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오리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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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화 오리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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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화 오리무중
2022.02.15.
“고맙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스테치는 연신 감사의 말을 해 대며 무릎을 꿇은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 살짝 당황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 응해 주었다.
케일럼 전역에 생긴 던전들을 제거하기 위해 이그젤타를 나선 지도 벌써 몇 주가 지났다. 보통 던전 하나를 없애기 위해선 철저한 계획을 짜고 긴 시간에 걸쳐 탐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스테치 일행은 탐험 난도와 관계없이 던전이란 던전은 마주치는 족족 무너뜨려 나갔다. 거기에 말까지 탄 덕분에 이그젤타에서 출발한 셸로어들 중에서도 남하하는 속도는 단연 으뜸이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군.』
그날 밤.
구원받은 마을 사람들이 던전의 위협으로부터 해방된 기념으로 축배를 드느라 바쁜 사이, 스테치는 조용한 마을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지도를 살펴보고 있었다. 이그젤타 원로원의 의장, 시무스가 맡긴 일도 슬슬 끝을 보이고 있었다.
“《미테레 넌티어스》!”
고개를 돌려 보니, 막 마법으로 편지를 쏴 날려 보내는 엘레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엘프들이 쓰는 이 독특한 마법의 도움으로, 셸로어들과 스테치 일행은 유동적으로 타 지역의 상황을 판단하고 일정을 조율할 수 있었다.
“이제 여기 일도 거의 마무리되어 가네요.”
“응.”
엘레나가 옆에 앉으며 중얼거리자, 스테치는 대답했다.
시무스의 의뢰를 받게 되면서 얻게 된 가장 큰 수익은, 금전이 아닌 던전의 아티팩트들이었다.
스테치가 정신을 집중하자, 머릿속으로 하나의 정보가 떠올랐다.
《현재 흡수한 아티팩트의 개수 : 7》
《현재 저장된 마력량 : 125089》
《잠금된 어빌리티의 목록 :
1 . 어빌리티 “아바타”
- 아티팩트 9, 마력 90000
2 . 어빌리티 “???????”
- 아티팩트 ??, 마력 ??????
3 . 어빌리티 “????”
- 아티팩트 ??, 마력 ???????》
메멘토 모템의 다음 어빌리티인 아바타를 해방하기까지도 이제 아주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그동안 다른 일에 휘말리느라 바빴던 것을 만회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아티팩트들이 수중에 들어와 주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두 능력은 뭐지?’
어빌리티들을 차례로 해금해 나가면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아 있는 마지막 두 어빌리티만큼은 해금 조건도, 심지어는 그 이름조차도 여전히 알 수 없는 상황. 잠시 고민하던 스테치는 곧, 이래 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지도에 집중했다.
지도에 X자로 표시된 던전들의 위치에는 임무 완료를 뜻하는 동그란 원이 덧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남은 마지막 한 곳, 이덴.
케일럼의 영토가 그려진 지도상에서도 가장 아래쪽에 그려진 X 표시, 바로 최남단에 위치한 마을들 중 하나였다.
“……최대한 빨리 출발하자. 가능하면 오늘 새벽이라도.”
어딘지 모르게 조바심이 느껴지는 말투. 그러나 엘레나는 그런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그젤타의 원로원은 문제가 발생했음을 인식하자마자, 즉각 사태 파악을 위해 케일럼 각지의 마을로 확인 메시지를 날려 보냈다. 그러나 메시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몇몇 마을들의 회신 속도가 늦어지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게다가 아무리 빨리 움직여 봤자, 스테치 일행이 하루에 움직일 수 있는 거리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탓에 셸로어들이나 스테치 일행이 도착하기도 전에 파괴된 마을도 적지 않았다.
‘내 걱정이 그냥 과한 거였으면 좋겠는데.’
이덴은 이그젤타의 메시지에 마지막까지 응답하지 않은 소수의 마을들 중 하나였다. 이그젤타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마을이니, 진작에 무슨 일이 생겼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스테치는 한숨을 내쉬더니, 걱정스레 바라보는 엘레나의 시선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때마침 어깨에 식량 자루를 얹은 마르크가 두 사람에게로 걸어오며 물었다.
“출발인가?”
마르크와 눈이 마주친 엘레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엘레나가 엘프 고유의 마법을 사용하여 각지의 셸로어들과 연락을 취하는 것을 본 그는, 그녀가 엘프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엘레나는 구태여 그 점을 입에 담지 않았고, 때문에 마르크도 딱히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 먹을 건 챙겼어?”
“당분간은 문제없다.”
스테치는 혹여 마을 사람들이 찾을 것을 고려해, 자신들이 떠났음을 알리는 편지를 마을 게시판에 미리 붙여 두었다. 이제 보급도 끝났으니 더 이상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 가자.”
늦은 밤이었지만, 결국 그들은 약간의 휴식만 취하고 곧장 마을을 떠났다.
다행히 출발지에서부터 이덴 마을까지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하지만 마을 주변은 숲과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말이나 마차를 몰고 들어가기 위해선 복잡한 길을 따라 이리저리 꺾어 들어가야만 했다.
“그래도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며칠 뒤.
말을 몰며 작은 언덕길을 오르던 스테치가 연신 지도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자는 시간도 쪼개 가며 빠르게 이동한 덕분에, 그들은 벌써 마을까지 작은 언덕 하나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어?”
『음?』
그 순간, 엘레나와 메멘토 모템이 동시에 무언가를 감지했다.
그러나 그들이 채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일행보다 먼저 앞서 나가 마을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위치까지 도달한 스테치는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이게…….”
고생해서 도착한 이덴은,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광경을 하고 있었다.
민가와 사람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마을의 터로 보이는 장소 한가운데에는 커다랗고 시커먼 구덩이 하나만 남아 있었다. 근처의 나무와 잡초 등의 식물들은 독기에 찌들어 노랗게 말라 비틀어져 가는 중이었다.
뒤늦게 스테치를 따라온 엘레나도 할 말을 잃었는지 입을 떡 벌렸다. 마을 근처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사기 때문에 혹시나 하긴 했지만…….
“크…….”
이덴 마을에서 아무런 회답을 하지 못한 게 당연했다. 설마 던전이 마을 한가운데에 생성되었을 줄이야……. 이제껏 봐 왔던 모든 마을을 통틀어 가장 최악의 상황이었다. 눈이 뒤집힌 스테치는 고삐를 꽉 움켜쥔 채 가파른 내리막길을 달려갔다.
“자, 잠깐만요!”
엘레나가 당황하여 외쳤지만, 스테치는 이미 멀리 가 버리고 없었다.
“……던전은 아텔리어에게 맡기고 우리는 주변을 탐색해 보도록 하지. 생존자가 근처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생존자를 찾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엘레나는 그런 의구심을 품은 채 천천히 말을 몰았다.
한편, 말에서 내린 뒤 던전 입구인 구덩이 안으로 뛰어 들어간 스테치는 보이는 몬스터들을 죄다 쓸어 버리기 시작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그의 공격 앞에서 온전히 서 있을 수 있는 몬스터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서지》!”
손아귀에서 뿜어져 나온 전기가, 통로를 가득 메운 몬스터 무리의 머리 위를 파도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스테치에게 몰려들던 몬스터 떼는 눈 깜짝할 사이에 탄내만 풀풀 풍기는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화풀이는 끝났냐?』
메멘토 모템이 툭 던진 한마디에, 스테치는 막 휘두르려던 검을 멈춰 세웠다.
지난 몇 주간 케일럼의 마을들을 돌아보면서, 그는 아치발의 신자들이 저지른 행동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로 돌아오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것은 세계수를 오르던 때보다도 훨씬 더 생생한 경험.
그렇게 쌓이고 쌓이던 감정이 쑥대밭이 된 이덴 마을을 본 순간, 일제히 터져 나온 것이었다.
“……그래.”
스테치는 막 달려드는 고블린 하나를 베어 넘기며 심호흡을 했다.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일어난 일을 없었던 것으로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 그렇다면 최소한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
그것이 스테치의 생각이었다.
『좋아. 좀 진정된 거 같으니까 한 가지 말해 주고 싶은 게 있다.』
“뭔데?”
『이 던전의 내부에서 독특한 기운이 느껴져. 망령화 된 아치발의 신자가 뿜어내는 것과 똑같아. 하지만…….』
스테치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비록 시무스가 아치발의 신자들과 다시 마주칠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긴 했지만, 그 기회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흥분하지 말고 들어. 내 생각에 놈은…… 이미 이곳에 없어. 여기에 남아 있는 건 잔재일 뿐이고, 아치발의 신자는 이미 여길 떠난 것 같아.』
“떠났다고?”
스테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아치발의 신자들이 광신도적인 면모가 있긴 해도, 목적 없이 움직일 놈들은 절대 아니다. 정말 어디론가 떠났다면 이유가 있을 터. 그러자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지금은 던전에만 집중해. 뒷이야기는 나중에 이어서 하고.』
그의 말을 들은 스테치는 검극을 앞으로 겨눴다. 어두운 통로 깊숙한 곳에서부터, 떼거지로 몰려오는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잠시 후.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엘레나와 마르크조차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진동이 수차례 발생했다. 이윽고 구덩이는 폭삭 무너져 내리면서 던전 안으로 진입하는 입구를 완전히 차단해 버리고 말았다.
화악-!
빛무리를 몸에 두르고 허공에서 나타난 스테치. 그러나 그는 어딘지 모르게 잔뜩 화가 나 있었다.
“X발!”
“왜 그러세요?”
한참을 씩씩대던 스테치는, 엘레나에게 자신이 메멘토 모템을 통해 알아낸 사실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스테치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마르크와 함께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뭐? 왜?”
스테치의 물음에 마르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을 거주민들의 것으로 보이는 흔적을 발견했다. 그런데…….”
마르크의 턱짓을 본 스테치의 시선이 돌아갔다.
“《애니멀 인스팅트》.”
시각이 활성화되면서, 그 전엔 보이지 않았던 지면의 미세한 자국들이 하나둘 눈에 띄었다.
성인 남성과 여성들로 추정되는 발자국들이 다수. 스테치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흔적을 따라 걸어갔고, 엘레나와 마르크도 그를 따라갔다.
“어라?”
어느새 《애니멀 인스팅트》로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해진 흔적. 문득 정신을 차린 스테치가 주위를 둘러봤을 때에는, 이미 마을에서 한참 벗어난 뒤였다. 여기가 어디지? 주변에 서 있는 나무들이 파릇파릇한 것을 보니 마을과 제법 떨어진 듯했다.
“여긴 이덴 마을의 남쪽 숲이에요.”
잠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스테치는 엘레나의 말에 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몬스터들을 피해 사람들이 도망친 건가? 그러나 그런 그의 추측을 일축하듯,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아치발의 신자다. 그 자식이 마을 사람들을 끌고 가 버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