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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화 프레야 (146/203)


146화 프레야
2022.02.24.


“뭔지 모르겠으면 그냥 놔둬.”

한창 기계 장치 하나를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던 스테치에게, 메멘토 모템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눈으로 쳐다본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잖아.”

“야, 이 바보야.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

스테치가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쥐어뜯으며 말했다.

“우리가 뭐라도 찾아내지 않는다면, 사막에서 인생을 끝내게 될 거란 말야!”

제단을 비롯한 각종 시설을 발견한 스테치 일행은 일단 케일럼 왕국과 연락을 취하려고 했지만, 곧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메시지 마법은 사막 바깥으로 날려 보내기 어려운 데다, 지면에 깔린 모래는 상시 외부에서 중심부를 향해 흐르기 때문에 도보로 빠져나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즉, 그들은 사막 한가운데에 갇혀 버린 것이었다.

다행히 주변에 널린 몬스터와 붉은 산에서 찾은 안전한 수맥 덕분에 식량 문제는 한결 덜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누차 말했지만,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아치발의 신자가 이곳에 온 목적은 급격하게 줄어든 신자의 수를 늘리기 위해서였을 거야.”

아치발의 신자를 만들기 위해선 재료가 될 육체와 검은 아티팩트가 필요하다. 하지만 아티팩트는 세계수를 오염시키기 위해 사용되다가 스테치에 의해 소멸했으니, 대사막 한가운데에 남아 있는 하나를 되찾아 신자들을 충원할 계획이었을 것이다.

“신자들을 사막 안에서 만들어 냈다면, 사막 밖으로 내보낼 방법도 있다는 뜻 아니겠어?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그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생각이잖아.”

스테치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현재 엘레나와 마르크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바깥으로 사냥을 나선 상황. 아치발의 신자들과 가장 깊게 연관되어 있는 쪽은 스테치와 메멘토 모템이었기 때문에, 시설을 조사하는 작업은 자연스럽게 둘의 담당이 되었다.

오늘은 조사를 시작한 지 둘째 날.

시설은 매우 거대했지만, 크게는 세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의식을 거행하는 데에 쓰일 법한 제단과 각종 장비들이 놓인 상층부.

해석 불가능한 문자로 기록된 자료들이 가득 찬 중앙 서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용도를 알 수 없는 지하의 텅 빈 공간.

쿠당탕!

탁자 위에 누워 있던 메멘토 모템은 늘씬한 다리를 쭉 뻗어 낡은 의자를 뻥 차 버린 뒤, 훌쩍 내려와서는 말했다.

“이 안에 아직 조사해 보지 않은 구역이 차고 넘치는데, 그중 하나에는 우리가 원하는 답이 있겠지. 이 층은 이제 다 조사했던가?”

“그래. 대충은.”

“좋아, 그럼 아래로 내려가자.”

스테치는 층계참을 내려가는 메멘토 모템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말했다.

“미치겠다. 너 그냥 반지로 돌아와 있으면 안 되겠냐? 괴리감이 장난 아닌데, 이거.”

그 굵직하고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지금은 웬 표범 같은 여자가 되어 눈웃음치고 있다니. 스테치는 팔등에 돋아나는 닭살을 손으로 문질러 댔다.

“글쎄, 내가 이 모습이 되도록 의도한 건 아니라서.”

메멘토 모템은 손을 한번 슥 흔들어 준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스테치는 메멘토 모템을 따라 서고로 들어갔다. 대부분의 종이로 된 서적들은 세월의 풍파를 피하지 못하고 바스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여기…… 봐야 될 자료가 너무 많아서 건드릴 엄두도 못 내고 있었지.”

스테치는 종이로 된 산을 헤집으며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고, 메멘토 모템은 편하게 그 뒤를 따라갔다. 대충 손에 잡히는 몇몇 종이들을 메멘토 모템에게 건네주었지만, 그녀는 대충 훑어보고는 등 너머로 휙휙 던져 버렸다.

“역시 모르는 글자들 투성이네.”

메멘토 모템은 세 종족의 언어를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해석할 수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아치발의 신자들이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들은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문서 하나를 집어 먼지를 털어 낸 뒤 들여다보았다.

“죄다 뒤죽박죽이야. 얼핏 보면 고대 엘프 글자 같다가도, 드워프나 인간의 글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마치 세 종류의 언어가 모두 하나로 혼합되어 있는 것 같아.”

메멘토 모템과 스테치는 다른 책장에 꽂힌 스크롤과 문서들을 살폈다. 그러던 도중, 스테치가 메멘토 모템에게 말했다.

“안 되겠다, 읽지도 못하는 글자들만 봐서야 의미가 없겠어. 여기서 힘 빼지 말고 지하로 가자.”

스테치의 말에 메멘토 모템은 어깨를 으쓱였다.

“마음대로. 근데 그쪽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 않았나?”

붉은 산에 오른 첫째 날.

시설의 모든 구역을 하나하나 살펴보기엔 그 크기가 너무나도 방대했던 탓에, 스테치 일행은 둘로 나누어져 조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하층부의 지하실을 담당했던 엘레나와 마르크는 그곳에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고, 덕분에 그쪽은 조사 우선순위에서도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곳은 다 꽉꽉 들어차 있는데, 정작 아무것도 없는 그런 공간만 그렇게 크게 비워 놨다는 건 오히려 이상하지 않아? 분명 두 사람이 놓친 무언가가 남아 있을 거야.”

스테치는 확신에 찬 발걸음으로 지하에 내려갔다.

어둡고,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지하 하층부. 그러나 보이는 건 오직 짙은 어둠뿐이었다.

“……진짜 아무것도 없네.”

스테치가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아보자, 멍한 표정으로 지하실 곳곳을 둘러보는 메멘토 모템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눈에 비치는 것은 검은 사기로 새겨진 글자들과 정교한 마력 회로도. 인간인 스테치의 눈은 물론, 엘프의 눈으로도 좇을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한 흔적들이었다.

하지만 아티팩트인 메멘토 모템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쌰앙. 이럴 줄 알았으면 제일 먼저 여기부터 오는 거였는데.”

“왜? 뭐라도 찾았어?”

“아서라. 네 눈으론 못 보는 거니까.”

메멘토 모템은 벽을 한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회로도를 훑었다. 마력 회로를 기동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대기 중의 마력. 그러나 이 마력 회로는 작동하지 않는다. 왜지?

“……마력 이외에 다른 게 더 필요한 건가?”

무언가를 떠올린 메멘토 모템은 스테치에게 다가가 배낭 안에 들어 있던 검은 아티팩트를 다짜고짜 꺼내 갔다. 스테치는 그런 메멘토 모템의 행동을 함부로 방해하고 싶지 않아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녀가 검은 아티팩트를 가져다 지하실의 벽으로 가까이 들이대자, 글자와 회로도가 붉은 빛을 번뜩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회로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잠시나마 이 답답한 상황을 타파할 돌파구를 찾아냈다고 생각한 메멘토 모템은, 유의미한 변화를 발견해 내지 못하자 답답해졌는지 발로 지하실 벽을 걷어찼다.

퍽!

“이 빌어먹을 것은 왜 이래? 문제가 대체 뭐냐고?”

뭔가, 뭔가가 부족하다. 필요한 것은 전부 다 갖췄다고 생각했는데. 그러자 옆에서 보고 있던 스테치가 말했다.

“허. 네가 나보다도 더 조급해할 줄은 몰랐는데.”

“시끄러!”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메멘토 모템에게 스테치가 말했다.

“진정하고, 뭐가 보이는지 말해 봐. 알아야 나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거 아냐?”

메멘토 모템은 그의 말을 흘려 넘기려 했지만, 사막에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것도 스테치였다는 사실을 문득 떠올렸다. 그녀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 방 전체가 마력 회로도로 가득 차 있어. 구동에 필요한 마력은 대기 중에 충분히 있는데, 어째서인지 작동이 되질 않아. 검은 아티팩트의 사기가 필요한 것 같아서 가져다 대 봤는데, 반응이 너무 미약하고.”

“괜히 이상한 걸 건드렸다가 우리 모두 망하는 거 아냐?”

“그런 위험한 거 아냐. 이건…….”

메멘토 모템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말했다.

“인간의 시각과 뇌에 간섭하는 회로 술식이야. 즉, 이 지하실은 무언가를 보여 주기 위해 준비된 시설이란 말이지.”

스테치는 그녀의 말을 듣고선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물었다.

“반응이 너무 미약하다고?”

“그래. 분명 이게 답이다 싶었는데…….”

“힘이 부족해서 그런 거 아냐?”

그의 말에 메멘토 모템이 되물었다.

“뭐?”

“봐.”

스테치가 가리킨 것은 검은 아티팩트. 그는 말했다.

“처음 우리가 붉은 산의 거인을 목격했을 때, 그 사기는 마르크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음산한 기운을 풀풀 날리고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 어때?”

메멘토 모템은 그제야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검은 아티팩트로부터 발산되는 사기가 지나치게 줄어들어 있었던 것. 만약 검은 아티팩트의 사기가 평소와 같았더라면, 엘레나나 마르크는 진작 그 독기에 중독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군. 아치발의 신자를 거인으로 만들고, 이덴 마을 사람들을 새로운 신자들로 바꾸어 놓느라 너무 많은 사기를 소모한 거야.”

메멘토 모템은 스테치의 가설에 감탄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지하의 마력 회로를 정상적으로 구동하려면 대체 어느 정도의 사기가 필요하다는 걸까?

“최소한 멀쩡할 때의 상태 그대로 되돌아와야겠지.”

“아티팩트가 품은 사기는 소멸되는 게 아냐. 시간이 지나면 다시 차오르겠지. 하지만 그 시간이 정확히 얼마나 걸릴지는…….”

“나는 잘 모르겠지만,”

스테치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지금까지 수많은 검은 아티팩트들을 흡수해 왔잖아. 그렇다면 우리가 부족한 만큼을 충당할 수 있지 않을까?”

스테치가 정신을 집중하자, 그의 몸 주위를 둘러싸듯 생성된 커스드 아머로부터 진한 사기가 뿜어져 나왔다. 외부로 노출된 사기가 마력 회로도에 닿는 순간, 방 전체에 그려져 있던 회로가 스테치의 눈에도 보일 정도의 검붉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때, 하층부 아래에서부터 느껴진 사기에 놀란 엘레나가 마르크와 함께 지하실로 막 들어왔다. 둘은 바깥에서의 사냥을 마쳤는지 각자 큼지막한 자루를 어깨에 둘러메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왜 갑자기…….”

엘레나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감각에 뒤로 주춤거렸다. 스테치가 말했다.

“내 말 잘 들어. 지금부터 뭔가를 해 볼 생각인데……. 얼마나 걸릴지는 우리도 몰라. 지하실 문을 닫아 두고 우리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엘레나가 알겠다고 대답하자, 메멘토 모템은 검은 아티팩트를 스테치에게 넘겨준 뒤 그녀에게 말했다.

“어이, 거기 엘프. 엘레나라고 했던가?”

“네?”

“예전에 네가 그랬지? 애칭이라도 하나 만들어 두는 게 좋을 거라고. 안 그래도 예전부터 계속 생각 중이었는데 지금 막 떠올랐어.”

그녀는 엘레나를 돌아보더니 씨익 웃으며 말했다.

“프레야(Freya)라고 불러 줘. 내 이름은 프레야다.”

메멘토 모템은 그 직후 반지로 되돌아갔다. 아바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토막 난 마력과 사기가 반지를 통해 하나로 합쳐진 순간, 한층 더 강한 사기가 지하실을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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