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미지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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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미지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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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미지의 땅
2022.02.17.
이덴 마을 주민들을 끌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 아치발의 신자. 그의 뒤를 쫓아 라켄 공국까지 머나먼 길을 떠나온 스테치 일행은, 곧 생각지도 않았던 상황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정말 이 방향이 확실해?’
스테치의 질문에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그래.』
라켄 공국에서 한바탕 기나긴 숨바꼭질을 벌이게 될 거란 기대와는 달리, 아치발의 신자가 남긴 흔적은 공국의 영토를 그대로 가로질러 남쪽 끝으로 이어져 있었다.
처음엔 메멘토 모템의 실수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했다. 그러나 반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말을 물리지 않았다. 오직 남쪽으로, 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스테치를 포함한 세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평원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쪽으로 계속 가면…….”
지도를 보던 엘레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가려는 길 앞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지 않았다.
휘오오오—!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바람이 맞부딪치자, 기이한 궤도로 꺾여 나가며 공기를 찢는 듯한 소리를 발생시켰다.
텅 빈 공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강대한 마력이 예리한 칼날처럼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었다. 눈으로는 볼 수 없어도, 본능이 더 이상의 접근을 용인하지 못하게 만든다.
스테치는 이를 악물었다.
“……카델트 대사막이잖아.”
카델트 대사막.
마력 폭풍과 사막의 열풍이 휘몰아치는 미지의 땅.
일반인은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거친 마력의 기류에 몸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데다, 셀 수조차 없는 몬스터들로 들끓는 곳. 그야말로 지상에 펼쳐진 생지옥이라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스테치의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은 단 두 가지였다. 왜? 그리고 어떻게?
상기한 이유들 때문에, 카델트 대사막의 영역 내부는 오랜 세월 동안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굳이 사막으로 향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이상했다.
게다가 사막이 머금은 초고농도의 마력은 영체의 몸을 가진 아치발의 신자에게도 위험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 그런 장소를 대체 어떻게 횡단한단 말인가.
“젠장, 죄다 모르는 일투성이야! 이 개 같은 새끼들하고 엮인 이후부터 하나라도 제대로 돌아가는 꼴을 못 보겠어!”
스테치는 바닥에 쌓인 눈을 거칠게 걷어차며 욕설을 주워섬겼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상하지 않은 게 없었다.
“어떻게 하죠?”
스테치가 진정되기를 기다린 엘레나는, 잠시 후 그에게 조용히 의견을 구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스테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세계수를 오염시킨다는, 스케일 큰 짓거리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놈들이 바로 아치발의 신자들이다. 그 잔존 세력이 분명한 목적성을 띠고 카델트 대사막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는 점은, 이상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했다.
게다가 확실친 않았지만, 아치발의 신자는 어떤 식으로든 메멘토 모템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대적자니 뭐니 하면서 적대하는 것을 보아하니, 이대로 놔두었다간 언젠가 손을 쓰기 힘들 정도로 강대한 적이 되어 다시 나타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텔리어.”
마르크가 입을 열자, 스테치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
스테치는 신경질적으로 턱을 쓸어내리며 대사막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북부 대륙의 냉기 탓에 찬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열기로 뜨거워지겠지.
“설령 우리가 저 안으로 쫓아간다고 해도, 마력 폭풍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은 없어. 그러니까…….”
『사실, 꼭 그렇지도 않아.』
메멘토 모템의 반박에 스테치는 입을 콱 다물어 버렸다. 반지의 말을 들을 수 없는 엘레나와 마르크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광신도 놈의 이동 경로를 계속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올곧은 직선을 그리고 있더군. 그런데 이상한 게 뭔지 알아?』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이 지점에서부터, 녀석의 움직임이 바뀌었어.』
‘뭐? 어떻게?’
『바로 그게 문제야. 움직임이 급격하게 바뀌었다는 건 알겠는데, 몇 미터 앞에서부터 흔적이 지워져 있어. 마력이 너무 심해진 탓이겠지.』
스테치는 다시 눈앞에 펼쳐진 평지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중요한 건 아치발의 신자가 무언가를 했고, 그걸 통해 카델트 대사막 내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는 것.
‘마법이나 무슨 도구를 써서 들어가진 않았을거야. 이렇게 엄청난 자연 현상은 고작 개인이 어떻게 해 볼 수준이 아니니까.’
메멘토 모템은 스테치의 추측에 대해 동의했다.
‘그렇다면…….’
그는 메멘토 모템이 준 단서를 토대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인간인 그의 눈으로는 마력의 흐름이라든가 하는 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애니멀 인스팅트》.’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려 본다. 아무런 힘도 없는 이덴 마을 사람들조차 함께 데리고 갈 정도라면, 이쪽도 가능한 일 아닐까? 그렇게 고민하며 지면을 뚫어져라 살펴보던 스테치는, 문득 기시감을 느끼고선 두 눈을 껌뻑였다.
“어라…….”
내가 잘못 봤나? 처음부터 이상하다는 생각을 품은 채 둘러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주 희미한 단서. 메멘토 모템이 물었다.
『왜 그래?』
스테치는 말없이 사막의 어느 한 지점을 응시하더니, 이윽고 엘레나에게 물었다.
“저기, 눈앞에 뭐가 보여?”
“예? 글쎄요, 아무것도…….”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뭐가’ 보이냐고.”
재차 반복되는 그의 말을 들은 엘레나는, 그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선 두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평소엔 보이지 않았던, 카델트 대사막이 머금은 거대한 마력의 기류가 눈에 들어왔다.
본격적인 대사막의 영역까진 아직도 상당한 거리를 남겨 두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앞에 소용돌이치는 마력은 너무나도 위협적이었다. 50m 정도만 더 나아가도 상당히 위험해질 것이다.
“이건 거의 폭풍에 가까운 수준이에요. 저런 곳에 함부로 들어가면-.”
“…….”
스테치는 엘레나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앞으로 움직였다.
카델트 대사막의 위험성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 마르크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구태여 스테치를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르크는 스테치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구경하고 싶은 눈치였다.
『야, 너 미쳤어?』
“안 돼요! 함부로……!”
메멘토 모템도, 엘레나도 모두 다급히 그를 멈춰 세우려 했지만, 스테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어느 누구의 목소리가 아닌, 오롯이 자신의 눈에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아가서 왼쪽으로 꺾고.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조심스레 이동하는 스테치. 그는 어느덧 70m를 훌쩍 넘겨 카델트 대사막의 내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직접 보고 있던 엘레나나 마르크, 심지어 메멘토 모템조차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
『어, 어떻게?』
거친 마력풍의 영향권 안에서, 생채기 하나 나지 않고 멀쩡히 서 있는 스테치의 모습에 메멘토 모템은 기겁했다. 스테치는 피식 웃더니 뒤쪽에 있는 엘레나에게 외쳤다.
“겁먹지 말고, 내가 왔던 길을 그대로 따라와 봐! 괜찮으니까!”
“예?!”
“날 믿어!”
맨정신으로는 절대로 못 할 미친 짓이다.
스테치의 말을 듣고도 한참을 머뭇거리던 엘레나는, 천천히 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야말로 가시밭길 사이를 맨발로 딛고 가는 듯한 아슬아슬함과 공포. 그러나 엘레나는 스테치의 외침을 지침 삼아 최대한 침착하게 이동했다.
‘강단이 대단하군.’
마르크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상대에 대한 신뢰가 굳건하더라도, 이건 불구덩이에 몸을 던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짓이다. 그런데도 엘레나는 해냈다.
한참이 지나서야 간신히 스테치가 내민 손을 마주 잡은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했어.”
“다시는…… 이런 일 시키지 마세요…….”
“미안미안. 그런데, 이전이랑 달리 느껴지는 거 없어?”
엘레나는 스테치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
잠시 후, 엘레나는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탄성을 내뱉었다.
마외부에서 봤을 때는 불규칙적이던 마력의 흐름이, 내부에서 보면 잘 짜여진 기계 장치처럼 항상 일정한 패턴으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외부에서의 관측으로 그 사실을 파악하는건 불가능. 게다가 조금이라도 엉뚱한 방식으로 이동했다간 꼼짝없이 폭풍에 휘말렸을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하다니…….”
올바른 방법만 알고 있다면 누구라도 지금처럼 마력 폭풍 속에서도 안전할 수 있다. 하지만 목숨을 담보로 그런 것을 시도해 볼 미친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어떻게 한 거야?』
메멘토 모템이 물었다. 아티팩트로서 그의 감각은 인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모든 것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그조차도 찾지 못한 돌파구를, 스테치는 어떻게 알아냈단 말인가.
‘지면이야.’
『지면?』
스테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메멘토 모템. 스테치는 그런 반지에게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마력 폭풍이고 나발이고, 중요한 건 아치발의 신자가 어딜 밟고 지나갔느냐야.’
스테치는 줄곧 의문을 품고 있었다. 사람은 카델트 대사막의 마력 기류를 견뎌 내지 못하는데, 어째서 몬스터들은 멀쩡하게 사막 안쪽에서부터 기어 나오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길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스테치는 지면을 보게 되었다. 카델트 대사막이 형성된 시간은 못해도 족히 수백 년 전. 단단한 물체는 진작에 마력에 의한 풍화작용으로 가루가 됐을 터.
그러나 스테치는 마력 기류의 폭풍 속에서조차 단단하게 굳은 지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애니멀 인스팅트》의 감각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나쳤을 아주 희미한 단서.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궈 낸 대성공이었다.
‘너랑 엘레나는 마력에 민감하니까, 그거 이외에 다른 걸 신경 쓰기가 어려웠겠지. 너무 잘 봐서 오히려 문제였던 거야.’
『…….』
인간의 힘으로 자신조차 눈치채지 못한 사실을 파악하다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메멘토 모템은 그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탐험가로서 길러 두었던 눈썰미가 여기서 빛을 발할 줄이야.
스테치는 엘레나에게 말했다.
“돌아가서 준비를 철저히 하고 오자. 사막은 아주 넓으니까, 마지막으로 보급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