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파국
(148/203)
148화 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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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파국
2022.02.26.
초목으로 뒤덮였던 파릇한 시절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불타 버리고 메말라 버린 카델트 평원.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엘프 여성이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사람이 아닌 존재라고 생각되게 만들 정도로 푸른 머리카락과, 이지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외모. 그런 그녀의 손에는 피투성이가 된 인간의 멱살이 잡혀 있었다.
“스스로 말할 기회를 주겠다.”
핏발 선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그 살기등등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킬킬거리며 그녀를 비웃을 뿐이었다. 여자가 반대쪽 손에 쥐고 있던 스태프를 허공에 띄우자, 텅 빈 손바닥 위로 작게 압축된 황금빛 마력이 어른거렸다.
“네 배후에 있는 자가 누구냐.”
“…….”
대답할 생각이 전혀 없는 건지 어깨만 들썩이는 남자의 모습에, 여자는 두말하지 않고 검지 끝에 마력을 둘러 남자의 양미간 사이를 꿰뚫었다.
푸욱!
손가락이 박혀 들어간 틈새로 가느다란 핏줄기 하나가 흘러내리고,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 대던 남자는 전신에 힘이 빠져 그대로 축 늘어졌다.
그러자 잠시 후, 무반응이던 남자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사지를 괴상한 방향으로 비틀며 입에 거품을 물던 그의 머리통이 눈 깜짝할 사이에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여자가 보는 눈앞에서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얼굴과 옷에 한가득 튄 피와 내장. 그러나 그녀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머리를 잃은 남자의 몸을 땅에 떨어뜨렸다.
콰앙!
난데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드워프 하나가 먼지구름과 바위 파편을 흩날리며 지면에 착지했다.
“데스트라! 이게 무슨…….”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던 드워프는, 눈앞에 벌어진 일을 목격하자마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피로 범벅이 된 데스트라의 모습에서는, 조금이라도 잘못 건드렸다간 깨져 버릴 것만 같은 위태로움이 느껴졌다. 데스트라는 한참 동안 멍한 표정으로 드워프를 쳐다보고서야 그를 알아보았다.
“아, 엑스턴.”
“또 실패한 거야?”
엑스턴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데스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감추고 있는 비밀을 강제로 캐내느라 다소 거친 방법을 사용했을 뿐, 목숨을 해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죽은 것은 순전히 상대가 자살을 택했기 때문.
“또 자결했어. 대체 이번이 몇 번째인지 모르겠…….”
데스트라는 갑자기 몰려오는 현기증으로 비틀거렸고, 엑스턴은 그런 그녀가 완전히 쓰러지지 않도록 뒤에서 받쳐 주었다.
“자자, 진정해.”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데스트라의 안색은 좋지 못했다. 퀭한 두 눈만 봐도 그녀가 요 근래 얼마나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지냈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대륙 전체를 혼란에 빠트리고, 분쟁을 조장하던 아버지는 카인의 손에 의해 최후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두 끝일 거라는 그들의 생각은 착각에 불과했다.
“놈들에 대해 캐묻는 것은 일단 그만해 둬. 신경 써야 할 다른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까.”
“카인은?”
데스트라의 물음에 엑스턴이 답했다.
“남쪽에서 발발한 인간과 엘프들의 싸움을 중재하러 갔어. 난 다른 장소로 가 보려던 와중에 널 발견한 거고.”
그녀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스태프를 붙잡은 뒤, 그것을 지지대 삼아 몸을 일으켰다.
“잠깐 쉴 시간도 없는 건가…….”
손가락을 한 번 튕겨 몸에 묻어 있던 육편과 피를 말끔히 제거한 데스트라는 공중으로 솟아올라 어딘가로 향했고, 엑스턴은 그녀와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 * *
30분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던 데스트라는, 곳곳에서 검은 연기를 피워올리는 어느 한 장소에 내려앉았다. 주변에 널린 인간과 엘프들의 시체를 보자마자 그녀는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이미 일어난 일이 없던 것으로 되진 않는 법.
살짝 뜬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온갖 참상들이 여과 없이 그대로 그녀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겹겹이 쌓여 화염에 바싹 타들어 가고 있는 시체들과 농기구나 무기 따위에 찔려 죽어 가는 사람들.
쏴아아-.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전장을 가득 채운 진한 혈향을 지우기엔 역부족이었다. 한창 소란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를 찾아 발걸음을 옮기던 데스트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낯익은 모습의 누군가를 발견했다.
일반인이 휘두를 수 없는 크기의 대검을 들고, 두꺼운 금속 갑옷을 걸친 인간. 빗줄기 때문에 뿌연 시야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다.
“카…….”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으려던 데스트라는, 카인이 주저앉은 인간을 상대로 대검을 치켜드는 모습에 그만 고개를 돌려 버렸다.
“히익!”
공포에 질린 인간이 몸을 잔뜩 움츠러뜨렸지만, 카인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목을 대검으로 쳐 날려 버렸다. 카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무기를 맞대던 인간과 엘프들은, 카인이 몇 명을 더 도륙 내고 나서야 전투를 중단했다.
촤악!
휘두른 대검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강렬한 검기가 대지를 양분하면서, 엘프와 인간으로 구성된 두 무리를 갈라놓았다.
“모두 각자의 무리로 돌아가라. 그리고 전해. 두 번 다시 내가 검을 뽑아 들게 만들지 말라고.”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엘프와 인간들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 더 이상의 경외심은 없었다. 오직 심연처럼 깊은 공포만이 자리 잡고 있을 뿐.
철컹-.
대검을 등에 걸어 둔 카인은 그제야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데스트라를 발견했다.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한 채 서로를 응시하던 중, 카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카인은 피로 물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많은 결심과 각오를 품고 아버지를 내 손으로 직접 죽였는데……. 그런데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악화되었지. 가끔은 내가 아버지를 억울하게 죽음으로 몰고 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네 잘못이 아냐.”
데스트라가 황급히 말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도록 유도한 자는 따로 있어. 엑스턴도, 나도 조사해 보고 있는 중이니까…….”
세 종족 간의 다툼과 차별을 부추기는 정체불명의 존재들. 최근 몇 년 동안 대륙 각지에서 싸움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들 때문이었다. 그러자 카인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제발 모르는 척 좀 그만해.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배후’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그러더니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잔뜩 일그러진 카인의 얼굴 위로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액체가 흘러내리는 걸 본 순간, 데스트라는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세 사람 중 누구보다도 강직하고 올곧은 그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너도, 엑스턴도 너무 물러 터졌어. 결국 우리들 중에서 당당하게 진실을 마주 본 것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던 거야.”
그는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평소라면 간단한 손짓 한 번만으로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는 싸움에, 내가 왜 굳이 직접 무기를 휘둘러 가면서 개입했는지 알아?”
데스트라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카인은 말을 이어 나갔다.
“인간들에게 내 능력이 조금도 통하지 않았거든. 한번 이성을 잃은 그들의 머릿속에 공포가 각인되고 나서야, 모든 이들이 제정신을 되찾았어.”
“뭐?”
카인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인 인간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통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지시나 명령이 통하지 않았다고? 데스트라는 그의 말에 완전히 넋을 잃었다. 다른 일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그녀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럴 수가…… 있어?”
“아니, 통상적이라면 당연히 불가능하지. 아직도 모르겠어?”
카인이 답답하다는 듯 그녀에게 말했다.
“잊어먹은 거 같으니까 다시 상기시켜 줄게. 우린 신이야. 마음만 먹으면 거의 무엇이든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 그런데도 그 소위 ‘배후’라는 자들의 기억이나 생각 하나조차 읽지 못한다는 게 말이 돼?”
“아니.”
“그럼 우리가 아는 이들 중에 우리의 힘을 무력화하고 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누굴까? 잘 한번 생각해 봐.”
카인이 데스트라에게 그토록 말해 주고 싶었던 것. 그 의미를 깨달은 그녀는 천천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배후라고 주장하는 그놈들의 정체는, 바로 아버지다.”
빗줄기가 더더욱 거세졌지만, 두 사람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잠시 후 데스트라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죽었어. 네…… 네가 죽였잖아.”
“그래. 하지만 방금 내가 말한 것 이외에 달리 무슨 설명이 가능하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이 우리 손으로 빚어낸 것인데, 우리의 힘이 통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잖아.”
카인의 가설에 데스트라는 무어라 항변해 보려 했지만, 이미 이성은 그의 말이 옳다 주장하고 있었다.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데스트라를 보며 카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기억나?”
데스트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망치는 아버지의 등에 카인이 검을 찔러 넣은 그때, 카델트 평원 전체를 쓸어버릴 대폭발이 일어났다. 그 여파와 충격이 실로 어마어마했던 탓에, 폭발에 휘말린 세 사람은 수 킬로미터 이상을 날아갔다.
“아버지는 충동적으로 행동하시는 분이 아냐. 승산이라곤 전혀 없는 우리들과의 싸움에서, 아버지가 굳이 마지막까지 저항한 이유가 뭘까? 난 항상 그게 궁금했어.”
카인은 당시의 상황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는 그 순간까지도 가지고 있던 검은 물체는, 대폭발 직후 아버지의 시체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그냥 돌아가셨다고 보기엔 수상한 정황이 너무 많아.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감춰져 있…….”
“큰일이야!”
쾅!
지면에 거의 구르다시피 착지한 엑스턴이 다급한 목소리로 두 사람에게 외쳤다.
“간신히 북동쪽 상황을 정리해 놨는데, 이번엔 엘프와 드워프들이……!”
그의 말을 들은 데스트라는 곧장 위로 튀어오르더니, 앞서 날아가는 엑스턴의 뒤를 쫓았다. 갑작스럽게 대화가 끊긴 카인은,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이 날아간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이후 대륙 전체에 걸친 분쟁이 간신히 사그라들 때쯤, 데스트라는 기어이 주동자로 추정되는 인물 몇몇을 생포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아치발의 신자들’이라고 칭했다.