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도적과 범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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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도적과 범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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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도적과 범죄자
2022.02.13.
“샅샅이 뒤져! 놈들은 아직 근처에 있다!”
늦은 새벽, 버든 베어의 부둣가.
수십 명이 넘는 병사들이 횃불과 검을 들고선 부두에 늘어선 창고들의 문을 열어젖혔다. 골목길과 하수로에는 이미 별도의 수색부대가 돌아다니고 있었고, 조금이라도 수상해 보이는 수화물 상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옮겨져 나갔다.
“…….”
건물 옥상에서 이 모든 난장판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스카이는, 창고 옆에 쌓여 있던 어느 짐 상자들 주변으로 눈길을 돌렸다.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는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병사들이 뻔히 보고 있는 앞으로 몸을 날렸다.
“엇?!”
“한 놈 찾았다!”
퍼억!
남자는 몇 발자국도 채 도망가지 못하고 제압당한 뒤, 숨도 못 쉴 정도로 먼지 나게 두들겨 맞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스카이는 품 안에 손을 넣어 총을 꺼냈다.
“보스.”
그런 스카이를 제지하는 부하. 그는 자신을 돌아보는 스카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끓어오르는 눈빛에 억눌려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부하는 끝끝내 입을 열었다.
“가셔야 합니다. 당신의 부하가 만들어 준 기회를 헛되게 쓰지 마세요.”
“…….”
“다시 한번 말하지만, 녀석은 보스를 위해 이번 일에 자원한 겁니다. 그 의미를 알고 계신다면…….”
스카이는 말끝을 흐리는 부하를 째려본 뒤, 꺼냈던 총을 천천히 도로 집어넣었다.
스테치가 북부로 넘어가던 시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던 베네지아 왕가의 대대적인 수색 작전은, 이제 범위를 넓혀서 스카이의 멱줄을 조여 오고 있었다. 모든 것이 스테치가 베네지아의 셋째 왕자, 제라드 메서를 공격하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그가 ‘스테치 아텔리어의 지원 세력의 리더’로서 의심받고 추적당하는 건 진작부터 예상한 바였다. 스테치의 계획을 따르고 지지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스카이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상황이 너무나도 안 좋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나마 스테치가 철저하게 가명을 쓰면서 활동한 덕분에, 스카이와 그를 엮을 결정적인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베네지아 왕가의 입장에서 봤을 때 스카이가 이끄는 집단은 버든베어를 좀먹는 범죄 조직일 뿐이었다.
결국, 잡히면 모가지가 날아간다는 데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얼마나 잡혀갔지?”
스카이가 우울해진 목소리로 묻자, 그의 부하가 대꾸했다.
“23명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는 각오했던 바입니다. 우리 조직에서 보스를 배신할 녀석은 없습니다.”
“글쎄.”
자신이 스테치의 계획을 돕겠다고 했던 그 날, 수많은 부하들이 스카이에게 불만을 터뜨렸었다. 제아무리 끈끈한 의리와 신뢰로 구축된 관계라지만, 과연 끝까지 자신을 따라와 줄까? 스카이는 감히 장담할 수 없었다.
“저쪽이다!”
엉뚱한 방향으로 뛰어가는 병사들. 그 틈을 타 그림자 밑에 숨어 있던 스카이와 그의 부하는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발가락 끝에 힘을 주며 앞으로 걸어갔다.
어둠 속에서도 앞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특수한 고글을 쓴 덕분에, 골목을 걸어가는 두 사람은 어디 걸려 넘어지는 일 없이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썅. 기분 더럽네.”
스카이가 중얼거렸다. 방금 전 병사들의 이목이 다른 곳에 쏠린 것도, 스카이의 부하들이 자신을 희생하여 만들어 준 귀중한 기회였다. 모든 것이 그들의 리더인 스카이를 온전하게 버든베어 바깥으로 내보내기 위한 교란 작전. 마음이 가벼울 리가 없었다.
그때, 뜬금없이 웬 여성의 목소리가 그의 말에 답했다.
“뭘 어쨌길래 기분이 그렇게 안 좋으실까?”
스카이와 부하는 동시에 발길을 멈췄다. 그들이 걷고 있는 길목은 도시의 경비병들조차 들어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인적이 뜸한 장소였다. 그렇다면 이 목소리는 대체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또각-. 또각-.
부츠 굽 소리와 함께 어둠 속으로부터 천천히 걸어 나오는 한 여성.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새하얀 피부를 가진 그녀는, 소드벨트에 걸려 있던 두 개의 레이피어들 중 하나를 뽑아 들었다.
“만나서 반갑다, 더러운 쥐새끼 놈.”
“뭔데 초면부터 욕질이야, 아줌마?”
스카이가 눈을 부라렸다. 비록 자기소개는 없었지만, 그는 상대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이드릴 헨리에타.
‘썅.’
버든베어를 다스리는 주인이자, 베네지아의 서방을 수호하는 장군. 스카이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수색부대를 이끌고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본인이었다.
“근데 의외네. 나 같은 놈 하나 잡겠다고 직접 나설 줄은 몰랐거든.”
서방 장군이 직접 자신을 잡기 위해 몸소 행차하시다니, 그냥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전적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 동방의 마르크 맥도웰과는 대조적으로, 그녀가 나서서 싸우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매우 드물었다. 예외가 있다면…….
“그토록 오랫동안 내 속을 썩여 온 개자식을 잡을 수 있게 되었는데, 내가 왜 다른 놈을 시키겠어?”
엄청나게 열 받은 경우뿐이었다.
“……넨시, 뒤로 물러서.”
스카이의 지시에 부하가 깜짝 놀라서 반문했다.
“보스, 지금 여기서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싸울 게 아니라 피하셔야…….”
촤악!
넨시가 밟고 있던 지면을 중심으로, 무수히 많은 검은 스파이크들이 솟아올랐다. 잽싸게 옷깃을 낚아챈 스카이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넨시는 그 자리에서 넝마조각만도 못한 꼴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야, 이 바보야.”
스카이가 핀잔을 주었다.
“지금 상황 파악 안 돼? 안 피하는 게 아니라 못 피하는 거잖아.”
넨시의 등을 툭 쳐서 멀찍이 떨어뜨려 놓은 스카이는, 품 안에서 두 정의 총을 꺼내 들었다. 지금 여기서 싸움을 벌였다간 간신히 따돌려 놓은 병사들의 주목을 다시 받게 될 게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드릴이 그를 순순히 보내 줄 리도 없었다.
“적당한 곳에 숨어 있어. 이년을 처리하고 도시를 빠져나가자.”
“……예!”
별수 없다는 걸 깨달은 넨시는 반대편 길목으로 뛰어갔다. 생각외로 이드릴은 뒤돌아선 넨시를 공격하기는커녕, 스카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만큼 온 정신을 그에게만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까 전의 그 공격은…… 그림자인가? 넨시 덕분에 좋은 걸 알았군.’
이드릴 헨리에타의 아티팩트는 레이피어의 형상을 띄고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 능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는데, 그걸 미리 알 수 있었던 건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지면과 벽을 뒤덮은 그림자가 위협적으로 꿈틀거리자, 고글의 특수 제작된 렌즈 너머로 그것을 확인한 스카이는 뒤로 물러서는 대신 몸을 앞으로 날렸다. 바로 정확히 이드릴이 서 있는 방향이었다.
‘이 자식이 미쳤나?’
이드릴이 자신의 아티팩트 ‘녹터널’을 휘두르자, 주변의 그림자가 한꺼번에 일어서며 스카이를 공격했다. 그러나 몸이 피투성이로 찢어발겨지기 일보 직전에, 스카이는 한쪽 손을 이드릴에게로 향했다.
수갑 형태로 팔에 둘려 있던 정체불명의 장치. 스카이가 살짝 손목을 꺾자, 원통형으로 튀어나온 사출구에서 작은 구슬이 발사되었다. 공기와 접촉한 구슬은 맹렬한 화학 반응을 일으키더니, 강한 열과 섬광을 뿜어냈다.
“악!”
생각지도 못한 빛에 잠시 눈이 먼 이드릴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림자로 이루어진 날카로운 스파이크들도 빛을 쬐자마자 눈 깜짝할 사이에 녹아 없어져 버렸다.
설마 자신의 능력을 보고도 겁 없이 앞으로 나서는 것도 모자라, 이런 식으로 반격까지 할 줄이야. 이드릴은 이를 갈았다.
철컥.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스카이는 이드릴의 머리통에 총구를 들이밀고 있었다.
“잘 가시게. 귀족 나으리.”
탕!
불꽃과 함께 이드릴의 몸이 줄 끊어진 인형처럼 덜그럭거리며, 뒤로 천천히 쓰러졌다. 총을 겨눈 자세 그대로 서 있던 스카이는, 늘상 하던 버릇대로 총구에서 피어오르던 연기를 후- 불어 낸 뒤 품 안의 홀스터에 꽂았다.
‘뭐 이렇게 시시해?’
스카이 본인도 내심 놀랐을 정도로 허무한 결말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체가 쓰러진 쪽으로 걸어가던 스카이는, 목덜미 근처에 훅 하고 불어오는 바람에 본능적으로 머리를 낮췄다.
슈욱!
고개를 돌린 스카이는 보았다. 지면의 그림자로부터 솟아오른 이드릴이, 그의 머리가 있던 자리로 레이피어를 찔러 넣고 있는 광경. 예상을 뛰어넘는 이드릴의 능력에 스카이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들켰네?”
투덜거린 이드릴이 액체처럼 찰랑거리는 그림자로부터 걸어 나왔다. 스카이가 지면을 흘끗 바라보자, 그가 쓰러뜨렸던 이드릴의 시체는 그림자로 화하여 녹아내렸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자신과 넨시가 보았던 건 그림자였단 소리인가?
“이상한 술수 쓰기는……. 네년은 오늘 여기서 죽인다.”
“주둥이만 털지 말고 해 봐, XX아.”
두 사람 모두 입 험하기로는 어디에서도 지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탕!
총구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을 신호로, 두 사람의 치열한 공방이 펼쳐졌다. 스카이는 잊을 만하면 섬광탄을 쏴 대며 이드릴의 시야와 공격을 방해했고, 이드릴은 벽과 바닥의 그림자를 넘나들며 스카이를 전 방향에서 압박해 왔다.
“흠!”
스카이의 얼굴 위로 길게 남은 생채기로부터 가느다란 핏줄기가 흩날렸다. 다 쓴 총은 홀스터에 끼워 넣고, 장전되어 있는 새 총을 꺼내 다시 쏘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승부는 이드릴 쪽이 더 우세했다. 아티팩트를 이용해 쉴 새 없이 퍼붓는 공격에 반해, 스카이가 사용하는 총탄은 위협적이긴 해도 공격의 딜레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팅-!
스카이가 발사한 산탄을 몸에 두른 그림자로 막아 낸 이드릴이 빠르게 돌진해 왔다. 모든 충격을 흡수할 수는 없었는지, 그림자로 뒤덮여 있던 복부와 허벅지는 엊어 맞은 것처럼 피멍이 들고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겐 눈에 띄는 상처 하나 없었다.
“좀 죽어라, 왕국의 기생충 놈아!”
“거 그만 좀 합시다! 이쪽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능청스레 받아넘긴 스카이는 팔에 낀 수갑을 조작하더니, 재차 이드릴에게로 겨누었다. 또다시 날아올 섬광탄에 대비해 뒤쪽으로 멀리 물러선 이드릴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피융!
발사구에서 튀어나온 자그마한 구슬들이 여럿.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구슬들은 골목의 지면과 벽면에 붙자마자 불꽃을 피워 올렸다.
“아니……?!”
이드릴은 처음으로 크게 당황했다. 불꽃이 잦아들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그 크기를 더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불꽃의 빛을 받은 주변의 그림자도 자연스레 옅어져 갔다.
“네이팜과 살라맨더 더스트를 섞었지. 유기용매라서 한동안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를 거다.”
스카이가 으스댔다. 원래는 다수의 적을 몰살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 물질이었지만, 지금으로선 이드릴의 능력을 봉인해 두는 게 고작이었다.
‘이런…….’
총열을 꺾어 남은 탄을 확인해 보던 스카이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엿보였다. 그새 탄알을 한 발 남기고 다 써 버린 것이다.
수중의 무기를 못 쓰게 된 스카이와 달리, 이드릴은 검술을 단련한 장군이었다. 고작 남은 한 발로 이드릴을 제거할 수 있을까?
“이쪽이다!”
“스, 스카이 걸킨! 거기다 헨리에타 후작님?!”
소동을 쫓아 골목으로 몰려든 병사들에 의해, 스카이는 앞뒤로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그가 화염으로 뒤덮인 길목 너머의 이드릴을 쳐다보자, 그녀는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을 써 놓고도 고작 범죄 집단 리더인 스카이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는 게 마음에 안 든 모양이었다.
‘이런…….’
이대로 잡히게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스카이의 앞에, 신기루처럼 일렁이는 무언가가 돌연 모습을 드러냈다.
펄럭!
남색의 망토를 펄럭이며 갑자기 나타난 젊은 남성. 스카이에게 몰려 있던 모두의 시선을 죄다 빼앗아 갈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심으며 등장한 그는, 쾌활한 목소리로 스카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아, 다행이군! 내가 아주 적시에 온 모양이지? 널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발에 불나도록 뛰어왔으니 감사하라고!”
“누구……?”
스카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어보자, 남성은 고개를 가볍게 까딱이더니 마치 오랫동안 준비해 놓은 듯한 멘트를 빠르게 읊어 댔다.
“베네지아 전역을 누비며 만민백성을 섬기는 의적, 가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