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사막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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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사막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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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사막의 근원
2022.02.25.
문이 닫히고 지하실이 완전히 밀폐되자, 반지의 빛조차도 집어삼킬 만큼 짙고 어두운 사기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만약 일반인이 지금 이 방 안에 발을 들여놓는다면 사기의 독에 중독되어 눈 깜짝할 사이에 죽어 버렸으리라.
“보인다…….”
스테치는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비전에 얼굴을 찡그렸다. 손에 들고 있던 검은 아티팩트와 벽면에 새겨진 마력 회로가 연동하면서, 텅 비어 있던 지하실 내부에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
스테치는 어느 틈엔가 자신의 양옆에 후드를 뒤집어쓴 이들이 종으로 길게 늘어선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숫자는 얼핏 보이는 것만 해도 100여 명 이상. 군대의 사열식을 방불케 하는 그 광경에, 스테치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허상이라는 것도 잊고 검을 뽑아 들 뻔했다.
터벅-. 터벅-.
뒤쪽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발소리에 스테치가 고개를 돌려 보니, 신자들 중에서도 유독 거대한 풍채를 지닌 자가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얼굴은 다른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후드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허상답게 스테치를 그대로 통과하고 걸어간 그는,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서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최근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태에 대해 말해 두고자 한다.”
“…….”
“대적자의 징표가 사라졌다.”
그러자 침묵을 고수하던 아치발의 신자들이 당황했는지, 작은 소란이 일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스테치도 익숙한 키워드가 튀어나오자 자기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자 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뱀처럼 쉭쉭 대는 듯한 목소리로 따지고 들었다.
“징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저 모습을 감추고 어딘가에서 다시 나타날 뿐이죠.”
“지난 몇 년간 신자들을 모두 동원하여 북부 전체를 뒤졌지만, 어느 곳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게 무얼 의미하는지 알겠나?”
그러자 일어섰던 신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설마, 남부로?”
“우리도 그렇게 추측 중이다.”
그러자 신자들 모두가 충격에 빠져 할 말을 잃었다. 스테치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길이 없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그의 의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남부에는 베네지아 왕가의 그놈들이 버티고 있지 않습니까?”
“큰일입니다. 징표의 용도와 의미를 그자들이 알아차린다면, 우리로선 손 쓸 길이 없어지고 말 겁니다.”
‘뭐?’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스테치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아치발의 신자들이 베네지아 왕국을 두려워한다니?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다.
“진정하라.”
거구의 신자가 손을 크게 휘저으며 일갈하자, 소란스럽던 신자들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남부로 진입하는 길은 여전히 막혀 있나?”
“베네지아 놈들이 세운 전선 아래에, 신자들을 특정해서 요격하는 오래된 마법 유물들이 잔뜩 파묻혀져 있습니다. 육상으로 접근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큰일이군. 남부의 신자들은 지금쯤이면 전멸했을 텐데.”
신자들 중 하나가 답했다.
“해상 루트는 어떻습니까? 사막 이외의 길을 뚫어서 남부로 신자들을 보내면…….”
“베네지아 왕가가 그 꼴을 두고 볼 거라고 생각하나? 최소한 지금은 해로를 봉인해 두는 편이 더 낫다.”
그러자 신자들 모두가 패닉에 빠졌다. 지금까지 징표를 들고 나타난 대적자들은 모두 각성하기 이전 단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상대하기 쉬웠지만, 만약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거구의 신자가 손을 내젓다니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들어다오.”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있던 몇몇 신자들이 거구의 신자를 올려다보았다.
“대적자의 징표가 우리들의 통제를 벗어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 머지않은 미래에 다시 나타날 대적자에게 대항하기 위한 세력을 키우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세계수를 강탈한다.”
좌중이 또다시 혼란과 당혹감에 휩싸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자리에 있던 신자들이 품은 의문은 크게 두 가지였다.
왜, 그리고 어떻게.
“세계수의 마력 순환 시스템.”
그가 품에 넣어 두었던 검은 아티팩트 하나를 꺼내 보이자, 대부분의 신자들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경의를 표했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검은 아티팩트는 스테치가 가지고 있는 것과 다른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성물의 힘을 직접 세계수 내부로 주입해서, 세계수의 영향권 안에 있는 모든 생물을 신자로 만들기 위한 소체로 만든다.”
“말도 안 됩니다.”
급기야 한 신자가 항변했다.
“세계수를 완전히 성물의 힘으로 잠식시키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케일럼의 엘프 놈들이 그걸 보고도 멀쩡히 있을 리가…….”
“이미 계획을 위한 준비는 어느 정도 진행되어 있다. 필요한 재료만 모이면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는 단계까지 와 있지.”
그러자 불만을 터뜨리던 신자들 모두가 침묵했다. 케일럼 왕국의 모든 사람들을 아치발의 신자로 바꾼다고? 만약 그런 짓이 정말 가능하다면, 더 이상은 대적자를 상대하네 못하네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거구의 신자는 자신의 계획에 못을 박아 두듯 말했다.
“우리들이 걷는 길이 험난하리란 사실은 진작부터 인지하고 있던 바가 아니었는가? 대적자건 아니건, 길을 막아서는 자는 모두 쳐부수면 될 뿐이다. 우리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 하나.”
그러자 공간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게 만들 정도로 수많은 목소리가 후드 밑에서 일제히 터져 나왔다.
“모든 것은, 신께서 다시 한번 이 땅에 현신하실 그 날을 위해!”
그들의 의지를 확인한 거구의 신자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슈오오-.
전신을 휘감고 돌던 사기가 잦아들 때쯤, 스테치는 무릎을 꿇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전신은 언제 흘렸는지도 모를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방금 우리가 뭘 본 거지?”
“기록. 마력 회로들의 목적은 지하실에서 있었던 대화를 기록하고 재생하는 거였나 봐.”
중얼거리는 스테치의 앞에 메멘토 모템, 아니 프레야가 다시 실체화했다. 그녀는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상당히 불만족스러웠는지 연신 입술을 삐죽이고 있었다.
“세계수 관련 이야기가 언급되는 걸 보니까, 비교적 최근에 있었던 대화 같아.”
“별로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한데? 결국 여기를 빠져나가는 데에 도움이 되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잖아.”
“글쎄, 그래도 꽤 많은 걸 알아냈어.”
스테치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그 기록을 본 덕분에 많은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스테치 이전에도 메멘토 모템을 착용한 이들이 여럿 있었다는 점, 그리고 메멘토 모템은 사용자가 사망할 때마다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점.
“이 광신도 놈들은 끊임없이 너에 대해 언급하는데, 그걸 보고도 네 과거가 궁금하진 않아?”
“오히려 짜증 나 죽겠어. 내 머릿속에는 아무런 기억도 없는데, 보는 놈들마다 다 나를 아는 척하잖아.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프레야는 황금빛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말했다.
“신이니 뭐니, 헛소리 하는 거 보고 있으려니까 기분만 좆 같아졌어. 나가자.”
그녀는 지하실 출구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더니, 봉인된 문을 직접 열어재끼고는 밖으로 나갔다. 자리에 남아 잠시 동안 숨을 가다듬던 스테치도 곧 프레야의 뒤를 따랐다.
계단을 올라가 보니 팔짱을 낀 프레야, 그리고 그런 그녀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엘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벽에 기대어 서 있던 마르크는 스테치에게 물었다.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다 알려 줄 테니까 보채지 마.”
스테치는 자신이 본 것을 두 사람에게 말해 주었다. 그러자 이야기를 모두 들은 엘레나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세계수 습격에 그런 뒷배경이 있을 줄은…….”
반면, 마르크는 턱수염을 매만지며 스테치가 들려준 내용을 머릿속으로 곱씹는 중이었다. 스테치가 물었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마르크가 말했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하지? 생각지도 못한 큰 수확임에는 틀림없지만, 이 여자의 말대로 우린 여전히 사막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모르지 않나.”
그러자 프레야가 손을 들며 말했다.
“그거 말인데, 좀 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점이 있어.”
모두가 프레야를 주목했고, 그녀는 헛기침을 하더니 스테치가 들고 있던 검은 아티팩트를 낚아챘다.
“스테치가 이미 말한 대로, 이 아티팩트에 담긴 힘은 지금 터무니없이 적어. 그런데 바로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거야.”
그녀가 말했다.
“생각해 봐. 수십 킬로미터 이상의 높이를 자랑하는 세계수조차 오염시킬 정도로 강대한 힘을 지닌 아티팩트라고. 그런데 고작 아치발의 신자 하나를 거인으로 만들고, 신자 몇 명 더 만들어 내는 정도로 에너지가 탕진된다니 뭔가 아다리가 안 맞는단 말야.”
“그런가?”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한데…… 스테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디 품고 있었어야 할 막대한 에너지가 어디론가 새 나가고 있어서 그런 거야. 그리고 내 추측이 맞다면 그 에너지는 바로…….”
프레야는 손가락을 들어 올려 천장을 가리켰다. 세 사람이 멍한 표정으로 그걸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자,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사막! 이 사막, 이 공간을 유지하는 데에 쓰이고 있는 거라고.”
“뭐?”
“뭐라고요?”
스테치와 엘레나는 얼핏 허무맹랑하기까지 들리는 소리에 어처구니없어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프레야가 말했다.
“이 주변에 그만한 에너지가 쓰일 만한 구석탱이는 이 사막화 현상뿐이야.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제법 설득력 있는 가설이지.”
“그래서 결국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우리가 이 아티팩트를 흡수하면, 자연히 이곳을 유지하던 힘도 소멸할 거야. 그럼 사막에서 빠져나갈 길이 마련되는 거고.”
그러자 엘레나가 물었다.
“만약…… 만약 그렇지 않다면요?”
“그때는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지 뭐. 말했다시피, 이 시설은 아직 살펴보지 않은 장소가 많으니까 말야.”
프레야의 말에 엘레나는 주저하는 눈치였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는지 이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좋아, 그럼 가 볼까?”
프레야는 다시 반지의 형태로 되돌아갔고, 스테치는 검은 아티팩트로 손을 얹었다. 끝내 우려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엘레나에게 스테치가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몸이 익숙해지고 있는지 잠에 빠지는 시간도 점점 짧아지고 있으니까.”
그는 엘레나의 어깨를 두드려 준 뒤, 반지를 검은 아티팩트 위에 댄 채 어빌리티를 시전했다.
“커스 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