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명예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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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명예직
2022.02.12.
“다치신 분 없습니까!”
놀랍게도 들려온 목소리는 젊은이의 것이다. 마을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사람은 총 세 명. 덩치 큰 방패의 거한과 활을 든 여자, 거기에 검을 든 청년이 하나였다.
상대의 외침을 들은 리누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선 무기를 들었다. 아직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호의적으로 보인다고 해서 경계를 늦추는 것은 아마추어나 할 짓이었다.
그러자 청년은 그런 리누아의 반응을 보고선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품 안을 뒤적여 자그마한 금속 패를 꺼내 보였다.
“소개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제 이름은 브라이언입니다.”
“저건?”
케일럼 왕국 사람이라면 몰라볼 수가 없는 셸로어의 신분패. 패에 그려진 문장은 어설픈 실력으로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복잡했다.
그리고 눈썰미 좋은 드워프였던 리누아는 스테치가 보여 준 패가 진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셸로어의 문장…….”
셸로어는 대부분이 엘프들로 구성된 집단이었지만, 드물게나마 인간이나 드워프를 영입하는 경우도 없진 않았다. 뒤집어 말하자면 그건 그만큼 능력 있고 유능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하, 하지만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요? 누구도 이 마을 안으로 들어오거나 나갈 수 없는 줄 알았는데.”
마을 사람 중 하나가 꺼낸 말에 나머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러자 스테치가 말했다.
“여러분을 마을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든 놈이 바로 저놈입니다.”
그가 가리킨 것은 마을에 떨어졌던 몬스터의 머리통. 오르고녹스보다도 크면서 기괴한 각도로 꺾인 두 개의 뿔과, 해골처럼 바짝 마른 안면 등 상당히 위협적인 생김새였다.
“저 녀석의 이름은 데빌혼입니다. 안개를 깔아두고 목표를 서서히 옥죄어 가면서, 먹잇감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즐기는 악질 몬스터죠.”
스테치의 말을 들은 리누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용병으로서 온갖 일을 해 온 그조차도 이름만 들어 봤지, 실제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렇게 거대한 놈이 처음부터 마을을 공격했다면 단 10분도 버티지 못했을 터. 리누아는 갑자기 드는 오한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던전은 여전히 남아 있으니까, 일단 이웃의 다른 마을로 피신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리누아가 질문하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귀를 바짝 기울였다. 스테치는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마을에 머물러 계세요. 안개의 요인이 되는 녀석은 처리해 두었으니, 몬스터들도 섣불리 마을을 공격하려 들진 않을 겁니다.”
그러자 사람들로부터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장 마을을 비우고 도망쳐도 모자랄 판국에 계속 가만히 있으라니,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직후 스테치의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던전의 갑작스런 출현으로 피해를 본 마을은 여기 한 곳뿐만이 아닙니다. 현재 케일럼 전역의 여러 마을과 도시 근처에서도 이와 같은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고, 이그젤타의 셸로어들이 사태 수습을 위해 각지로 파견 나간 상태입니다.”
“다른 마을들도 다……?”
그제야 리누아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은 스테치가 내린 지시에 대해 납득할 수 있었다. 마을 밖으로 도망쳐 나가 봤자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혹시 그 일 때문인가?’
리누아는 갑자기 새까맣게 물들었던 이그젤타의 세계수를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던전이 나타났던 것도 거의 그맘때쯤이었다. 하지만 이렇듯 셸로어들이 지원차 직접 나타난 것을 보아하니, 이그젤타의 상황은 일단락된 듯 보였다.
“너희 둘은 여기 남아서 사람들을 지켜 줘. 아직 주변에 마을을 노리는 몬스터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까. 난 가서 던전을 처리하고 올게.”
스테치의 말에 엘레나와 마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발언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유르네스는 조심스레 손을 들으며 질문했다.
“저기…… 죄송하지만 다른 셸로어들은 어디 있죠?”
“네?”
그러자 스테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저희 셋이 전부예요.”
유르네스와 리누아는 순간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그럼 지금 저 위험천만한 던전에 홀몸으로 가겠다고 말인가? 제아무리 눈앞의 청년이 셸로어라고 해도 위험한 일이다. 크게 당황한 유르네스는 스테치에게 말했다.
“그, 그건 너무 무모해요!”
스테치는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멀찍이 있는 던전을 쳐다보았다. 이런 반응을 아예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일일이 자신이 괜찮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줄 시간이 없었다.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다른 마을은 피해를 입고 있을 게 분명했으니까.
“괜찮아요. 금방 끝내고 오겠습니다.”
탓!
스테치는 유르네스가 무언가 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던전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1km도 채 안 되는 거리여서 그런지, 던전의 입구까지는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살짝 가빠진 숨을 고르느라 잠시 멈춰선 스테치에게, 던전 안에서 튀어나온 고블린 하나가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우갸아악!”
촤악!
이제 와서 고블린 한 마리 정도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스테치는 뽑아 든 할로우 블레이드를 갈무리하며 중얼거렸다.
“지금부터 나올 몬스터들이 전부 이 정도 수준이면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겠네. 《패스 파인딩》.”
마력은 몬스터의 사체로부터 실시간으로 수급이 가능하므로, 아끼느라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스테치는 싱크로의 《라이트닝 스피드》로 가속을 건 뒤 던전 안으로 진입했다. 복잡하게 얽힌 길들을 빠르게 누비며 돌아다닌 스테치는, 전방을 가로막는 몬스터들을 전부 쓸어 버렸다.
“키엑!”
“커스 이팅!”
엄폐물 뒤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었던 페일 라이더의 목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마력으로 녹아내린 사체는 스테치의 반지로 빨려들어 갔다.
내디딘 발이 지면으로부터 떨어질 때마다, 한 템포 느리게 반응한 함정들이 뒤늦게 작동하는 소리가 스테치의 귀에 들어왔다.
대부분의 것들은 《애니멀 인스팅트》까지 써 가며 대비할 만한 위협조차 되지 못했다.
촤아악!
바닥을 미끄러지며 정지한 스테치의 눈앞에는 거대한 대공동의 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음?”
문득 허리춤에서 느껴지는 울림 때문에 시선을 아래로 떨궈 보니, 할로우 블레이드가 어느새 은은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하기야 그가 지금 들어와 있는 던전이 사실상 아치발의 신자들에 생성되었다는 것을 떠올려 보면, 그렇게 이상하게 여길 일도 아니다.
끼이익-.
육중한 강철문을 열어젖히자 조용하면서도 넓은 대공동이 나타났다. 미리 주워 두었던 돌멩이를 대공동 안쪽으로 던져 넣으니, 대공동 안쪽의 어둠으로부터 음산한 기운이 밀려 나와 스테치의 뺨을 훑고 지나갔다.
“오셨군. 어디 보자…….”
데빌혼이나 페일 라이더들 모두, 신생 던전에서 태어난 것 치고는 매우 위협적인 몬스터들이다. 과연 키퍼로는 어떤 놈이 나타날까?
“그르륵-.”
습기가 섞인 축축한 숨결과, 시큼한 악취. 파충류처럼 네다리로 기어오는 키퍼의 모습에 스테치는 뒤로 살짝 물러섰다.
꼬리 끝에서 등허리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솟아오른 뿔과 악어 같은 머리통. 주둥이 틈새에서 뚝뚝 떨어지는 끈끈한 액체는 땅에 닿자마자 맹렬한 부식성 반응을 일으켰다.
“……이건 뭐 하는 몬스터인지도 모르겠네.”
스테치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키퍼의 입이 쩍 벌어지면서, 목구멍 너머로부터 치밀어오른 산성 용액이 광범위하게 터져 나왔다. 스테치는 재빠른 동작으로 그것을 피한 뒤, 간단하게 키퍼의 측면으로 돌아갔다.
“하아아아!”
푸욱!
바라크의 전기를 두른 할로우 블레이드가 키퍼의 두꺼운 옆구리 가죽을 뚫었고, 키퍼는 기다란 꼬리로 자신을 공격하는 스테치를 후려쳐 버렸다. 그러나 저 멀리 날아가는 스테치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갑옷 성능 확실하네!”
부드럽게 지면을 한 바퀴 굴러 충격을 상쇄시킨 스테치는 감탄했다. 그의 몸 위에는 어느새 검고 반투명한 사기의 갑옷이 떠올라 있었다. 실체가 없어서 스테치의 움직임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 데다, 무게감도 없었다.
만티코어의 갑옷을 잇는 최고의 방어구였다.
“그오오오!”
키퍼는 육중한 몸을 비틀어 스테치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이번에도 액체 형태가 아닌, 기체 형태로 넓게 퍼지는 산성 가스를 뿜어냈다. 그 모습에 당황한 스테치는 달려들던 것을 멈추고선 뒤로 황급히 몸을 뺐다.
아무리 갑옷이 튼튼해도, 스테치 본인이 가스를 직접 흡입해 버리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법. 거리를 벌린 그는 메멘토 모템과 함께 주문을 연달아 날려 댔다.
“《에어 버스트》!”
『《파이어 볼》!』
푸화아악!
화염을 머금은 공기가 폭발하면서, 대공동의 절반을 채워 가던 산성 가스를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 《크로스 윈드》와 커스드 아머로 불의 폭풍을 뚫고 돌진한 스테치는, 키퍼의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틈을 타 폭발적으로 가속했다.
“흐아아앗!”
그가 노린 것은 할로우 블레이드가 허리 부위에 남겨 놓았던 상처. 스테치는 날아가던 속도 그대로 키퍼의 상처에 왼손을 쑤셔 넣었다.
“《코어 블라스트》!”
퍼어억!
키퍼의 옆구리가 종기처럼 울룩불룩 부풀어 오르더니, 피와 살점을 온 사방으로 퍼뜨리며 폭발했다. 어지간한 몬스터라면 단방에 저세상으로 보내 버릴 일격이었지만, 키퍼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간신히 버티고 서 있었다.
『약점이 드러났다!』
밝은 빛을 뿜어내며 맥동하는, 키퍼의 주요 장기가 찢겨 나간 몸뚱이 틈새로 보였다. 바깥으로 노출된 키퍼의 장기가 후끈한 김을 피워 올렸다.
“흠!”
거리를 벌리고 재차 달려든 스테치는, 너클을 낀 주먹을 장기 안 깊숙이 처박았다.
터져 나온 플라즈마 제트가 장기 내부를 휘저으면서 키퍼는 몸을 크게 한 번 비틀었고, 이내 코와 주둥이로 검은 연기를 뱉어 내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쿵!
질척하고 끈적한 핏덩이와 함께 손을 뽑아낸 스테치. 싱크로를 중단하면서 바짝 솟아올랐던 체모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헉…… 헉…….”
그는 살짝 멍한 표정으로 자신이 막 처치한 키퍼를 내려다보았다. 빠른 속도로 식어 가는 키퍼의 사체를 바라보며, 스테치는 자신이 지금껏 싸워 온 모든 키퍼들과의 일전을 떠올렸다.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코끝을 훔쳐 낸 스테치는 자기도 모르게 툭 내뱉었다.
“……뭐 이리 약해?”
* * *
리누아는 연신 눈을 비벼 댔다. 자신의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고도 믿기 어려워서였다.
스테치의 예상대로, 몬스터는 그가 떠난 직후 한 번 더 마을을 습격해 왔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나도 압도적이었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남았던 두 셸로어들은 몬스터들을 거의 찢어발기는 수준으로 도륙했고, 결국 몬스터들은 마을의 방책조차 건드려 보지 못하고 전멸해 버렸다.
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리누아와 함께 보고 있던 유르네스도 넋을 잃었다.
“……원래 셸로어들은 이렇게 세?”
“그, 글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대포 같은 위력의 화살을 수십 발씩 쏴 날리는 여자나, 방패로 몬스터들을 후드려 패는 남자나. 어느 쪽이건 셸로어의 평균을 아득히 뛰어넘은 실력자들인 건 분명했다.
그 순간,
“……어라?!”
쿠르르릉-.
진동을 감지한 리누아와 유르네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던전이 서 있던 방향으로 돌아갔다. 사람이 출발한 지 고작 30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던전은 벌써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당신들 대체 뭐 하는 사람들입니까?”
유르네스가 물었다. 그러자 한창 스파이 글래스로 던전이 폭삭 주저앉는 광경을 구경하던 여성은 그를 돌아보더니 말없이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