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탈출
(136/203)
136화 탈출
(136/203)
136화 탈출
2022.02.14.
“그러니까 그게 누군데?”
스카이의 퉁명스런 물음에, 나름 멋지구리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가렛은 크게 당황했는지 옆으로 비틀거렸다. 그래도 이름쯤은 알아줄 정도로 오래 활동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착각이었나 보다.
“……아니, 진심으로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어? 그 왜, 의적으로 명망 높은…….”
“됐고, 저리 비켜.”
스카이가 신경질적으로 가렛을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쪽은 불길과 이드릴 헨리에타, 그리고 뒤쪽은 병사들로 길이 막혀 있었다. 중간에 웬 이상한 놈이 끼어들긴 했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스카이가 이드릴을 흘끗 쳐다보자, 그녀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더니 불길이 닿지 않은 어두운 길목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흥.’
스카이는 혀를 찼다. 과연 서방 장군답다고나 할까, 이드릴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불리할 만한 요소를 남겨 두지 않는 사람이었다.
“방금 그 여자가 헨리에타 후작이라고? 캬, 얼굴이 아주 조각처럼 이쁘구먼.”
“꺼져.”
스카이의 말에 가렛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순간, 병사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내지르며 일제히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화염을 뚫고 도망쳤다간 또다시 이드릴과 맞붙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철컥!
스카이가 손목의 장치를 병사들에게 겨누자, 사출구에서 커다란 하얀색 구슬이 발사됐다. 구슬이 폭발하자 잿빛의 끈끈하고 질척한 액체가 튀어나오면서 병사들을 덮쳤고, 공기 중에 노출된 액체는 빠른 속도로 굳어 갔다.
“으헉!”
한데 엉겨 붙어 앞으로 엎어지는 병사의 무리. 그러나 그 뒤에는 아직도 수많은 병사들이 남아 있었다. 스카이는 총과 손목의 장치를 갈무리한 다음, 단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병사들만 없었어도 죽으나 사나 이드릴과 한 판 붙는 쪽을 택해 보겠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별수가 없었다.
“그건 곤란해. 내가 오늘 네 탈출을 담당하기로 했거든.”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스카이는 잠시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설명해라.”
“접선지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도시 분위기가 심상찮게 돌아가길래 하는 수 없이 내가 직접 온 거야. 넨시라고 그랬던가? 정말 네 부하한테서 나에 대해선 아무런 얘기도 못 들었어?”
“조력자가 접선지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름까지 들은 기억은 없다. 어쨌든 거기까지 알고 있는걸 보면 믿을 만하겠지.”
퍽!
병사 하나가 스카이의 발길질에 걷어차여 나가떨어졌다. 근력 강화 마법을 사용한 덕분에 총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병사들 정도는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대충 알아들었으면 이제 슬슬 도망가자고. 계속 머뭇거리다간 우리 모두 끝장이야!”
“아직 내 부하가…….”
“넨시라면 진작 탈출시켜 두었어!”
가렛이 팔에 두른 망토를 뒤로 젖히자, 잿빛 기운이 소용돌이치는 망토의 안감 부분이 드러났다. 망토의 기운을 몸에 두른 두 사람은 아지랑이처럼 흐릿하게 변하더니, 이내 병사들이 보는 눈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
“사, 사라졌다!”
당황한 병사들이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펴보는 사이, 어두운 골목 안에서 사그라지는 불길을 뚫고 걸어 나온 이드릴이 말했다.
“당황하지 말고 범위를 넓혀서 재탐색해라. 아직 그렇게까지 멀리 도망치진 못했을 거야.”
그걸 어떻게 아세요? 하고 묻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지만, 병사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골목길 밖으로 우르르 몰려 나갔다. 그렇게 아무도 남지 않은 어두운 골목에서, 이드릴은 자그맣게 남아 흔들거리는 불씨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
* * *
골목길로부터 100m가량 떨어진 어느 으슥한 폐건물.
“우웨에엑!”
허공에서 홀연히 나타난 가렛과 스카이. 그러나 멀쩡해 보이는 가렛과는 달리, 스카이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지고선 구역질을 해 댔다. 그가 한창 바닥에 부침개를 만들고 있는 사이, 가렛의 도움으로 먼저 자리를 벗어났던 넨시가 달려왔다.
“보스! 괜찮으십니까?”
“이해해. 원래 영차원의 울렁거리는 느낌이 단기간 내에 익숙해지기 힘들긴 하지.”
가렛은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꾸준한 훈련 덕분에 타인을 강제로 아스트랄 도메인에 끌고 들어갈 수 있게 되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어지러움과 구토감을 호소하기 일쑤였다. 지금은 괜찮아 보이는 넨시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젠장…….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스카이가 입가를 훔쳐 내며 으르렁거렸다. 마치 수십 번이 넘도록 뱅뱅 돌다가 갑자기 멈춰 서기라도 한 듯한 감각이다. 넨시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는 스카이에게 가렛이 말했다.
“미안. 속이 안 좋은 건 알겠지만,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해. 우린 고작 그 골목길에서부터 100m밖에 안 떨어졌다고.”
“…….”
가렛은 건물 바깥을 창문으로 살짝 내다보았다. 바깥은 짙은 어둠으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 이 정도면 나가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해할 수가 없군.”
고개를 돌려보자, 스카이는 가렛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넨시가 너에게 이번 건을 대가로 뭘 약속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목숨을 걸어 가면서 우릴 구할 가치가 있나?”
그의 말에 넨시는 무심코 움찔했다. 저 말을 들은 가렛이 두 사람의 구출을 포기해 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러자 가렛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너도 알겠지만 나라가 최근 꽤나 어수선해졌잖아? 왕가에서 감비니 요새 사태의 용의자와 그 세력을 색출한답시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느라, 무고한 사람들까지 갈려 나가고 있다고. 난 그저 그런 꼴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나는 무고한 것과는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인데?”
“그렇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자신의 말에 동의하는 가렛을 쳐다보며, 스카이는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널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기엔, 네가 가진 재능이 너무나도 아깝더라고. 그 직접 만든 장치도 대단하지만, 이드릴의 눈을 피해서 몇십 년간 버든베어에서 버틸 수 있었다는 건 사실 정말 굉장한 거거든.”
가렛은 손을 벌려 가며 말했다.
“그 능력을 더 좋은 곳에 쓸 수만 있다면, 내가 이 정도 위험을 감수하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냐.”
“설마 내가 다른 누군가를 받들어 모실 놈으로 보였다면…….”
스카이가 으르렁거리자 가렛이 손을 내저었다.
“그런 태도는 기대도 안 했어. 뭐, 받아들이기 쉬운 일이 아닌 건 알아. 하지만 나와 함께해서 네가 얻게 될 메리트들을 생각해 봐.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자원과 뜻이 맞는 동료들도 한꺼번에 다시 네 수중으로 들어가는 거라고.”
“나와 뜻이 맞다고? 네가?”
스카이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가렛은 입술을 삐죽이며 대꾸했다.
“뭐…… 적어도 여길 사람 살 만한 장소로 만들어 보자는 생각만큼은 일치하잖아. 안 그래?”
“…….”
스카이는 말없이 창가로 걸어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도시 바깥으로 나가려면 최소한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순간, 스카이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둠 속 그림자가 꿈틀대며 일어나더니, 이드릴 헨리에타의 형상이 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막 자리에서 나타난 그녀는 창문 너머에서 자신을 지켜보던 스카이랑 정확히 눈을 맞추기까지 했다.
“뭐……?”
“젠장, 왜 이렇게 빨리 들킨 건데?!”
가렛이 당황한 스카이의 멱살을 붙잡아 당기자마자, 지면으로부터 솟아오른 그림자가 창문을 깨뜨리고 들어왔다. 유리 조각이 튀면서 스카이의 뺨을 스치려는 찰나, 가렛은 넨시와 그를 데리고 두 번째 ‘도약’을 했다.
슈화아악!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조금 떨어진 위치로 안착한 세 사람. 가렛을 제외한 나머지 둘은 어김없이 토악질을 해 댔다.
스카이는 얼마나 토했는지 위액밖에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노력과 고통이 무색하게, 불 꺼진 건물들 사이로 익숙한 부츠 굽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도망쳐도 소용없다, 쥐새끼들아.”
이드릴이 말했다.
“상당히 독특한 기술을 쓰는 것 같지만, 그래 봤자 내 아티팩트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어.”
녹터널의 힘을 최고 한도로 사용할 경우, 지면에 깔린 모든 그림자가 그녀의 감각 기관이 된다. 물론 그만한 힘을 사용했을 때 몸에 걸리는 과부하도 막대했지만, 그림자가 가장 짙어지는 밤 시간대라 그런지 그나마 버틸 만했다.
“윽…….”
이드릴은 흔들거리는 시야를 다잡으며 눈앞의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상대는 이드릴의 추격이 계속될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는지, 무리하게 연속 도약을 감행한 상황. 이드릴과 제대로 맞붙어 싸울 수 있는 자는 가렛 한 명뿐이었다.
“그냥 보내 주면 안 될까? 난 필요할 때 아니면 누구한테 칼을 들이밀지 않는 성격이라서…….”
“지랄. 그렇게 말하면 자신이 선인이라도 된 것 같나? 네놈도 그냥 자기 입맛에 맞춰서 사람을 죽이는 범죄자에 지나지 않아. 그쪽의 스카이 걸킨과 함께 모조리 죽여 주마.”
“으음…….”
가렛은 고민에 빠졌다. 적에게 쫓길 것을 알면서도 동반 도약을 시도할 수는 없는 노릇. 불필요한 도약을 남발했다간 스카이와 넨시의 몸에 심각한 이상이 생길 우려도 있었다.
일시적으로든, 뭐든지 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드릴을 무력화시켜야만 했다.
‘어쩔 수 없지.’
가렛이 몸을 바싹 낮추자, 타른카페의 별자리 무늬로부터 푸른 빛이 흘러나왔다. 척 보기에도 범상찮은 기운에 긴장한 이드릴이 방어 자세를 취하자, 가렛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또 그 능력인가?’
그림자를 통해 향상된 감각으로도 포착 불가능. 이드릴이 두 눈을 이리저리 굴려 가며 주위를 살펴보는 사이, 아스트랄 차원으로 도약한 가렛은 빠른 속도로 그녀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흐아아앗!”
뒤쪽에서 나타난 가렛이 단검을 찔러 넣으려 했으나, 그의 팔이 움직이는 것보다도 더 빠르게 사방에서 그림자가 치솟아 올랐다. 결국 가렛은 단검마저 놓치고 뒤로 빠져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공격은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속도를 더해 갔다. 겨드랑이, 발끝, 목덜미 등등. 사방에서 날아오는 단검에 일일이 대응할 수 없었던 이드릴은, 급기야 그림자로 자신의 몸을 둥글게 말아서 방어했다. 잽싸게 치고 빠지는 가렛에게 반격까지 날린다는 건 불가능했다.
“이놈이!”
열이 잔뜩 받은 이드릴이 소리쳤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스카이와 그의 부하를 먼저 처리하고 싶었지만, 가렛의 공격 하나하나가 허를 찌르는 궤도에서 날아왔던지라 조금이라도 방어를 가볍게 할 수 없었다.
‘좋아, 이 정도면……!’
가렛은 품 안에서 연막탄을 꺼내 이드릴의 안면으로 집어 던졌다. 평소의 이드릴이라면 우습게 피해 보였겠지만, 공격을 방어하는 데에 급급했던 그녀는 무엇이 날아오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퍼엉!
“크윽!”
눈알에 후추라도 끼얹은 것 같은 강렬한 고통이 확 일어났다. 이드릴은 이어질 공격에 대비해 몸을 움츠리며 그림자를 몸에 단단히 둘렀다.
그러나 1분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이드릴은 눈을 뜨지 않고도 자신이 가렛과 스카이를 모두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둘러 그림자로 감각의 범위를 넓혀 보았지만, 연속 도약이라도 했는지 세 사람의 기척은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었다.
“으아아!”
이드릴은 땅속 깊숙이 녹터널을 박아 넣으며 분노로 울부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