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추락
(141/203)
141화 추락
(141/203)
141화 추락
2022.02.19.
“왕자님.”
마르크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스테치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물론 마르크 본인도 예상치 못한 랍토레스의 등장에 동요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감정적으로 쉽게 흔들리지 않는 마르크조차 잠깐이나마 할 말을 잃었을 정도였으니까.
마르크가 고개를 까딱이며 아는 체하자, 랍토레스의 양옆에 서 있던 두 사람도 후드를 벗고 맨 얼굴을 드러냈다. 후드 밑에 숨겨져 있던 젊은 남녀의 얼굴은 각각 반가움과 당혹감이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텔라, 테일러. 오래간만이군.”
“지, 진짜 맥도웰 장군님이십니까?”
“어째서 이런 곳에…….”
마르크가 동방장군으로서 북방 경계선의 동쪽을 담당하던 시절, 자신이 부재중일 경우를 대비해 직접 육성시킨 랍토레스 왕자의 ‘방패’들. 스텔라와 테일러는 그중에서도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들이었다.
랍토레스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이제 그의 역할은 두 사람이 대신하는 모양이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카델트 대사막은 수백 년이 넘도록 외부에서의 진입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베네지아의 첫째 왕자가 대체 어떻게, 그리고 왜 이곳에 와 있는가. 그러던 와중에, 한 가지 가능성의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미래시입니까?”
“그래.”
랍토레스의 대답에 마르크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테이레시아스가 이 장소를 보여 주었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무언가 큰일이 터질 예정이라는 것과, 이곳이 그만큼 중요한 장소라는 것.
첫째 왕자가 몸소 이곳까지 온 이유에 대해서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바로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이 장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파악하고, 베네지아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서.
아니, 정확히는 자신에게 이득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인가.
“여기까진 어떻게 오셨습니까?”
마르크의 질문에 랍토레스는 씨익 웃더니 말했다.
“아버지 덕분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놀랍게도 카델트 대사막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 알고 계시더군.”
“폐하께서요?”
베네지아의 왕이 카델트 대사막으로 진입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믿기 힘든 그의 대답에 마르크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왕자의 말이 진짜라면, 왕은 어째서인지 지금까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숨겼다는 뜻이 아닌가.
우드득.
한편,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스테치는 천천히 주먹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왕자의 신분을 가졌으면서, 마르크 맥도웰과 허물없이 친근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밖에 없었다. 동방장군을 오른팔로 두고 있는 베네지아의 첫째 왕자, 랍토레스 메서.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그가 제라드의 형제라는 것 하나뿐.
“이쯤 해 두지. 우리도 그쪽만큼이나 궁금한 거 투성인 참인데. 어디…… 거기 자네.”
랍토레스는 스테치를 가리켰다.
“자네는 누구지? 그리고 조금 전의 그, 아치발의 신자라는 건 또 뭔가?”
“그건…….”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고 있던 스테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속 편하게 싱글거리고 있는 랍토레스와 눈을 마주친 그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가 알 바 아니잖아?”
스테치가 달려드는 것과, 랍토레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퍼어엉!
지면의 모래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먼지구름 안에서 마르크와 엘레나, 그리고 스텔라와 테일러가 튀어나왔다. 네 사람 모두 한 템포 느리게 반응하느라,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뭐야?!”
스텔라와 테일러가 당황스러워하는 사이, 엘레나와 마르크는 각자의 무장을 들어 올렸다.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마르크는 혀를 찼다. 스테치의 입장에서 랍토레스는 추후의 계획에 지장이 될 수 있는 존재. 후환을 남기고 싶어 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스텔라와 테일러는 전투태세에 들어간 마르크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듯했으나, 빠르게 감정을 추스르고선 무기를 뽑아 들었다.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라는 그의 가르침을 훌륭하게 실천하는 제자들을 보며, 마르크는 살짝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슈오오-.
먼지구름이 잦아들면서 나타난 것은, 검을 찔러 넣은 자세 그대로 멈춰 선 스테치. 그러나 정작 랍토레스는 온데간데없었고, 할로우 블레이드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스테치는 하늘로 눈길을 돌렸다.
“후와아…….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희미하게 들려오는 안도의 목소리와 함께,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랍토레스의 모습이 스테치의 눈에 들어왔다. 랍토레스는 잔뜩 흥분했는지 정신 나간 사람처럼 킬킬거리며 스테치와 그의 일행들을 내려다보았다.
엘레나는 랍토레스를 보며 입을 벌렸다.
“세상에…….”
공중 부유는 보이는 것 이상으로 고도의 마법 능력을 요구하는 스킬. 공중에서 균형을 잡고, 이동하고, 머무르게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충분한 스피드와 고도가 더해지면 시전 난이도는 당연히 더 높아진다.
저런 짓이 가능한 이유는 아마도…….
『공중 이동 능력을 부여하는 아티팩트인가? 까다롭구먼.』
메멘토 모템의 투덜거림을 흘려 넘기며, 스테치는 말없이 랍토레스를 노려보았다.
공중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는, 직관적이면서도 강력한 능력. 분명 메멘토 모템의 말대로 까다로운 적임에는 틀림없었지만, 신경 쓰이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방금 전에 그건 뭐였지?’
랍토레스를 죽이려고 마음먹은 그때, 스테치의 몸에는 싱크로와 《라이트닝 스피드》로 인한 가속이 걸려 있었다. 일반인의 눈과 몸으로 그의 움직임을 보고 피하는 건 불가능.
그러나 할로우 블레이드가 랍토레스의 몸을 그대로 꿰뚫으려는 찰나,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과 같았다.
‘단순히 날아서 피한 게 아냐. 내가 착각했나? 그게 아니라면 역시…….’
『능력은 알 수 없지만, 녀석도 아티팩트를 최소한 두 개 이상 지니고 있어. 네 공격이 빗나간 건 아마도 그것 때문일 거야.』
확인해 보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 스테치는 화염구를 생성한 뒤 냅다 랍토레스가 있는 쪽으로 날려 보냈다. 그러나 막 그의 손을 떠난 화염구는 별안간 나타난 푸른 빛의 구멍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퍼어엉!
“으헉?!”
갑자기 뒤에서 날아온 《파이어볼》에 두들겨 맞은 스테치가 비명을 질렀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다행히도 눈치 빠른 메멘토 모템이 그보다 한발 앞서 갑옷을 전개해 준 덕분에, 상처나 아픔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스테치가 뒤를 살피자, 《파이어볼》을 흡수했던 것과 같은 푸른 구멍이 막 사라지고 있었다.
『단거리 이동 포털…… 인데 그걸 저런 식으로도 쓰는 건가? 보기보다 장난이 아닌데? 지금까지 본 아티팩트들과는 질이 너무 달라.』
“왕자님께 손을 대게 놔두진 않는다!”
스텔라가 손을 뻗자, 그녀의 앞에 방금 전에 본 것과 똑같은 포털이 만들어졌다. 방금은 랍토레스가 아니라 그 부하의 아티팩트였나? 허를 찔린 스테치가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에, 이번엔 테일러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허리춤에 걸려 있던 세 개의 작은 고리가 공중으로 붕 떠오르더니 구멍에서 광선을 발사했다. 스텔라의 포털로 날아든 광선은, 《파이어볼》 때와 마찬가지로 스테치의 사각에서 나타난 포털을 통해 뿜어져 나왔다.
빠지직!
“이 새끼들이!”
커스드 아머 덕분에 아플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이래서야 랍토레스를 공격할 수단은 전무에 가까웠다. 으르렁거리는 스테치의 옆으로, 활을 꺼내 든 엘레나가 다가오더니 말했다
“저희가 맡을 테니까, 아텔리어 씨는 이 틈에 왕자를 처리하세요.”
마르크가 스테치의 뒤에서 날아온 광선을 타이밍 좋게 방패로 막아 내는 한편, 엘레나는 화살을 쏴 스텔라와 테일러를 견제했다. 덕분에 스테치는 상대의 끈덕진 방해를 뿌리칠 수 있었다.
“왕자님을 배신하신 겁니까, 맥도웰 장군!”
분노로 가득한 테일러의 물음에 마르크가 답했다.
“미안하지만 난 더 이상 베네지아의 귀족은커녕, 장군도 아니다. 배신이고 말고를 따질 이유가 없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릴!”
마르크는 한층 더 격하게 쏟아지는 광선 세례를 방패로 막아 냈다. 그러나 미처 막아 내지 못한 광선 하나가 그의 팔뚝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기다란 흉터를 남겼다.
스텔라와 테일러의 아티팩트는 그가 북부로 떠난 이후에 주어진 물건들. 아무리 마르크라고 해도 이제 막 기능 파악이 끝난 아티팩트를 상대로 완벽하게 대응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지금이다!’
스테치와의 일전으로 오른쪽 눈을 잃은 마르크에게 사각이 있음을 눈치챈 스텔라. 마르크의 우측으로 포털을 생성하자, 테일러의 아티팩트에서 발사된 광선이 튀어나왔다.
촤아악!
테일러의 공격은 갑자기 끼어든 엘레나에 의해 저지되었다. 방패의 모습으로 변한 레코르다치오로 광선을 막아 낸 그녀는, 마르크에게 소리쳤다.
“죽고 싶지 않으면 정신 똑바로 차려요!”
두 사람이 서로를 등지고선 철벽같은 방어로 왕자의 부하들의 주의를 끄는 사이, 스테치는 검을 뽑아 든 채 하늘에 떠 있는 랍토레스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는 아래쪽의 싸움판이 재미있게 보였는지,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눈으로 사태를 관망하는 중이었다. 느긋하다 못해 방만스럽기까지 한 그의 태도에 스테치는 속에서 열이 치밀었다.
“언제까지 그럴 수 있는지 한번 보자! 커스 디바우러!”
아슬아슬하지만 닿지 못할 높이는 아니다. 사기를 흡수하여 신체 능력을 한껏 끌어올린 스테치는, 온 힘을 다해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파아앙!
모래를 사방으로 튀기며 대포처럼 날아간 스테치. 랍토레스는 스테치가 눈 깜짝할 사이에 상당한 높이까지 도달하자마자, 커스드 아머의 효과를 받고선 공중에서 비틀거렸다. 지금이 절호의 찬스다!
“하아아앗!”
후우웅!
뒤로 당겼던 할로우 블레이드를 그대로 휘두르는 스테치. 그러나 그의 검이 랍토레스에게 닿기 직전, 또 한 번 이변이 일어났다.
“끄으……. 내가 고작 나는 능력 하나만 믿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았나?”
『?!』
랍토레스가 힘겹게 미소 지으며 스테치를 쳐다보았다. 분명히 전력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데, 그의 팔은 물속을 허우적대는 마냥 느렸다.
아니, 비단 팔뿐만이 아니었다. 진작 중력에 의해 다시 땅으로 떨어졌어야 할 그의 몸도, 아주 천천히 낙하 중이었다.
“이익!”
“왜 날 공격하는지, 그리고 그쪽이 누구인지도 모르겠지만…….”
툭!
그는 스테치의 머리 한가운데에 발끝을 얹고선 슥 밀어냈다. 랍토레스와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다시 원래의 속도로 되돌아온 스테치는 곧장 지상으로 추락했다.
왕자는 그런 스테치를 응시하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다시 내려가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