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네놈에게 가르쳐 줄 이름은 없다
(142/203)
142화 네놈에게 가르쳐 줄 이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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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화 네놈에게 가르쳐 줄 이름은 없다
2022.02.20.
쿵!
랍토레스에 의해 떠밀린 스테치는 또 하나의 작은 크레이터를 만들며 지면에 착지했다. 이를 갈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시시덕대던 이전과는 다르게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는 랍토레스의 모습이 보였다.
『방금 저놈이…….』
“X발.”
두 번씩이나 알 수 없는 능력을 몸소 체험한 스테치는, 랍토레스가 가진 두 번째 아티팩트가 가진 힘이 무엇인지를 단박에 파악했다.
‘시간 둔화 능력이다. 아마도 자신으로부터 일정 거리 안의 모든 시간을 천천히 흘러가도록 만드는 거겠지.’
단순히 까다로운 정도가 아니다. 랍토레스의 공중 이동 능력과 시간 둔화 능력이 합쳐지면, 제아무리 스테치가 빨리 움직이더라도 의미가 없었다. 저런 상대를 무슨 수로 공격하지?
스테치는 한창 엘레나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스텔라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단거리 포털 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엘레나와 화살을 거의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었다. 또한 상대가 근접전을 걸기 위해 접근해 오면, 포털을 사용해 전혀 다른 곳으로 상대나 자신을 이동시켜 버렸다.
아마 스테치가 직접 공격해 봤자 결과는 똑같을 터. 엘레나와 마르크가 열심히 주의를 끌어 주는 동안, 그가 직접 랍토레스를 공격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좀 이상한데.’
스테치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이야?』
‘생각해 봐. 저 녀석이 그렇게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 당장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셋을 혼자서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을 텐데, 왜 멀뚱멀뚱 구경만 하고 있겠어?’
다시 한번 살펴본 랍토레스는 여전히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 공중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스테치는 일단 랍토레스로부터 시선을 뗀 뒤, 스텔라와 테일러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일행들과 합류했다.
파앙!
커스드 아머를 전개한 스테치가 직접 앞으로 나서자, 엘레나의 방패를 후드리려던 테일러의 광선이 허무하게 막혔다.
‘마력량은?’
『아직은 여유롭지만, 그래도 이 이상 싱크로를 남발해선 안 돼.』
속전속결로 끝내기 위해 초장부터 싱크로를 사용한 것이 화근이었다. 설마 싱크로의 《라이트닝 스피드》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리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어쨌거나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려면, 지금부터라도 마력 소모를 최대한 줄여야만 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왕자는?”
“실패했어. 보다시피 멀쩡해.”
스테치의 말을 들은 엘레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끙- 하고 신음했다. 스테치가 합류한 덕분에 세 사람은 제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고도 완벽에 가까운 방어를 유지할 수 있었다.
잠깐의 여유를 얻게 된 스테치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사실, 왕자를 공격할 방법은 있어. 하지만 그러다가 녀석이 아예 도망가 버리진 않을까 걱정이야.”
지금이야 가만히 있지만, 자칫 어설프게 공격했다가 도망이라도 친다면 모든 일이 말짱 헛것이 되고 만다. 그러자 그런 그의 불안감을 일축하듯, 마르크가 말했다.
“왕자는 이곳으로부터 물러서지 않을 거다…… 아마도.”
“뭐?”
그 순간, 난데없이 세 사람이 서 있던 지면 바로 아래에서 포털 하나가 펼쳐졌다. 몸이 쑥 아래로 빠지기 직전, 스테치는 간신히 포털의 경계에 발을 걸친 다음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 덕분에 뭉쳐 있던 세 사람은 결국 다시 찢어지고, 다시 포털과 광선의 연계 공격이 쏟아졌다.
‘말 한마디 나눌 여유조차 주지 않는구만.’
『방금 그게 무슨 뜻이지?』
‘아마도’라는 단서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마르크는 뭔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가 랍토레스의 오른팔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럭저럭 믿어 볼 만한 말이었다.
‘그렇다면…….’
스텔라와 테일러로부터 멀리 떨어진 스테치는 양손을 펼쳐 보였다. 그의 손아귀 위로 생성된 《에어 버스트》의 바람 덩어리와 《파이어볼》의 화염구.
두 개의 서로 다른 마법을 준비한 스테치는, 먼저 《에어 버스트》를 랍토레스가 있는 쪽으로 쏘아 보냈다.
“음?”
《에어 버스트》가 눈으로 포착하기 힘들다는 특성 탓에, 랍토레스는 무언가가 자신에게 날아오는 것을 뒤늦게서야 눈치챘다. 그러나 《에어 버스트》는 스테치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스킬 중에서 가장 속도가 느린 마법. 그는 코웃음 치더니 피할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스테치는 기다렸다는 듯 그에 뒤이어 난기류 덩어리를 향해 《파이어볼》을 날렸다. 시간차를 두고 날아가던 두 개의 마법이 공중에서 합쳐지는 순간, 랍토레스의 눈앞에서 거대한 화염의 폭풍이 일어났다.
합성 마법, 《블레이징 스톰》.
푸화아악-!
“우옷?!”
랍토레스는 엄청나게 당황하더니, 여유롭던 이전과 달리 밀려오는 불길을 피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본 스테치는 피식 웃어 버렸다.
주변 영역의 시간을 천천히 흘러가도록 만든다니. 얼핏 보면 굉장해 보이지만, 방금처럼 온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방어하기엔 충분하지 않은 능력이었다.
‘어?’
그리나 잠시 후, 화염을 피해 날아갔던 랍토레스가 거짓말처럼 다시 되돌아왔다. 정말 안 도망치네?
‘젠장!’
한편, 랍토레스는 속으로 한창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는 생각 이상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스테치 때문에 꽤나 당황하고 있었다.
그의 아티팩트가 가진 시간 제어 능력은 절대적이었지만, 치명적인 단점들이 여럿 존재했다. 범위형인 데다, 일정 시간 동안 제자리에서 가만히 있지 않으면 발동도 되지 않는다.
팔다리 조금씩 움직이는 정도는 괜찮지만, 아무래도 격한 움직임이 동반되어야 하는 지상에서의 싸움에는 적합하지 않은 능력인 것이다.
‘설마 이쪽의 능력을 벌써 다 파악한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도망쳐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테이레시아스가 보여 준 이 장소는 곧 역사를 뒤바꿀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 그것을 지켜보고, 필요하다면 개입하는 것이 그의 임무인 것이다. 하지만 그 타이밍을 알 수 없는 탓에, 랍토레스는 이렇듯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부대라도 끌고 오는 거였는데!’
랍토레스는 살짝 초조해졌는지 손톱을 깨물었다. 왕국의 중대사가 걸려 있는 일인 만큼 병사들을 이끌고 왔으면 좋았겠지만,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소수 정예로만 온 것이 화근이었다.
“어!?”
그런 그의 앞으로, 스테치가 다시 나타났다. 인간의 몸으로 이 높이까지 뛰어오른다니, 랍토레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눈팔지 마!”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든 스테치는, 그대로 시간 둔화 능력에 걸려들고 말았다. 잠깐이나마 당황한 랍토레스였지만, 그는 곧 공중에서 허우적대는 스테치를 보고선 비아냥거렸다.
“정말이지 보고 배우는 게 없군. 이래 봤자 헛수고라는 걸 아직도 모르는 건가?”
랍토레스의 조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테치는 계속해서 주먹을 랍토레스에게 뻗었다. 하지만 시간 둔화의 영향으로 스피드는커녕 힘도 제대로 실리지 않은 공격. 랍토레스는 코웃음을 치더니, 고개를 살짝 뒤로 제껴 주먹을 피하려고 했다.
“걸렸구나.”
스테치가 휘두른 주먹은 ‘오른손’. 그리고 그의 오른손에는 드워프가 만들어 준 특제 너클이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이 너클은, 수동 격발도 가능하다.
투쾅!
랍토레스의 안면으로 쏟아지는 플라즈마 제트의 화염. 주먹은 이미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으니, 불꽃을 완전히 피할 방법은 없었다.
“흐아아아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흘리며 랍토레스는 그대로 지상에 떨어졌다. 새까맣게 타들어 간 그의 안면은, 피부가 녹아내려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왕자님!”
한창 엘레나와 마르크를 몰아붙이던 두 사람은, 추락하는 왕자를 보고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테일러가 스테치 일행이 접근할 못하도록 견제하는 사이, 스텔라는 급한 대로 단거리 포털을 열어 왕자의 낙차를 줄였다.
촤아악!
모래밭 위로 슬라이딩하며 왕자를 받아 낸 스텔라는, 다급히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용케 의식을 잃진 않았으나, 왕자는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위급한 상황이었다.
품 안에서 꺼낸 회복 물약을 랍토레스의 얼굴 위로 들이붓는 스텔라. 그사이 마르크의 엄호를 받으며 조준을 마친 엘레나가 화살 하나를 쏴 날렸다.
피유우우-!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드는 모래 화살. 이를 악문 스텔라는 자신과 왕자의 앞에 두 개의 포털을 만들어 냈다. 그러자 엘레나의 화살은 포털에 들어간 속도 그대로 튀어나와 그녀에게로 다시 되돌아갔다.
그러자 이번엔 마르크가 나섰다.
“흐읍!”
콰캉!
엘레나의 화살이 담은 위력을 고스란히 방패로 흡수해 낸 마르크. 그러자 방패 위에 장식된 사자 머리의 양 눈에서 주황빛 섬광이 번뜩였다.
“으오오오!”
퍼어엉!
사자의 입에서 터져 나온 충격파가 스텔라가 있는 방향으로 쭈욱 날아갔다. 한창 엘레나의 공격을 반사시키기에 급급했던 스텔라는 그 탓에 완전히 허를 찔리고 말았다.
“히익!”
온전한 정신으로 집중하지 않으면, 포털을 생성하는 좌표를 정확히 특정할 수 없게 된다. 스텔라는 충격파를 새로 만들어 낸 포털로 흡수하여, 저 멀리 다른 쪽으로 날아가게 만들었다.
쿠궁-
엉뚱한 궤도로 꺾여진 충격파가 붉은 산을 강타하자, 모래 먼지와 폭발을 일으키며 산 일부가 부서져 나갔다. 다가온 스테치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마르크에게 물었다.
“그 충격파도 다시 돌아왔으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해?”
“그렇다면 어느 한쪽이 무너질 때까지 몇 번이고 반사시켜 주지.”
묘한 부분에서 지기 싫어하는 마르크의 모습에 어이없어하던 스테치는 갑자기 날아온 광선에 얻어맞았다. 광선을 발사한 것은 물론 테일러. 그러나 커스드 아머의 보호를 받고 있던 스테치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이…… 괴물 같은 자식!”
팽팽하게 유지되던 대치 상태가 단 한 순간의 방심으로 깨져 버렸다. 테일러는 죽음도 불사할 각오를 다진 채 스텔라와 랍토레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스테치는 그런 테일러의 뒤에 쓰러져 있던 랍토레스를 슬쩍 살펴보았다. 스텔라의 응급 처치가 빨랐는지 바싹 탔었던 그의 얼굴은, 그럭저럭 온전한 상태로 회복된 지 오래였다.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스테치와 마르크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너…… 대체 뭐 하는 놈이야. 베네지아의 왕자를 이 꼴로 만들어 놓고도 네가 무사할 성싶으냐?”
스테치는 랍토레스의 말에 너털웃음을 흘렸다. 셋째 왕자의 팔도 자기가 잘라 먹었는데, 첫째 왕자의 얼굴을 못 태워 먹을 건 또 뭐람? 스테치가 말했다.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내가 누군지는 네 알 바 아니니까 닥치고 죽어. 더 이상 네놈 면상은 꼴 보기도 싫다.”
스테치는 검을 치켜들었다. 최소한 랍토레스가 지상으로 내려온 이상, 이제 놈이 죽을 때까지 밀어붙이는 일만 남았다.
쿠르르르-.
그 순간, 지축을 울리는 지진이 일어났다. 스테치는 물론이고, 그의 일행과 랍토레스 일당까지 모두 그 자리에서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뭐야?!”
진동의 원인을 찾기 위해 《애니멀 인스팅트》를 발동한 스테치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지진의 근원지는 다름 아닌 붉은 산. 산의 끝자락으로부터 시작된 진동이, 그대로 능선을 따라 내려오며 스테치가 있는 곳까지 전해져 오고 있었다.
“땅이……!”
“엘레나, 마르크! 뒤로 물러서!”
콰아아앙!
스테치의 경고와 함께, 붉은 산의 꼭대기가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