아야만 한다.

푸욱!

방책의 부서진 빈틈으로, 모험가와 마을 젊은이들이 든 피치포크와 검이 쑤셔 넣어졌다. 피투성이가 된 오르고녹스는 고통스런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꾸어어억!”

“해치웠나?”

뒤쪽에서 검을 들고 있던 새내기 모험가 미르가 중얼거리자, 리누아가 주먹으로 뒤통수를 후려쳤다.

“아야!”

“넌 그 멘트 좀 그만 쳐! 불안하게시리!”

방책 일부가 파괴되긴 했지만, 갑작스런 급습에 대응한 것치고는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이대로 무사히 넘어가 주면 좋겠는데……. 리누아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혹시 모를 2차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방책의 구멍으로 바깥을 살폈다. 그러자,

콰직!

“으옷?!”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기다란 창날. 제때 머리를 뒤로 빼지 않았다면 그대로 눈을 꿰여 저세상에 갔으리라.

리누아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들어 올리자, 구멍 틈으로 뱀 같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그를 노려보는 페일 라이더와 눈이 마주쳤다.

“젠장, 저놈은 또 뭐야?”

한편, 위에서 모든 것을 보고 있던 유르네스도 깜짝 놀라 리누아가 있는 쪽을 주시했다. 접근하는 것은 오직 오르고녹스뿐이었는데, 왜 갑자기 뜬금없이 페일 라이더가 방책 근처에서 나타났단 말인가. 그 순간, 유르네스는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오르고녹스들의 배 밑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어?”

오르고녹스들의 배면에 매달려 있던 페일 라이더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켜 세웠다. 흡사 유령과도 같은 그 모습에 유르네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오르고녹스는 그저 마을의 수비를 돌파하기 위한 방패였을 뿐, 진짜는 녀석들에게 붙어서 온 페일 라이더 부대였던 것이다. 몬스터가 생각했다고는 믿기지 않는 계책이었다.

“조심해! 페일 라이더들이…….”

그러나 유르네스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방책을 훌쩍 뛰어넘은 페일 라이더 하나가 마을 안으로 안착했다. 타고난 각력 때문에 어지간한 방책은 놈들을 저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으, 으아아! 잡아!”

무기를 든 사람들이 일제히 페일 라이더에게 달려들었다. 창과 꼬리를 휘두르며 반항하던 페일 라이더는 눈 깜짝할 사이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지만, 그런 그들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더 많은 페일 라이더들이 차례로 마을에 들어왔다.

“맞서 싸워!”

한번 침입을 허용한 이상, 이제 남은 것은 백병전뿐이다.

고함과 함성을 내지르며 페일 라이더 무리를 공격하는 사람들. 마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와중에 정문은 어느새 파괴되었는지, 페일 라이더들은 한층 더 기세를 올려 마을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악!”

창에 복부가 관통당한 모험가 하나가 공중으로 번쩍 들어 올려졌다. 페일 라이더가 그대로 창을 휘두르자, 배가 찢긴 모험가는 피와 내장을 흩뿌리며 지면을 굴렀다.

“이놈!”

탓!

몸집보다도 큰 쌍날 도끼를 휘두른 리누아가 페일 라이더의 목을 쳐 날려 버렸다. 빠른 속도로 상황을 정리해 나가는 그였지만, 파도처럼 몰려오는 몬스터의 공세를 막아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리누아, 뒤!”

누군가의 경고를 들은 리누아가 뒤를 돌아보자, 페일 라이더의 창이 그의 머리통을 꿰뚫으려 하고 있었다.

그때.

쿠구궁!

마을 위로 날아든 묵직한 무언가가 지면 깊숙이 꽂혔다. 페일 라이더는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마저 일시적으로나마 전투를 중단하게 만들 정도로 커다란 진동이 일었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먼지구름이 걷히고 떨어져 있던 물체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그것은 거대한 몬스터의 머리통.

몸으로부터 분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지, 목 아래로는 뜨뜻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 몬스터는 뭐지? 난생처음 보는 외견에 모두가 의아해하는 동안, 페일 라이더 무리들 사이에서 푸른 뇌광이 번쩍였다.

네다섯 정도의 페일 라이더들이 몸에서 스파크를 튀기며 털썩 주저앉았다. 희미한 연기와 함께 탄내를 풍기는 몬스터들의 사체.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한 페일 라이더들이 주변을 살피려는 찰나, 어딘가에서 날아온 화살들이 순서대로 그들의 머리를 관통했다.

털썩!

“뭐야?”

허수아비처럼 쓰러져 나가는 적들의 모습에 당황한 사람들. 리누아가 화살이 날아든 방향을 돌아보니, 검은 안개를 뚫고 세 사람의 인영이 마을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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