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아치발의 신자들
(145/203)
145화 아치발의 신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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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아치발의 신자들
2022.02.23.
쿠웅!
《레바테인》의 화염에 버터처럼 썰려 나간 거인의 목이 떨어지고, 그에 뒤이어 머리를 잃은 몸뚱이도 쓰러지면서 모래 속 깊숙이 파묻혔다. 공중에 떠 있던 스테치가 작은 크레이터를 만들어 내며 착륙하자, 내내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마르크와 엘레나가 달려왔다.
“해내셨네요!”
“솔직히, 이번만큼은 다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슈화악-.
모래를 털고 일어서는 스테치의 옆에 청록색의 빛무리가 모여들더니, 곧 인간의 형상으로 변화하였다. 붉은 머리칼을 찰랑이며 나타난 메멘토 모템은 그대로 스테치를 지나쳐 거인의 시체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손가락 끝으로 거인의 팔뚝을 훑는 순간, 갑자기 미동조차 하지 않던 거인의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스테치!”
메멘토 모템의 외침을 들은 스테치는 황급히 거인을 향해 반지를 겨누었다.
“커스 이팅!”
그러자 거인의 머리와 몸은 검은 사기와 푸른 마력으로 산산이 분해되어 스테치의 반지로 빨려들어 갔다. 메멘토 모템은 거인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흉판 위로 훌쩍 뛰어올라 체내에 박혀 있던 무언가를 뽑아냈다.
거인의 심장이자 핵으로써 사용되었던 검은 아티팩트였다. 혹시라도 이전처럼 통제를 잃고 무작정 흡수해 버리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하는 스테치였으나, 다행히 메멘토 모템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가 보여 준 검은 아티팩트는 작은 큐브의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마치 심장처럼 규칙적으로 검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잠깐만 빈틈을 보이면 바로 방금처럼 날뛰려 든다니까. 이건 네가 가지고 있어.”
메멘토 모템의 말을 들은 스테치는 검은 아티팩트를 배낭 안에 쑤셔 넣었다. 그냥 놔두기엔 영 꺼림칙한 물건이었지만, 잠깐 들고 다니는 것 정도는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쪽은 나중에 처리하자.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 * *
세 사람, 아니 네 사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랍토레스와 그의 부하를 찾는 것이었다. 아티팩트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테일러의 시신 외에, 스테치는 나머지 두 사람의 생존 여부를 확실히 파악하고 싶어 했다.
모래에 휩쓸린 탓에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스테치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은 랍토레스와 스텔라의 시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추정 사인은 모래 속 바윗덩이에 의한 두부외상 및 질식사. 베네지아의 첫째 왕자라는 타이틀에 걸맞지 않은 허무한 최후라고 말할 수 있겠다.
“아무것도 없네.”
스테치는 그들이 지니고 있던 아티팩트라도 취해 보려 했지만, 테일러를 제외한 두 사람의 아티팩트들은 죄다 기생형이었던 탓에 남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스테치는 세 사람의 시체를 한곳에 모아 말끔히 소각시켰다. 활활 타오르는 시체를 쳐다보던 마르크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씁쓸해 보였다.
“왜 그래?”
스테치의 물음에 마르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그에 대답했다.
“랍토레스의 두 부하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마르크는 잠시 침묵하더니 곧 말을 이어 나갔다.
“두 사람 다 내가 직접 훈련시켰지. 되도록이면 나와 마주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참 말도 안 되는 바람이다만.”
“……내 편에 서서 싸우게 된 것을 후회하냐?”
“그건 아니다. 우리가 아니었더라도 언젠간 다른 누군가가 그들에게 똑같은 운명을 선사해 줬을 거다. 그만큼 베네지아 왕가를 원망하는 이들은 많으니까. 그저 시간의 문제였을 뿐.”
“알았어.”
더 이상 왈가왈부해 봐야 그다지 좋을 거 없다는 생각에 스테치는 입을 다물었다.
시체가 완전히 탄 것을 확인한 셋, 아니 네 사람은 그제야 붉은 산을 올라갔다. 지형이 험준하지 않고 완만한 덕분에, 그들은 숨 한 번 차는 일 없이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스테치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미래시’가 뭐야? 왕자도, 너도 그게 엄청 중요한 것처럼 말하던데.”
그러자 마르크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미래를 보는 아티팩트 테이레시아스의 능력과, 랍토레스가 도망치지 않았던 이유까지 전부 설명했다.
“……그리고 내가 감비니 요새에 제때 지원 병력을 이끌고 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아티팩트 덕분이다. 너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당연히 스테치는 당황했다. 베네지아 왕가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을 지닌 아티팩트를 보유하고 있다면, 자신이 그 어떤 기상천외한 방식의 기습 작전을 펼치더라도 사전에 계획이 들통날 우려가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나도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스테치 아텔리어.”
메멘토 모템 때문에 이제는 마르크도 스테치를 진짜 이름으로 불렀다.
“셋째 왕자를 노리는 이유가 뭐지? 개인적인 원한이라도 있어 보이는데.”
갑작스런 마르크의 질문에 한참 고민하던 스테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숨겨 봤자 무의미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겪어 왔던 일들을 일부나마 털어놓게 되었다.
자신이 베네지아의 셋째 왕자와 엮이게 된 계기, 그리고 메멘토 모템을 얻게 된 경위와 부활 능력까지.
“부활이라니……. 이제 와서 새삼 놀라울 것도 없다만, 그래도 정말 기이한 운명이로군.”
“나도 그렇게 생각해.”
스테치의 사정을 들은 마르크가 놀라워하며 말했다.
“이건 그저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셋째 왕자는 미래시를 통해 네 아티팩트의 존재를 먼저 알아냈을 가능성이 있다.”
“말 되네. 어쩐지 키퍼에 대한 공략법을 너무나도 빨리 찾아낸다 싶더라니. 근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마침 그때쯤에 셋째 왕자가 미래시로 확인한 엘프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몸소 나섰었다고, 이드릴에게서 전해 들은 기억이 있다.”
“엘프 봉기? 하!”
옆에서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엘레나는 기가 찼는지,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간만에 열이 받을 대로 받았는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봉기 따위는 없었어요. 애초에 우린 그럴 여력도 없고, 무턱대고 덤벼들 만큼 멍청하지도 않아요.”
엘레나는 씹어뱉듯이 거칠게 말했다. 스테치 덕분에 간신히 잠재웠던 인간에 대한 분노가 다시 끓어오르는 듯 보였다.
“비난할 건덕지가 필요하면 항상 엘프부터 들먹이고, 필요하면 가차 없이 죽이고. 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그런 짓을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저지르는 거죠?”
“…….”
스테치는 입을 콱 다물어 버렸다. 그가 엘프들의 숲에 들어가서 온갖 험한 꼴을 당하면서도 줄곧 잠자코 있었던 이유는, 인간에게 당해 온 엘프들의 역사가 말도 하기 힘들 정도로 처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한 자신이 잘난 듯이 굴 수는 없는 노릇이잖은가.
물론 지금의 엘레나는 더 이상 어둠의 숲에서만 지내던 시절의 그녀가 아니었다. 많은 곳을 여행하고, 북부로 오면서 인간과 엘프가 다시 화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목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픈 과거가 한순간에 지워지는 것도 아니었으니, 이렇게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분위기가 잠시 어색해진 그때, 세 사람보다 앞장서서 걸어가던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심각한 와중에 미안한데, 다 왔어.”
스테치는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빨리 꼭대기에 도달한 것에 안도하며 메멘토 모템의 뒤를 따랐다.
거인이 만들어 낸 거대한 틈새로 접근한 스테치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그 아래에는 던전의 대공동처럼 텅 빈 공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먼저 내려갈게.”
신체 능력도 원래대로 돌아왔겠다, 더 이상 맨몸으로 몇십 미터나 되는 높이를 뛰어내릴 자신은 없었다. 스테치는 얌전히 픽을 박아 넣은 뒤 밧줄을 걸고 천천히 균열 아래로 하강했다.
탁!
그런 그와 일행을 우습게 보듯 맨몸으로 착지한 메멘토 모템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코를 비틀어 쥐었다. 메멘토 모템뿐만이 아닌, 스테치나 다른 두 사람도 견디기 힘든 악취가 공간 전체에 짙게 깔려 있었다.
스테치가 반지로 주변을 밝혀 보니 더더욱 기이한 광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검은 천으로 꽁꽁 둘러싼 무언가가 관처럼 생긴 수많은 함 안에 담겨 늘어서 있고, 그 앞에는 삼각뿔 형태의 거대한 제단이 서 있었다.
이게 다 뭐람? 어안이 벙벙해진 스테치는 천천히 함으로 다가가 안의 내용물을 살폈다. 천을 슬쩍 걷어 올리자 미라처럼 바싹 말라비틀어진 사람의 시신, 그리고 시신의 것으로 추정되는 잡다한 소지품들이 보였다.
그중에서 자그마한 나무패 하나를 집어 든 스테치는, 그대로 바짝 굳어 버리고 말았다.
이덴 마을의 주민임을 증명하는 글귀.
덥석!
“!”
그 순간, 미라화된 시체가 나무패를 쥔 스테치의 손을 붙잡았다. 스테치가 깜짝 놀라 그것을 뿌리치는 것과 동시에, 모든 함에 뉘어져 있던 시신들이 죄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뭐, 뭐야?!”
그들은 시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이라 부르기도 뭐 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썩은 내를 풀풀 풍기며 걸어오는 시체들을 본 네 사람은, 뒤로 천천히 물러섰다.
우웅-.
허리춤에서 전해지는 진동을 느낀 스테치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할로우 블레이드가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빛이 의미하는 바를, 이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스테치는 이를 악물었다.
스으으-.
허리 뒤쪽으로 둘러맨 스테치의 배낭으로부터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그대로 이덴 마을 주민들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을 맴돌던 사기가, 바짝 말라비틀어진 그들의 전신을 가려 주는 검은 로브로 변해 걸쳐졌다.
“아텔리어 씨, 이건-”
“젠장!”
그들은 그 모습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치발의 신자.
엘레나의 외침을 들은 스테치는 검을 뽑아 치켜들었고, 할로우 블레이드는 한층 더 강한 빛을 뿜어냈다. 이덴 마을 사람들의 몸뚱이들은 잠시 빛에 저항하는가 싶더니, 이내 힘없이 가루가 되어 폭삭 무너졌다.
“헉…… 헉…….”
헐떡이던 스테치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이리 와 봐!”
어느새 제단 위로 올라가 있던 메멘토 모템이 스테치를 불렀다. 솔직히 조금도 움직이기 싫었지만, 자꾸만 그를 재촉하는 부름에 스테치는 천천히 걸어갔다.
“낯익지 않아?”
메멘토 모템이 가리킨 것은 제단에 파인 큐브 형태의 슬롯. 그리고 그곳에는 제단 아래의 함까지 이어지는 기다란 홈이 파여 있었다.
스테치가 배낭에서 검은 아티팩트를 꺼내서 가져다 대 보니, 슬롯과 아티팩트의 크기는 딱 맞았다. 그것을 본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그래, 여기는…… 아치발의 신자들이 태어나는 장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